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페란스가 여유 있게 웃었다.
아만다리스는 자신이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그걸 못 참는 모양이었다.
개새끼야. 나는 십삼 년이나 그랬어. 어디 한번 당해 보라고.
“시간이 지나면 확실해지겠지. 그리고 떨어져 있도록. 공에 대한 내 염려는 그대로야. 가까이 오지 마.”
“빌어먹을,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진 거야. 솔직해지라는 말 안 들립니까? 이 자리에서 약혼이니 하는 개같은 소리는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착해지십시오. 그럼 용서하겠습니다.”
“공! 이 무슨……? ……,”
아만다리스가 내뱉는 무례에 콜더스트 남작이 경악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귀족 앞이라면 아만다리스도 체면을 차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벌써 콜더스트 남작을 처형장에 매달린 존재로 취급했다.
정작 페란스는 태연했다.
“공이 내게 이렇게 구는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보는 눈들은 좀 가릴 줄 알았는데……. 이젠 그만한 분별력도 잃은 건가? 섭정이란 중책을 계속 맡길 수 있는지 의문이로군.”
“그만 나불대고 내가 말한 대로 하시지요, 전하. 혼인은 없다고 말한 뒤 콜더스트를 내보내는 겁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 혼사에 매달리는 쪽은 오히려 나야. 대회당에서 말하지 않았나. 책임은 내게 있으니 책임을 지는 것도 나라고. 나는 지금 왕족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책임은 무슨 책임! 설마 내 앞에서까지 열세 살짜리한테 각인했다고 우길 참입니까! 설마 끝까지?”
“우긴다니. 사실을 고해하는 나의 명예를 왜곡하지 말도록. 아만다리스 공.”
“하……! 어처구니가! ……좋아, 그럼 여기서 보여 주지. 네가 다른 인간에게 각인하지 않았다는 걸.”
아만다리스를 어떻게 말려야 좋을지 몰라 눈치만 살피던 콜더스트 남작이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그게 무슨……? 공,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똑똑히 보고 있어. 네가 아들을 팔려고 하는 게 어떤 인간인지.”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쏟아 냈다.
“……읍!”
페란스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베타인 콜더스트 남작은 페로몬 향을 맡을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아만다리스의 팔을 붙들었다.
“공! 당장 멈추십시오! 전하! 어서 밖으로 나가십시오! 아만다리스 공은 제가 말리겠습니다!”
“페로몬을 베타가 무슨 재주로 말리겠다는 건지.”
입술을 비틀어 냉소를 쏟아 낸 아만다리스가 계속 더 많은 페로몬을 내뱉었다.
페란스가 숨을 꾹 참고 시간을 셌다.
십 분.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스물아홉 살 때와 비교하면 각인의 영향력은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지금은 발현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 그럴 테고, 그 이후라면 얘기가 또 달라질 수 있었다.
어쨌거나 너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부친이잖아. 다리를 꼬면서 몸을 떠는 꼴을 보인다 생각하면 진짜 메스꺼워지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콜더스트 남작 하나였다.
“전하! 어서 나가십……! ……앗, 전하!”
슬슬 페로몬에 몸이 반응할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 시간이 다 됐다.
“……우웩!”
페란스가 붉은 토사물을 뱉어 냈다.
마침 아만다리스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색이 진한 토사물이 얼굴과 의복에 골고루 튀었다.
“욱! 우욱! ……아, 각인 반응……인 것 같…… 제발 멈…… 멈춰, 페로…… 우욱!”
“…….”
아만다리스는 굳은 채 눈을 부릅뜨고 페란스를 쳐다보았다.
그 머리로는 페란스가 왜 제 페로몬에 각인 반응을 보이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각인 반응이 아니라 구토제였다.
과일즙에 뒤섞여 맛이 한층 더 끔찍해지긴 했지만 먹어 둘 가치가 있었다.
“전하! 어찌 이런……! 공! 뭐 하십니까! 어서 궁정의를 부르십시오! 어서!”
콜더스트 남작이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페란스의 턱 아래를 받쳐 주었다.
페란스가 남작의 소맷자락을 꾹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각인이 진짜인 모양……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는데 면목이 없……,”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제게 용서를 구하실 일은 없습니다.”
“하아…… 괴로워.”
“전하, 조금만 참으십시오. ……공! 아만다리스 공! 밖에 있는 자들은 들으라! 전하께서 궁정의를 필요로 하신다! 속히 데려와!”
콜더스트 남작이 힘껏 소리를 지르자 사실 밖을 지키던 근위대가 움직였다.
아만다리스는 끝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발등에 못이라도 박힌 것 같은 꼴을 보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페란스 왕자의 각인 사실이 공인되었다.
혼담이 급물살을 탔다.
* * *
“후우.”
페란스가 심호흡을 했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손이 약간씩 흔들렸다.
“전하. 포도주라도 한 잔 올릴까요?”
키슬크가 옆에서 안쓰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됐어. 애를 만나는데 술 냄새를 풍길 수는 없잖아.”
키슬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애라니요, 전하. 열셋이옵니다.”
“그럼 애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왕께서 정혼을 하신 나이가 열셋입니다, 전하. 열넷이면 보통은 다 자랐다 치지 않습니까. 키도 거의 다 자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열넷이면 애기지.”
페란스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아니, 그리 따지면 전하도 아직 애인……,”
“그만. 더는 말하지 마.”
스물아홉이 도로 열여섯이 되기란 어려웠다.
“후우.”
페란스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래, 고작 애를 만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아, 전하! 저기 오고 있습니다!”
키슬크가 손가락질로 저 멀리 성의 정문을 가리켰다.
거대한 정원을 둥글게 돌아오도록 만든 길로 마차 한 대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보통 궁으로 들어오는 마차는 과시적으로 화려한 귀족가의 마차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 보이는 건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생긴 것이었다.
새 마르스티엘의 취향일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안색이 달라지셨습니다.”
키슬크가 자꾸만 힐금힐금 제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나 긴장한 표시가 나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내려가겠다.”
페란스가 계단을 밟았다.
키슬크가 허둥지둥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무리 혼담이 오가는 입장이라 해도 마차가 도착하는 곳까지 페란스가 마중을 나오는 것은 파격적인 환대였다.
다각다각…… 탁.
마침내 마차가 멎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왕실 근위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짙은 검은 머리칼을 지닌 소년이 내렸다.
“아…….”
페란스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소리를 흘렸다.
로젠게인 알란드가 곧장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믿을 수가 없는데.
그 잠깐 사이에 로젠게인 알란드는 키가 자라 있었다. 골격도 자랐고 분위기도 성장했다.
이제는 언뜻 스물여섯 살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전하.”
잠깐 넋을 놓고 있는 사이에 로젠게인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제 손을 잡았다. 흐트러짐 없이 손등에 입술을 대는 모습이 처음 알현실에서 그를 마주했던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하, 미치겠네……. 심장 떨려.
“그새 키가 자란 것 같은데.”
반갑다는 말 대신 쓸데없는 키 얘기가 먼저 나갔다.
“그런 듯합니다, 전하.”
로젠게인이 침착한 얼굴로 일어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눈높이가 비슷해진 것 같았다. 제 눈앞에서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당황을 불러왔다.
“아니,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야. 거짓말 같아.”
키슬크가 옆에서 점잖게 끼어들었다.
“전하. 원래 저 나이 때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법입니다. 하루에 손가락 두 마디씩 자라는 경우도 있다 했습니다.”
“아, 그건 좀…….”
가뜩이나 열세 살짜리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내 기분이 묘했는데, 거기에 키까지 훌쩍 자라 버리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닮기는 또 왜 이렇게 닮아서…….
아니, 원래 너였으니 똑같이 생긴 게 당연하지만.
이러다 내일이면 그가 아는 마르스티엘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제가 자라는 게 싫으십니까?”
게다가 말투도 변해 있었다.
호이헨 홀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앳되고 아이 같았던 목소리가 점잖아진 말투 덕에 다르게 들렸다.
아, 제발……. 이건 너무 빠르다고. 너는 이제 고작 열세 살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는 뜻이었다. 싫지 않아. 그럼 들어가지.”
“네, 전하.”
페란스가 먼저 몸을 돌렸다. 하지만 두어 걸음 떼고 나서도 키슬크와 로젠게인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 뭐 하는데?”
“전하.”
키슬크가 로젠게인의 등 뒤에서 턱짓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로젠게인이 에스코트를 할 때처럼 팔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그…….”
하, 미치겠네.
페란스가 속으로 중얼대며 다시 돌아가 로젠게인이 내민 팔에 제 팔을 끼웠다.
“에스코트는 내가 해야 하는 일 같은데.”
본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페란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만에요. 전하께서는 아직도 발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각인까지 하셨으니 몸이 더욱 미령하실 겁니다.”
……얘가 진짜 걔가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