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77)화 (76/122)

77.

한참 고민한 끝에 페란스는 저녁 식사는 따로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혹시라도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되면 탈이 나거나 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실은 걱정은 핑계고, 아직은 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일지도 몰랐다.

……나를 싫어하면 어떡해.

싫어하는 얼굴을 식탁 앞에서까지 보게 되는 건 더 싫을 거잖아.

그런 이유로 혼자서 식사를 마쳤다. 거의 매일 별 생각 없이 혼자 하던 식사가 오늘따라 더럽게도 심심하고 맛도 없었다.

어찌어찌 거의 손을 안 댄 음식을 물리고 입을 헹구었다.

로젠게인 알란드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지금은 서재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후우…….”

밥을 다 먹었으니 더 나빠질 일은 없겠지.

페란스가 달리트 게임판을 직접 손에 든 채 서재로 향했다. 뒤를 따르는 근위대 기사가 신발 밑창에 가시라도 박혀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묵직한 게임판을 쳐다보았다.

탕탕.

“페란스 카벨리카 전하 드십니다.”

근위대가 페란스의 방문을 알린 뒤 서재의 문을 열었다.

“너희들은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대신 문을 잘 지키고 있도록.”

굳이 이르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당부를 남기고 페란스가 서재로 들어섰다.

들어가기 싫다.

로젠게인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동시에 마주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페란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열세 살짜리에겐 너무 넓은 서재에서 로젠게인 알란드의 모습을 찾았다.

* * *

“음……?”

옷이 그대로였다.

페란스가 눈을 다시 뜨고 로젠게인을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오후에 입고 온 그 옷이 맞았다.

“오셨습니까, 전하.”

로젠게인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옆 탁자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페란스를 맞았다.

“옷이 그렇게 컸나? 도저히 못 입을 정도로?”

대뜸 질문을 던지는 페란스에게 로젠게인이 고개를 한 번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그럼 왜?”

“제가 거절했습니다.”

“……?”

“선물은 감사하지만 제 옷으로도 괜찮습니다.”

“…….”

페란스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벌써?”

그리고 무심결에 튀어 나가는 말도.

“네? ……아닙니다, 전하.”

너무 직접적인 언사에 로젠게인도 당황한 듯 보였다.

아무리 머저리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싫으냐고 묻는 왕족에게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야, 됐어. 못 들은 걸로 해라. 이건……,”

페란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럼 이 선물도 필요 없으려나.

직접 주니까 옷처럼 거절은 못 하겠지. 내 선물도 네게는 약혼과 같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네가 심심할까 봐. 달리트를 즐겨하면 좋겠……. ……아니야, 이것도 됐어.”

탁.

페란스가 게임판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부디 편하게 머물도록. 나는 네가 떠날 때까지 서재에는 걸음하지 않겠다.”

복잡하던 마음이 이제는 한쪽으로 가라앉았다.

어쩌면 마주하지 않는 게 답일지도 몰랐다. 페란스는 그를 열세 살 아이처럼 대할 수도, 그렇다고 마르스티엘처럼 여길 수도 없었다.

……죽기 직전에 네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간절하게 들려서 어쩌면 너도 내가 죽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네게 한 짓이 사라지면, 그러면 우리가 다른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겠지. 내가 과거로 되돌아온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비틀린 일을 바로잡으라는 거창한 의미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몰라. 그저 전부 우연이고, 신의 장난일 뿐일지도.

그렇다면 너와 내가 다시 뭔가를 시작해야 할 이유 또한 어디에도 없는 거야…….

“전하.”

페란스가 서재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문이 한 뼘쯤 열리기도 했다.

쿵.

등 뒤로 다가온 로젠게인이 열리려던 문을 도로 닫았다.

“왜……?”

페란스가 등을 돌린 자세에서 고개만 돌려 로젠게인을 쳐다보았다.

“싫어하지 않습니다, 전하.”

“…….”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진하던 눈동자 색이 그새 조금 연해져 있었다.

좀 더 있으면 정말로 마르스티엘처럼 보이겠군.

나는 그 눈이 정말 예뻤는데, 무섭기도 했어.

너는 그 눈으로 내게 내내 거짓말을 했던 거니까.

그 눈이 내게 진실했던 적이 있긴 했었나…….

“내가 너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지. 실수로 나온 말이니 잊도록. 선물을 거절한 일은 신경 쓰지 않겠다.”

“거절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기치 않게 궁에 하루 머물게 되었다면 당연히 갈아입을 옷이 필요해지기 마련이었다.

“부친께서는 각인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모르십니다.”

“남작이……. ……그게 왜?”

“…….”

로젠게인이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시선을 살짝 옆으로 피했다.

“그래서…… 숨기고 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게 되면 여기서도……,”

“뭐를 숨겼다는 건데?”

“각인이 가짜라는 걸.”

“그거야……. ……잠깐.”

문득 떠오른 것은 마르스티엘의 빗장뼈 부근에 났던 상처였다.

“좀 봐 봐.”

페란스가 다짜고짜 로젠게인이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스르륵, 툭.

스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페란스는 손을 멈추지 않고 셔츠 단추도 풀었다.

“전하…….”

로젠게인이 미미하게 광대뼈 근처를 붉혔다.

“…….”

셔츠를 끌어 내린 페란스는 로젠게인의 뒷목 아래쪽에 어설픈 천 조각이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곪았나?”

“……약간.”

각인을 할 때 남긴 상처는 절대 덧나지 않았다. 피부에 스며드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깨끗해졌다. 반점이 남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잇자국이 덧났다는 것은 각인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약은 발랐어?”

“……들키지 않게 약을 구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하,”

페란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빨간 머리…… 그러니까 마르스티엘한테라도 말을 했어야지. 다른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자라면 눈치를 챌 것 같았습니다.”

“나 참. 그건 그렇긴 하지만.”

페란스가 천 조각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표정은 잘 참고 있었지만 목덜미의 솜털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몹시 아플 텐데.”

“괜찮습니다.”

“아냐. 네 살갗하고 내 이는 상성이 별로 안 좋은 모양이야. 물기만 하면 곪는 걸 보면.”

“…….”

로젠게인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의 침묵에는 그 스스로도 각인이 사실이라 믿고 싶어서 상처를 계속 부정하다 이 꼴이 됐다는 사연이 들어 있었지만 페란스는 몰랐다.

“궁정의가 하는 걸 보니 엄청 아프게 생긴 막대기로 염증을 다 긁어내던데.”

로젠게인이 제 셔츠 자락을 벌리고 있는 페란스의 손을 피해 상처를 가리려고 들었다.

“놔두면 나을 겁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페란스가 뺏기려던 셔츠 자락을 도로 확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헛소리 말고 그대로 있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빌어먹을. 짜증은 나지만 네 말이 맞아. 궁정의는 안 돼. 시종장도 안 되고.”

그렇다면 약은 포기해야 했다. 애초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궁 안에서 페란스가 약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에게 상처가 생긴다면 그건 당연히 성 안에 있는 전부가 알아야 할 일이었다.

“닦아 내는 것만이라도 하자. 그러고 보니 곪은 상처에는 박하잎을 쓴다고 한 것도 같았는데.”

페란스가 로젠게인의 손을 붙잡고 서재 가운데 놓인 책상 아래로 끌고 갔다.

“여기 앉아 있어. 여기라면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어도 그러려니 할 테니까.”

그리고 페란스는 달리트 게임판을 그 앞에 펼쳐 놓았다.

“게임을 하다 편하게 있는 척해.”

“옷을 다시 입으면 될 일입니다.”

그를 대신해서 페란스가 인상을 썼다.

“됐어. 다시 건드릴 생각 하지도 마.”

그 상처 위에 다시 뭐가 스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더 아픈 기분이었다.

페란스가 문을 열고 근위대에게 박하차를 포함한 다과상을 준비해 오라는 명령을 남겼다.

* * *

일단은 뜨거운 차를 식히는 일부터 해야 했다.

“……아예 식혀서 가져오라고 할 걸.”

페란스는 찻잔에 따른 찻물을 입으로 후 불며 중얼거렸다. 별 생각 없이 같이 딸려 온 과자를 먹는 중이라 과자 부스러기가 찻잔에 빠질 뻔했다. 화들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터는 페란스를 로젠게인이 미동 없이 바라보았다.

“안 튀었어.”

페란스가 억울하다는 듯 찻잔을 가리켰다.

“압니다.”

“근데 왜 그렇게 봐?”

“눈에 보여서요.”

“음……? 내가 너무 가까이 있나?”

“그게 아니라…… 눈에 보입니다. 계속.”

잠깐 로젠게인의 말을 곱씹어 보던 페란스가 혀를 찼다.

“아니긴 뭐가 아냐. 네 시야 안에 내가 계속 있어서 그런 거잖아. 정 거슬리면 조금 떨어져 있어.”

“거슬리지 않습니다.”

“표정은 거슬린다는 그건데.”

“아닙니다, 전혀.”

페란스가 투덜거렸다.

“안 믿겨. 호이헨 홀에서 처음 봤을 땐 지금처럼 살벌한 얼굴은 아니었단 말이야. 그땐 더 귀여웠는데.”

“그땐……. ……많이 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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