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80)화 (79/122)

80.

……그걸 말이라고 해.

“같은 방에서 자겠다고 청한 건 너였다.”

“그래도 이대로는 싫습니다.”

“뭐가 그렇게 싫어진 건데. 갑자기.”

“갑자기가 아닙니다.”

……진짜, 못 해먹겠네. 뭐 저렇게 변덕스러운 거야.

페란스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입술을 비죽였다.

“그렇다니 그렇게 알겠다. 더는 말할 필요 없어. 이만 자도록.”

“…….”

그 말에 로젠게인이 등을 돌린 페란스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어서 들려오는 말도 조심스러웠다.

“저는 제 나이가 어린 게 싫습니다.”

무슨 소리야. 세 살이나 어리니까 내가 늙어 빠졌을 때라도 계속 세우고 있을 수 있다며.

“……새삼.”

별수 없는 일을 싫다고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페란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저를 어리게 보시지 않았으면 하는데…… 제가 더 어린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압니다.”

“나는 내가 네 나이를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보는데.”

페란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로젠게인의 턱이 굳었다.

“……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다 자랐다고 여겨지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뭐……?”

페란스가 홱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있던 로젠게인과 하마터면 머리를 서로 부딪칠 뻔했다. 서로가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 너는 지금도 빨리 성장하고 있잖아.”

“키와는 다른 문제 같습니다, 전하.”

“뭐가 다른데?”

“저를 너무 아이처럼 보고 계십니다.”

“아이잖아. 말했듯이, 더 아이처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어.”

“그러니까……,”

계속 같은 얘기의 반복이었다.

로젠게인이 입술을 한 번 질근 물더니 페란스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이 몇 배나 더 진지해졌다.

“저는 아주 빨리 자랄 겁니다, 전하.”

“그러리라는 걸 알고 있어. 지금도 너무 빠르다고.”

“다 자라서 만나러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참고 있으라는 소리야?”

“네.”

“……결국 같은 얘기잖아.”

허탈해진 페란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알았어.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편히 자도록.”

“전하를 그리워하지 않겠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로젠게인이 고개를 움직여 고집스레 시선을 쫓아왔다.

어쩐지 마르스티엘이 하던 짓과 비슷했다. 먼저 고개를 돌리면 턱을 쥐어서 억지로 보게 만드는 것과.

“……그럼?”

“많이 보고 싶겠지만 참겠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보고 싶은 것과 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로젠게인이 다시 입술을 질근 물었다.

표정이 꼭 이렇게 해도 왜 알아듣지 못하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저를 아이가 아닌 약혼자로 봐 주셨으면 하니까요.”

“그게 무슨……. ……아?”

페란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미 약혼자로 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허락했잖아.”

“…….”

로젠게인의 귓불이 페란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붉어졌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저를 약혼자로 보고 계시지 않다는 뜻 같습니다.”

“아니라니까.”

“하여간 이렇게 자는 건 오늘밤이 마지막입니다.”

로젠게인이 홱 손을 놓고 침대에 누웠다.

반듯하게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는 게 더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 같았다.

……어려워.

하지만 보고 싶지 않아서 오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라고 하니 그걸로 됐다.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옆에 똑같은 자세로 드러누웠다.

“나는 네가 성장하길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의 너도 좋아.”

“…….”

나는 아이였을 때의 너를 전혀 몰랐으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게 몹시 귀한 시간이다.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마르스티…… 아니, 너답고 그리고…….”

그다음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열세 살 때도 마르스티엘은 마르스티엘이었다. 그건 자신이 열세 살의 모습을 좋아한다고 할 때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하여간 좋아. 네가 이대로 쭉 내 곁에 있어서 네가 자라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그럼 저는 전하에게 계속 아이인 채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려나……. 아니라고 보는데.”

“아니요. 그럴 겁니다.”

어느 순간 훅 자라서 갑자기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는 건 페란스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페란스는 로젠게인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뭐, 괜찮아.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하여간 날 보고 싶어 할 것이라 했으니 꼭 그렇게 해. 끝내 오고 싶지 않다면 편지라도 자주 보내도록.”

“전하께서 보내시면 저도 보내겠습니다.”

“……아, 진짜. 이런 일까지 흥정은.”

짜증은 나지만 그것도 마르스티엘 같았다.

“두고 봐. 네가 다 읽지도 못할 만큼 보낼 테니. 한 장도 빼먹지 말고 받는 만큼 답장을 쓰도록.”

로젠게인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게 많이 쓰실 수 있으십니까?”

“응.”

왕족으로 태어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페란스는 제 손으로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왕실의 모든 문서는 받아쓰는 비서관들이 따로 있었으니까.

“비서관들에게 쓰게 하실 생각이로군요. 그건 공정하지 못합니다.”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애정에 공정을 따지는 것부터 잘못이지. 준 만큼 받는 게 아니잖아.”

“그건…… 맞는 것 같습니다.”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로젠게인이 순순히 받아들여 의외였다.

“그래서, 너는 답장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로젠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개수를 똑같이 주고받는 게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전하께서 알고 계시니 상관없습니다.”

뭐야. 그러니까 내가 애가 된 것 같잖아.

“……좀 깎아 줄게. 두 장에 한 장만 보내.”

“안 깎아 주셔도 됩니다. 제가 더 많이…….”

“더 많이 쓰겠다고?”

“……드릴 겁니다. 뭐든.”

마르스티엘도 그랬다.

-연하가 취향입니다. 보살피는 걸 더 좋아하고 받는 것보다 주는 걸 더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확고한 취향이었네.

“그럼 그렇게 해.”

뭐든, 네가 좋은 대로.

이번의 내 생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니.

“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의 손끝이 조심스레 서로를 스쳐 갔다. 로젠게인이 제 손바닥을 위로 했고, 페란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제 손보다 더 큰 손이었다.

둘은 서로의 손을 꾹 쥔 채 잠을 청했다.

둘 다 새벽이 다가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상대를 재우기 위해 잠이 든 척했다.

……그래도 나는 역시 네가 어서 자랐으면 좋겠어.

그 역시 오늘밤처럼 자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 * *

다음 날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새벽에 갑작스레 든 생각이었는데, 역시 블루와렌에 보내기 전 약혼식을 치러야 할 듯싶었다. 페란스는 눈을 뜨자마자 키슬크를 불러 약혼식을 지시했다.

당연히 키슬크는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왕실의 혼사를 그렇게 번갯불에 땅콩 구워 먹듯 치를 수는 없으며, 약혼식 준비에는 적어도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단 사실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반면에 이미 번갯불에 뭐라도 구워 먹는 약혼식을 치렀던 경험이 있는 페란스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장소는 위스타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왕실의 후원이 될 테고, 때마침 계절이 아름다워 따로 꽃 장식을 더할 필요도 없었다. 손님을 초대할 필요도 없었다. 로젠게인의 부모가 오늘 입궁하기로 했고, 페란스에게는 키슬크와 유모가 있었다.

키슬크의 고집을 꺾은 것은 바로 그 말이었을 것이다.

“내 약혼식에 너 말고 누가 또 있어야 하는데? 말해 봐.”

“그, 갑자기 그러시면, 전…….”

키슬크는 콧등을 감싸 쥐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잠옷 차림인 페란스가 키슬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어제 고치라고 했던 옷은 다된 거지? 거기에 휘장을 둘러 줘. 모자나 보석 같은 건 내 걸 아무거나 쓰고. ……아, 그리고 내 옷은 흰색으로 준비해 줘. 나는 선왕의 펜던트만 있으면 돼.”

“전하, 부디…… 제발…… 끄응…….”

키슬크가 바닥을 꺼트리고 남을 법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도 없지 않으십니까.”

“아…… 반지.”

그 블루 다이아몬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르스티엘이 값만 치른 채 끝내 끼워 보지도 못했다.

“반지는 따로 맞춰야 해. 지금 맞춰 봤자 손가락 굵기가 달라져서 어차피 못 쓸 테니 천천히 하자고.”

“아니, 지금 당장 끼워야 하는 게 아니옵니까. 반지도 없이 어찌 약혼식을 치르신단 말입니까.”

“흠…… 그런가. 그럼 하나 만들지 뭐.”

“전하, 그러니 최소한 한 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괜찮아. 바로 만들 수 있어.”

“네? 아니, 무슨 반지를……,”

“좀 바빠지겠는데. 하여간 부탁해. 케이크는 크기도 크기지만 맛있게 만들라고 해 줘. 어제 보니까 과자를 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맛있게 만들어야 좀 먹을 것 같아.”

“알겠사옵니…… 아니, 전하! 이게 아니옵고,”

키슬크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인 페란스가 서두르라는 듯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걸 시작으로 궁 전체가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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