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당황을 털어내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제가 물을 수 없는 얘깁니까? 제가 어려서요?”
“당연하지! 너는 이제 고작 열세 살이잖아!”
페란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방 안을 서성이기까지 했다.
사실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니, 쟤는 왜 저런 걸……. 열세 살이잖아.
가뜩이나 아까부터 열세 살로 안 보여서 난처한 와중이었다.
“후우…….”
페란스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마르스티엘과 겪은 일들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몹시 애를 썼다.
“열세 살이라고 해도 전하의 정혼자가 될 몸입니다. 전하께서 발정기를 어떻게 보내실지 저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네 나이가 아직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전하께서 다른 자와 발정기를 보내실 생각이라면 저는 약혼을 거부하겠습니다.”
너무 단호한 말투에 페란스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그건 약혼이 거짓이라고 떠드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런 약혼은 받아들이기 싫습니다.”
“아니, 그게…….”
뭐지, 이건.
약혼이 거짓인 게 싫다는 거야, 아니면 약혼이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거야.
“약혼이 필요한 이유는 충분히 설명했고…… 그런데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가?”
“아니요. 약혼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약혼한 전하께서 다른 상대와 발정기를 보내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럴 생각이야 조금도 없었지만 저렇게 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왜?”
“전하께서 우리 약혼을 거짓으로 취급할 생각이시라면, 그런 약혼을 위해 제 삶을 전부 바꿀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
페란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젠게인은 미동 없이 앉아서 페란스가 답을 하길 기다렸다.
“마르스티…… 아니, 네가 할 법한 말이네. 그럴 생각은 없어.”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억제제를 쓸 거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성년이 되기 전까지 발정기 주기는 긴 편이고 그렇게 괴롭지도 않아. 삼 년이라면 아주 긴 시간이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삼 년……. 그럼 전하께서는 삼 년 뒤 저와 발정기를 보내실 겁니까?”
“뭐……?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절대 아니야!”
삼 년이 흘러도 로젠게인 알란드는 고작 열여섯 살이 될 뿐이었다.
아, 나도 열여섯이긴 하지……. 망할, 그거야 아만다리스가 미친 인간이라 그런 거고. 내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아.
“아니라고요……. 그렇군요.”
로젠게인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페란스는 열세 살짜리와 발정기 얘기를 나누는 게 몹시 불편했다. 몸은 열여섯 살이라고 해도, 정신은 멀쩡한 스물아홉이었다. 정말로 부적절했다.
“약속한다. 네가 없는 동안 네게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하지 않아.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일단 그 약속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로젠게인 알란드가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까?”
“어……. 그런 셈이었는데.”
사실은 좀 더 시간을 함께 보내려 했다. 그가 블루와렌으로 떠나면 중간에 잠깐씩 돌아온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보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누구에게 좋은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로젠게인 알란드에게 자신은 여전히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용무는 없으셨고요?”
“음……. 그렇지. 약혼식에 관한 얘기는 남작 부부와 나누면 되고.”
“그럼 귀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아……. 돌아가고 싶나?”
“네, 전하. 부모님을 뵌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
너는 내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군.
입을 다문 페란스가 씁쓸히 웃었다.
나는 너를 맞이할 때까지 계속 숨 쉬기가 버거웠는데.
“남작가로 가는 것은 아직 어렵다. 하루만 궁에 머물러. 남작 부부를 이곳으로 부를 테니.”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겠냐는 말은 꼭 그래야 하느냐는 의미로 들렸다.
“그게 안전해. 되도록 빨리 남작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그동안 네 시간을 빼앗지 않을 테니 편히 머물도록. 아, 그래도 근위대는 항상 대동해야 해.”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장을 부르지. 네가 쓸 방으로 안내할 것이다.”
페란스가 종을 울려 키슬크를 불렀다.
내내 입 안이 썼다.
* * *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로젠게인이 떠나고 사실에 혼자 남은 페란스가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 양손을 가슴에 올리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아니, 하기는 좀 했지. 그런데 일부러 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쓴 것뿐인데.
……그게 약혼이 되면 안 됐던 건가.
……. ……제기랄, 알 게 뭐야.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는데.
덜컹.
페란스가 몸을 홱 비트는 바람에 소파가 흔들렸다.
몸이 작아지니 한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일인용 소파도 크기가 넉넉했다.
선물이라도 하면 나를 좀 좋아해 주려나.
그런데 열세 살짜리는 대체 뭘 좋아하지?
“……!”
뭔가가 떠올랐다. 페란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시 종이 울리고 키슬크가 달려왔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로젠게인 알란드는? 뭘 하고 있나?”
“방금 전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이르잖아. 식사 전까지 뭘 할 거라는 말 같은 건 없었어?”
“왕실 서재를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긴 했습니다.”
“서재? 왜?”
“독서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페란스가 콧등을 구겼다.
“열세 살이잖아.”
“열세 살이시니까요.”
“그 나이면 정원에서 뛰어놀아야 되는 거 아닌가?”
키슬크가 무슨 말을 하시냐는 듯 눈을 흠칫 뜨고 페란스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도 그러신 적 없습니다.”
“아, 나는 좀 다르고. 밖에 나가는 걸 안 좋아했잖아.”
“로젠게인 알란드 경도 그럴 수 있지요, 전하.”
“어딜 봐서.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인간인데.”
“……. ……말씀을 하셨으니 저도 말씀을 올리지만, 로젠게인 알란드 경은 전혀 정원에서 뛰어놀 나이의 아이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하.”
“그건……. 아니, 키가 좀 크다고 해서 열셋이 열셋이 아닌 건 아니잖아.”
“로젠게인 알란드 경과 약혼하신 것은 전하이십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고.”
말을 하다 말고 페란스가 시무룩해졌다.
어쩔 수 없는 약혼이라는 말처럼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으니 약혼을 했고 어쩔 수 없으니 외국으로 가는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 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전하. 갑자기 왜 그렇게 언짢은 얼굴을 하십니까.”
키슬크가 페란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페란스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전하. 카벨리카와의 혼인이 크나큰 영광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옵니다.”
“싫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열세 살에 강제 약혼이라면 너라도 싫지 않겠나.”
“그 상대가 전하라면 그저 황송할 것입니다.”
“내 나이가 너무 많은 걸지도.”
키슬크가 황당하게 구겨지려는 얼굴을 애써 다독였다.
“……외람되오나 전하, 전하께서는 이제 열여섯이 되셨습니다.”
“내가 더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페란스가 시무룩한 한숨을 내쉬었다.
“세 살 차이신데…….”
키슬크가 그렇게 많은 차이가 아니라고 열심히 말을 보탰지만 페란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뭐, 기왕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환심이라도 사려고 애를 써 봐야지. 그래서 말인데, 선물이라도 할까 하고.”
“선물이야 언제든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전하. 염두에 두고 계신 물건이 있으신지요?”
“달리트 판이 어떨까.”
“달리트 판이라면…… 선왕께서 주신 것을 말씀하십니까?”
“음. 기왕 주는 거 의미 있는 걸 주는 게 낫잖아.”
부친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물아홉이나 먹은 지금은 더했다. 달리트 게임판은 부친이 열 살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전부 금과 상아로 만들어 보석으로 장식한 게임판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치스러웠다. 제 이름이 새겨진 게임판이 몹시 특별하게 느껴져 손도 대지 않고 한동안 지켜만 보았다.
부친이 죽은 밤에는 그 게임판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 그렇지만 충분한 의미가 들어갈 정도로 괜찮은 물건이라면 그게 딱이었다.
“그건 너무 귀한 물건이옵니다, 전하. 왕실의 보물이 아닙니까.”
키슬크가 난처한 얼굴로 반대했다.
“파혼할 때 반납하라고 하지 뭐.”
“네, 전하? 파혼……이라고 하셨습니까?”
“농담이야. 하여간 내가 가지고 있건 로젠게인 알란드가 가지고 있건 별 차이 없으니 괜찮다고.”
“그래도…….”
“혼담이 오가고 첫 선물이다. 그걸 주고 싶어.”
페란스가 그런 말로 키슬크의 반대를 잘라 냈다.
“그리고 식사 때에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나? 가져온 옷이 있던가?”
키슬크는 언짢다 못해 슬픈 얼굴이었지만 더는 반대를 하지 못했다.
“없을 줄 압니다, 전하.”
“그럼 내 옷을 내줘. 식사 때 입을 옷과 잠옷도. 내일 아침에 갈아입을 옷까지. 기장이 길지도 모르겠지만 체격이 좋으니까 흉해 보이진 않을 거야.”
“……네, 전하? 길다니요?”
키슬크가 당황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당장 옷을 지을 수도 없을 거잖아. 그렇게 뚝딱 완성될 리도 없고.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그러니까 내 옷을 입히라고. 새 옷이 몇 벌 남아 있지? 그것도 선물이라고 해. 일 년만 더 지나도 잘 맞을 테니.”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혹시 옷이 맞지 않으면 손을 보아도 되는지요.”
“그렇게 해. 옷을 즉석에서 고칠 만한 자가 있나?”
“시간이 있으니 그사이 재단사를 부르겠나이다.”
“알았어. 달리트 게임판은 서재로…… 아니, 아니야. 이 방으로 가지고 와. 식사 후 내가 직접 주겠다.”
“예, 전하.”
갑자기 궁이 조금 바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