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맹세코 말하지만 호이헨 홀의 오두막에서 봤을 때는 절대 이러지 않았다. 더 작고 더 아이 같았다. 그래서 마르스티엘을 겹쳐 보는 일도 덜했다. 언뜻 보면 비슷했지 그가 바로 연상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자칫하다간 마르스티엘이 되돌아온 것처럼 착각을 할 정도였다.
……아냐, 아니라고.
키도 훨씬 작고 체격도 더 작아. 얘는 어린애야. 열세 살이라고.
차라리 생각을 딴 데로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혼자 왔나? 메……, 마르스티엘은?”
“혼자 왔습니다, 전하.”
“정신이 나갔나 보군. 신변을 보호하라 이른 열세 살짜리를 혼자 보내다니. 그는 지금 어디 있나? 설마 내게 말도 없이 블루와렌으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수도에 있습니다.”
로젠게인의 걸음이 잠깐 멎었다.
“……음?”
발이 꼬일 뻔한 페란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로젠게인이 환장할 정도로 마르스티엘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전하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는 입장입니까?”
“뭐…… 그렇다고 봐야지. 쓸 데가 많은 인물이다.”
이제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로젠게인 알란드와 새로운 마르스티엘의 관계가 어떻게 자랄지.
함께한 시간으로 따지자면 자신보다는 메넌이 마르스티엘에게 훨씬 더 가까운 존재였을 것이다. 메넌은 노예 시절을 함께했고,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될 때까지 마르스티엘을 지켰다.
내가 좀, 새치기를 한 기분이 들어. 그런데 그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하나도 모자라 둘씩이나 되는 건 좀 그렇잖아.
“곧 너도 그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내게서 빼앗아 가지는 말고.”
페란스가 농담 삼아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원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페란스 하나라는 점에서 좋은 농담은 아니었다.
로젠게인은 조금도 웃지 않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혼자 오겠다고 하기 잘했군요.”
“음? 네가 그랬다고? 왜?”
대답이 의외였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특히 얼굴이.”
“얼굴이? 왜? 그 정도면 보기 싫지 않은…… 아, 그것보다는 보기 괜찮은 정도라고 해야지.”
“네. 그래서 싫습니다.”
로젠게인이 멎었던 걸음을 다시 이었다. 어이없어 하던 페란스가 무의식중에 그와 맞춰 발걸음을 이었다.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로젠게인이 메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상황이 달라지면 인간관계도 다 변하는 건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감정 같은 건 그대로지 않을까 했는데. 빨간 머리가 나를 빠르게 받아들인 것처럼.
“그래도 너무 싫어하진 말도록. 말했듯이, 유용한 인물이니까.”
“그를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유감스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로젠게인 알란드는 메넌과 함께 블루와렌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첫인상이야 달라지기 쉬운 법이니.”
페란스가 실망을 다독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로젠게인이 마르스티엘의 모습 그대로 성장하길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삶을 살 테니 다를 수도 있어. 그건 잊지 말자.
복수를 원해서였지만 마르스티엘은 자신과의 혼인을 원했다. 하지만 복수할 필요가 없는 로젠게인은 혼인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제 열세 살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어떤 이를 원하게 될지, 텅 빈 백지로 놔두어야 했다.
자신은 그에게 빚이 있었다. 다시 시작된 생은 그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가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다른 자를 원하게 되면 기꺼이 파혼할 각오를 하고 있는 게 맞았다.
그쯤에서 페란스가 애써 생각을 돌렸다.
“사실에 다과를 준비해 두었는데…… 흥미가 없다면 다른 것을 해도 좋아. 궁을 구경하고 싶나? 내가 안내하겠다.”
“구경은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전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젠게인이 너무 마르스티엘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가 아이답지 않게 제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실로 가지.”
페란스가 조금은 무거워진 표정으로 방향을 짚었다.
* * *
“들도록.”
사실에는 온갖 과자의 향연이 벌어져 있었다.
어린애 입맛에 맞추기 위해 왕실 요리사들이 오전 내내 힘을 썼다.
하지만 막상 맞은편에 허리를 반듯이 세워 앉은 로젠게인을 보니 포도주를 준비해 두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로젠게인이 예의상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한 입 베어 물고 더는 손을 대지 않는 게 과자를 좋아할 나이는 지났다고 말하는 듯했다.
민망해진 페란스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빨간…… 마르스티엘이 다른 심부름을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군. 중재회의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들었나?”
자신과의 약혼 소식을 들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네, 전하. 세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이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줄었으니. 일단은 네게 묻지 않은 채 혼담을 진행시켜 면목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괜찮습니다.”
키가 훌쩍 자란 로젠게인은 말투만 변한 게 아니라 시선도 변했다. 현란하게 반짝이던 맑은 눈은 색이 조금 연해졌다. 그는 마르스티엘이 그랬던 것처럼, 감정을 알아채기 어려운 눈으로 페란스를 바라보았다.
페란스는 입 속의 혀가 계속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뻐하는 것 같진 않네.
……하긴, 열세 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 같아도 싫어했을 테지.
페란스가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네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마음은 없어.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면 파혼도 허락하겠다. 다만 지금은 안 돼. 적어도 내가 대관식을 치를 때까지는 약혼을 유지했으면 해.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건 너와 콜더스트가의 안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파혼이라는 말에 가슴이 지끈했다.
파혼을 원하냐고 묻던 마르스티엘의 표정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로젠게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전하께서 제게 각인하셨다는 거짓말까지 하시면서 저와 혼인을 원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로군요.”
“아니, 그건…….”
말문이 막혔다.
다른 이유는 곁가지고, 사실 내가 너와의 혼인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겠지.
갑자기 달라진 태도는 키가 자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막연한 호의와 선의가 걷잡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면서 그 반대되는 감정으로 변질된 것일 수도 있었다.
……무서웠겠지. 제 행동 때문에 전쟁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도는데.
후회했으려나. 거기서 나를 발견한 걸.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가문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열세 살 나이에 혼인이니 하는 뜬금없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말했듯이, 네 의사와 상관없이 일이 진행된 것은 유감이다. 이 약혼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무사히 대관식을 치른 뒤 너는 얼마든지 파혼을 요구할 수 있다.”
“형식적인 약혼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
“…….”
둘 다 말없이 애꿎은 찻잔만 빙글빙글 돌리는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었는데.”
페란스가 먼저 입을 뗐다.
“하십시오.”
“나는 섭정을 신뢰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네가 대관식을 치를 때까지 외국에서 지냈으면 한다. 필요한 비용은 왕실에서 제공할 것이고 네가 안전히 지낼 수 있도록,”
“외국이라고 하셨습니까?”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말을 잘랐다.
“……그랬는데.”
“대관식까지라면…… 삼 년이나 말입니까?”
“원한다면 남작 부부도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로젠게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건 확실히 마르스티엘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로젠게인이 몇 번 입 속에서 말을 고른 뒤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 약혼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아니, 약혼은 필요하다.”
“약혼 직후 삼 년이나 떨어져 지내면 누구도 그 약혼이 진짜라고 믿지 않을 겁니다.”
“네 나이가 변명이 되어 줄 것이다. 유학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거야.”
“……. 제가 어려서군요.”
로젠게인이 한참 뒤에야 찌푸려진 표정을 폈다.
그래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자신이 계속 싫은 짓을 강요하는 것 같아 페란스도 내내 미안해졌다.
“너무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제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역시 싫구나.
“안타깝게도 다른 방도가 있는 건 아니야. 위스타드 내에 있는 한 언제라도 위험해질 수 있어.”
아만다리스는 더욱 집요해질 것이다. 가장 위험한 건 각인이 가짜라는 걸 들키는 것이었다. 위스타드 내에는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저를 꼭 떼어 놓으시겠다는 말이로군요.”
“네 안전을 위해서야. 그것만큼은 믿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
“말하도록.”
로젠게인이 마르스티엘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각인 상대라 알려진 제가 전하의 곁에 없다면, 발정기는 어떻게 보낼 생각이십니까?”
“……뭐?”
페란스가 당황으로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