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풉!”
페란스가 기침과 웃음 사이의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다행히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려 먹던 과자가 튀어나오는 불상사는 없었다.
……웃지 말아야지. 웃으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
페란스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숨을 골랐다.
“불과 얼마 전인데. 그리고 너는 아직도 열세 살이고.”
로젠게인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때보다 키가 많이 자랐습니다.”
“키는 자랐어도 나이를 더 먹은 건 아니잖아.”
웃지 않는다고 했어도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페란스는 저도 모르게 하던 말을 멈추었다. 왠지 로젠게인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는 전하도 아직 어리신데요.”
로젠게인이 한마디 했다.
“아니, 겉으로는 그래도 나는……. ……나는 곧 성년이다.”
“삼 년이나 남았습니다.”
“육 년보다는 짧지.”
“삼 년도 길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육 년보단 짧아.”
“…….”
로젠게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아, 화났나 보네.
페란스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이젠 차가 식었을 것 같아. 닦아 내도 되겠어?”
“……. ……네.”
아직 화가 풀리기엔 이른지 대답이 느렸다. 페란스가 슬쩍 웃음을 삼키고 하얀 차 수건에 찻물을 적셨다.
“이리 와. 아니, 내가 가도 되겠군.”
페란스가 몸을 일으켜 로젠게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몸을 일으키려던 로젠게인이 엉거주춤 도로 주저앉았다.
“저도 갈 수 있었는데…….”
“아픈 건 너잖아.”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마르스티엘도 그런 말을 했다. 흉이 지면 기념 훈장이 될 거라고, 그렇게 아파 보이는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했다.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겠지. 내게는 진심 같았지만.
로젠게인의 등 뒤에서 페란스의 눈가에 그늘이 돋아났다.
“전하는 다정하십니다.”
찻물에 적신 수건으로 상처를 조금씩 닦아 내는 페란스에게 불쑥 로젠게인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네. 저는 그게 좀…… 이상합니다.”
마르스티엘도 그랬다. 다정하다고.
“뭐가 이상한데?”
“다정할 필요가 없으신 분인데 다정하셔서.”
-애정의 가치를 모르시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다정하십니다.
페란스의 손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게…… 싫다는 건가?”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다정하신 게 좋은지, 싫은지.”
……왜 그런 말도 똑같은 거야.
“싫을 건 또 뭔데.”
“계속 생각이 날까 봐서. 블루와렌에 가게 되면.”
“아…….”
페란스가 상처를 닦아 내던 손을 멈췄다. 손이 계속 흔들려서 자칫 아프게 만들 것 같았다.
“그건…… 내가 다정하게 구는 게…… 싫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지, 왜 다정한 겁니까.
“말씀드렸듯이,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다정하신 전하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저 혼자 느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그것도 여전히 싫다는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네게만 다정하면. 그럼 좋을 것 같나?”
“……네.”
나직하고 느린 대답에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나는 네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제가 왜……. ……,”
고개를 홱 돌리던 로젠게인이 어깨를 주춤했다. 상처가 수건에 거칠게 쓸려서일 것이다. 페란스가 당황해 로젠게인의 어깨를 붙잡아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엉겁결에 한 행동이지만 그게 나은 것 같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조심해. ……내가 너라면, 약혼이 싫을 것 같아서. 네가 호이헨 홀에서 나와 엮이지 않았다면 어린 나이에 억지로 약혼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 그래서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블루와렌에 가는 게 싫다고 했잖아. 약혼을 하지 않았으면 거기 갈 일도 없었을 텐데.”
“그건…… 거짓이라는 말로 들려서요.”
“뭐가?”
“약혼이.”
“아…….”
로젠게인이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흰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뒷목이 페란스의 눈에도 붉어 보였다.
“약혼이 가짜라는 게 싫다고?”
“……네.”
“하지만 너는 고작 열세 살인데.”
로젠게인이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전하께서 자꾸만 나이 얘기를 하시는 것도 싫습니다.”
과자를 권하는 것도 게임판을 건네는 것도 싫었다. 고작 세 살 차이인데 터무니없이 어린애로만 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런 게 싫다는 얘기였다. 페란스가 아니라.
“하……,”
페란스가 붉어진 뒷목에 한숨을 흘렸다. 저절로 몸이 기울었다.
페란스의 이마가 상처를 피해 로젠게인의 등을 눌렀다. 마르스티엘보다는 작고 어린 등이 파드득 떨려 왔다.
그것도 싫어서가 아닐 것이다.
페란스가 이마에 닿는 체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 걱정했는데. 네가 나를 싫어할까 봐.”
“그럴 일은 없습니다.”
같은 대꾸였지만 더 단호했다.
“그럼 걱정할 필요가 없나……. ……아아, 다행이다.”
안도가 눈을 감겼다. 페란스가 눈을 감은 채 다시 긴 숨을 내쉬었다.
들었어? 아니래.
네 가문이 잘못되는 일이 없으면, 그래서 내가 모르는 새 네 인생을 망치는 일이 없으면 네가 나를 싫어할 이유도 없는 거야.
너와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네가 원하면 우리 약혼은 언제든 진짜가 될 것이다.”
페란스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그럼 되는 겁니까?”
“그래.”
그래. 네게 빚이 있던 건 나였으니까.
“이상합니다.”
나직한 말은 등을 울리게 했다. 등과 맞닿은 이마를 데웠다.
“왜 전하께서 저를 그렇게……. 제가 드린 건 아주 작은 거였는데.”
아니야.
너는 무덤에 파묻혀 있던 나를 끄집어냈어.
네가 없었다면 한 번도 가능하지 않았던 삶을 시작하게 해 주었다.
유감스럽게도 너무 짧았을 뿐이었다.
“작지 않았다. 그걸 작다고 할 수는 없어.”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래.”
부디.
부디 이번에는.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올린 페란스가 다시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찻물은 그새 전부 식어 있었고, 고름을 닦아 내는 일은 제법 오래 걸렸다.
그사이 밤이 다가왔다.
* * *
페란스가 로젠게인을 침실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였다.
“전하와 같은 방에서 자고 싶습니다.”
“……응?”
페란스는 당황해 입을 벌린 채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동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아니, 그런데 떠나기 전 같이 있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으니…… 그리고 약혼을 했는데……,”
페란스의 반응에 로젠게인도 당황했는지 말을 꼬았다. 그러다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하와 저의 약혼에.”
“그게…… 어째서?”
“조혼 풍습으로 어릴 때 혼인시킨 아이들도 초야에는 한 침대에서 잠을 자게 했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부부가 됐다는 의미에서. 같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하니까 또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로젠게인은 약혼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식의 진행을 굉장히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남들에게도 진짜로 보이고 싶은 모양이지.
“그럼 키슬크에게…… 아, 그래. 키슬크에게 말을 해 두겠다.”
“혹시 시종장의 인가를 받아야 합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그래도 네가 나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알려야지.”
로젠게인이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같은 방을 쓰도록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음, 뭐……. 네가 원한다면.”
제 뜻대로 됐는데도 로젠게인은 약간 복잡한 얼굴을 했다.
“역시 다정하십니다.”
“뭐라는 거야. 요청을 한 건 너였는데.”
……아, 그런 적도 있었지.
마르스티엘이 느닷없이 무릎을 베고 싶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잠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겠다 싶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걸 두고 다정하다고 말한 마르스티엘이 제 목을 휘어 감고 키스를 했다.
너는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다정하게 구는 걸 좋아했던 건가.
자신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 로젠게인이 하는 행동은 마르스티엘과 비슷했다. 아주 조금은 그가 전부 다 거짓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한테만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얼마든지 다정하게 굴어 줄게.
대신 나를 좋아해라. 이번에는.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살갗이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나는 다정한 성격이 아니야. 그런 말은 네게서 처음 들어 봤어. 그러니까 나는 네게만 다정한 사람이다.”
지금 만지고 있는 로젠게인의 뺨이 순식간에 온도가 올라갔다.
“그럼…… 그건 좋습니다.”
조금 더 높아진 뺨의 온도가 좋았다. 이런 온도가 다정함이라면 얼마든지 다정해질 수 있었다.
“일단은 네 침실로 가. 키슬크가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씻고 내 침실로 오면 되겠군.”
“네, 전하.”
자신을 보며 좀 더 짙어지는 눈도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