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79)화 (78/122)

79.

“……말도 안 돼.”

오늘 제 침대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는 말에 키슬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질식할 뻔했다.

동침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열세 살은 그런 생각을 하기엔 너무 어리며, 조혼 풍습에도 첫날밤은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한참 한 뒤에야 키슬크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하여간 페란스도 목욕을 마쳤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로젠게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자신보다 씻는 시간이 길었던 모양인지, 로젠게인은 한참 기다린 다음에야 왔다.

로젠게인을 침실로 데려다준 키슬크는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과 함께 방을 떠나기 전까지 몇 번이고 전하께서는 몹시 예민하셔서 잠들기가 어려우시며, 그러므로 행여나 자는 도중 몸을 건드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고 또 남겼다. 페란스가 잠들기 어렵다는 건 핑계고, 딴생각은 말고 시체처럼 누워서 잠만 자라는 얘기였다.

“아니, 정말 말이 안 되잖아.”

그렇지만 페란스는 키슬크가 뭐라고 하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페란스가 벌떡 일어나 맨발로 로젠게인의 앞까지 다가왔다.

“이게 말이 돼?”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흔들었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매가 짧잖아! 기장도!”

로젠게인은 페란스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내일 입을 옷은 손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잠옷은 굳이 고칠 필요가 없기에 그대로 입게 했다.

그런데, 짧았다. 발목이 전부 드러나는 데다 소매도 껑충 올라와 있었다.

“네가 나보다 크다고? 왜?”

로젠게인이 고개를 잠깐 옆으로 돌렸다. 페란스는 보지 못했지만 웃음을 감추려는 행동이었다.

“제가 더 크니까요.”

“뭐? 왜?”

“그렇게 태어났나 봅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래도 지금은 내가 더 커야 하는데!”

“제가 열세 살이라서요?”

“그렇……. ……젠장. 벌써부터 이렇게 차이가 났었다는 건가. 그건 좀 억울한데.”

페란스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얘한테 화를 내서 뭐 해…….

“그만 가서 눕자. 밤이 늦었어.”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손이 난로처럼 뜨거웠다.

“오른쪽 왼쪽. 어느 쪽이 좋아?”

페란스가 이불을 걷으며 물었다. 로젠게인이 화들짝 놀라 페란스의 손에서 이불을 빼앗아 들었다.

“전하께서는 어느 쪽을 좋아하십니까?”

“상관없어. 흠, 그래도 고르자면 오른쪽.”

“그럼 제가 왼쪽에서 자겠습니다.”

페란스가 오른쪽에, 그리고 로젠게인이 왼쪽에 누웠다.

나란히 누워 한 이불을 덮고 천장을 바라보는 기분이 조금 생소했다.

생각해 보면 너와 섹스를 한 적은 있어도 같이 잔 적은 없는 것 같아.

눈을 떠 보면 마르스티엘이 곁에 없거나 한 적이 더 많았다. 그가 잠든 얼굴을 본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네 잠버릇은 어때?”

로젠게인은 꽤 성실히 고민해 본 뒤 대답했다.

“그냥……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 편인데……. ……아, 아닌가?”

혼자 잘 때는 잠버릇 같은 건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딱 한 번, 키사드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자신에게 잠버릇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 머리를 올려놓은 마르스티엘의 허벅지에 열심히 얼굴을 비벼 댔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정하다는 말을 처음 했던 때가 그때였지.

정작 하는 짓은 네가 더 다정했었는데.

반듯하게 누워 있던 페란스가 훌쩍 상반신을 일으켰다.

“전하?”

로젠게인이 페란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페란스가 이불을 걷고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무릎베개해 줄게.”

“……네? 갑자기 말입니까?”

“응. 네가 그걸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제가 왜…… 아니,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어서 누워.”

“그럼…….”

침을 한번 삼킨 로젠게인이 페란스가 두들긴 허벅지에 살짝 머리를 내려놓았다.

“편히 있어도 돼.”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대고만 있는 머리를 페란스가 푹 눌렀다.

“……힘드실까 봐.”

볼이 벌겋게 익은 로젠게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그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제법 여러 번 보는 듯했다.

“괜찮아.”

그땐 이유를 몰라서 각인 반응만 걱정했다. 그가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데 갑자기 그 위에 구토라도 할까 봐 그게 가장 무서웠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괜찮다는 말이 부족했다.

발현이 아직 끝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지금 몸이 불편하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미열과 미세한 성감은 계속 느껴졌지만 스물아홉 살이 되도록 겪은 것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가 미리 그런 것들을 겪어 놓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지금은 이런 감각도 느낄 수 있었다.

허벅지를 누르는 따듯한 무게를. 가까이서 들리는 심장 소리를. 어깨를 잔뜩 굳히고 어떻게든 무게를 덜어 내려고 애를 쓰는 다정함을.

사르륵,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나는 블루와렌에 가 본 적이 없어.”

페란스가 옛날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저도 없습니다.”

“언젠가 가게 되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해 본 적은 있었다.”

너와 약혼식을 올렸던 그날.

언젠가는 네가 나를 데려가 주지 않을까 싶었어.

“그럼…… 저를 만나러 와 주실 겁니까?”

“글쎄.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다.”

네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제법 많아.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만다리스를 제거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블루와렌이든 어디든 여행을 다니는 건 모든 게 해결된 다음이었다.

“블루와렌에는 신기한 게 많을 거야. 나는 네가 거기서 이곳에는 없는 것들을 많이 보고 들었으면 한다. 나를 대신해서.”

“…….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리를 잘 알아 둬. 미로 같은 곳이라고 하니까. 언젠간 네가 나를 데려가 줘.”

“네.”

“약속이다.”

페란스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을 미끄러트렸다. 매끄러운 머리칼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졸린가?”

“아니요, 아직.”

“나도 그래.”

그렇다면 아직 이렇게 좀 더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 나는 시간을 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대신 네가 나를 보러 오는 건 괜찮을 것 같아.”

부드럽게 감겨 머리칼을 흩뜨리는 손가락의 감촉을 헤아리던 눈이 그 순간 반짝 뜨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오는 건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하다. 빨간…… 마르스티엘이 올 때 동행하도록.”

“그자는 앞으로도 위스타드를 자주 방문하게 됩니까?”

“그럴 것 같은데. 여기서 새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조만간 위스타드에 새로운 소금을 들여올 거야.”

“그럼 저도 자주 올 수 있겠군요.”

“아니, 그러면 너를 블루와렌까지 보내 놓은 이유가 없잖아. 가끔씩만 와. 삼 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나의 삼 년보다 너의 삼 년이 더 빠를 텐데. 한창 자랄 때는 원래 그러잖아.”

“…….”

그 순간 로젠게인이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러더니 딴 얘기를 했다.

“이젠 자리를 바꾸고 싶습니다, 전하.”

“자리? 아, 오른쪽에서 자고 싶다고?”

“아니요. 이렇게.”

로젠게인이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눈높이가 맞았고, 그다음 순간 그가 제 어깨를 내리눌렀다. 어느새 자신은 로젠게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소년의 허벅지는 날씬했고, 그래도 의외로 단단한 구석이 있어 페란스를 놀라게 했다.

“이러면 양심에 찔리는데……. 너는 열세 살이잖아.”

페란스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로젠게인이 인상을 썼다.

“전하는 저보다 가볍고, 저는 전하보다 크고 튼튼하니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거짓말. 내가 너보다 가볍다고?”

“네.”

“내가 아무리 말랐어도 그럴 리가 있나. 나는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

“세 살은 훨씬 많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거든.

그런데 양심은 좀 따끔하지만 그를 베고 누워 있는 건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았다.

그날 마차에서 잠이 들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키사드가 이 세상 끝에 있기를 바랐을 거야. 너와 내가 탄 마차가 영원히 달리도록.

페란스가 했던 것처럼 매끄러운 금발을 쓰다듬으며 로젠게인이 말했다.

“전하께서 부르시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겁니다.”

“음……. 그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자주 오지 말라는 게 기분 상했나?”

“아니요. 저를 걱정하신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제가 먼저 전하를 뵈러 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좀 서운했다.

“왜?”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페란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려 로젠게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왜?”

“오랜만에 보면 달라져 있을 겁니다.”

“뭐가? 내가?”

“서로가.”

“나는 지금이 좋은데.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좋고, 네가 내게 마음을 연 것 같아서 좋아. 너는 이게 싫다는 건가?”

그러면 무릎베개는 왜 해 준 거야.

약속 같은 건 왜 했는데.

왜 그렇게 마르스티엘하고 똑같은 건데.

“계속 이대로라면 싫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페란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가 싫다는데 눈치도 없이 계속 머리를 맡기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희미하게 각인 반응이 시작되고 있었다.

참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실망감이 앞서 각인 반응이 더 예민하게 다가왔다.

“이만 자야겠어.”

페란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억지로 눈을 꾹 감는데 로젠게인이 등 뒤에서 작게 물었다.

“……제가 싫다고 한 게 싫으신 겁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