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73)화 (72/122)

73.

“뭐라고?”

아만다리스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다른 귀족들도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대기 바빴다.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왕위 계승자가 누군가에게 각인을 했다면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만다리스와는 경우가 달랐다. 아만다리스 공작가는 위스타드의 모든 가문들 중에서 왕실과 가장 가까웠고, 가장 많은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페란스가 각인으로 종속되면 권력의 이동이 생겨났다.

하지만 수도에 딱히 이렇다 할 세력 기반이 없는 콜더스트 남작가라면, 그 상대가 열셋밖에 되지 않은 나이라면 왕실의 권력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각인이 제대로 됐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만다리스가 말했듯이, 나는 발현열을 앓는 중이었고 명확히 사고할 수 없는 순간도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로젠게인 알란드의 목을 물었던 것은 기억한다. 아만다리스가 말했듯이, 그의 목에는 잇자국이 있다. 그건 저항의 흔적이 아니라 각인이다.”

“말도 안 돼.”

아만다리스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페란스가 여유를 가장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말이 되지 않나, 공? 로젠게인 알란드의 목에서 잇자국을 발견한 것은 공인데.”

“그게…… 그게 각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하!”

“내가 저항한 흔적이라는 증거 역시 없지 않나. 공이 말했듯이, 발현 시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되니까. 하지만 공의 주장대로 로젠게인 알란드가 나를 추행하려 들었고, 그 와중에 내가 저항한 게 사실이라면 잇자국보다는 다른 상처가 남는 게 더 말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그게 각인이라는 겁니까? 열세 살짜리한테 각인을 했다고? 그게 말이나 됩니까?”

너한테는 말이 안 되겠지. 너는 내가 네게 각인했다는 사실을 아니까. 오직 너 혼자서.

아만다리스가 스스로 그 사실을 떠벌릴 리 없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실수였을 테지. 하지만 그 바탕은 콜더스트 남작의 아들을 향한 순수한 이끌림이었다고 믿는다. 내가 발현을 겪는 게 아니었다면 좀 더 보기 좋은 모습으로 천천히 관계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남작에게 사과를 해야겠군. 발현을 핑계 대고 싶지 않지만 발현 말고 내가 그대에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없다. 내 몸이 미숙했으며, 내 감정이 성급해서 벌어진 사고였다. 공이 부디 부친의 넓은 아량으로 그대의 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의 실수를 용서하길 바란다.”

여기서 콜더스트 남작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페란스의 사과는 그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 줄 유일한 밧줄이었다. 페란스는 제 체면을 생각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각인과 실수를 언급한 것은 그만한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작을 살려 주겠다는 말이었다.

“저는……,”

남작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전하께서, 제 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아들이 전하를 발견하고도 알리지 않은 실수를 범했듯이, 전하께서도 나이다운 성급함을 보이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선량한 용기로 고하시고 용서를 찾으시는 모습에서 카벨리카의 고결함을 보았습니다. 저는 전하께 용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전하께서는 신께 용서를 받으셨나이다.”

“고맙군. 용서의 대가로 남작가에 면죄부라는 선물을 내리고 싶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쾅!

아만다리스가 증언대의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런 일을 벌이고도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간다니! 그 어떤 신들도 용납하지 않으실 일입니다!”

“그래? 그럼 공은 무얼 어떻게 하고 싶나?”

“이미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까? 콜더스트의 성을 가진 이들은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고……,”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의 말을 가로챘다.

“그 아들은 개에게 물려야 한다고? 이상한 말이로군. 각인을 시도한 건 나인데 어째서 남작의 아들이 개에 물려야 하나?”

“각인이라니, 그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말이 되지 않는가. 증거가 남아 있는데.”

“그 증거란 게,”

“잇자국 이상으로 확실한 각인의 증거가 있나?”

“…….”

각인이 마무리되면 잇자국은 사라졌다. 간혹 독특한 색의 반점이 남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때도 많았다. 아만다리스의 목덜미에 난 잇자국은 벌써 사라졌거나 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젠게인 알란드의 몸에 남은 잇자국이 어떻게 될지.

각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를 없애자고 하는 것은 페란스의 목숨을 눈금이 고장 난 저울대에 매달겠다는 얘기였다. 페란스의 이름이 카벨리카인 이상 감히 그런 짓을 하자는 귀족은 없었다.

“설령 발현기라 각인이 완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도를 한 것만으로도 나는 남작의 아들을 향한 깊은 책임감과 애정을, 그리고 동시에 연민을 느낀다. 각인이 됐다면 그는 선택의 여지 없이 내게 남은 인생을 주어야 하겠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를 나의 존재처럼 아끼는 것이다. 개에게 던져 주라 하는 게 아니라.”

아만다리스가 이를 갈았다.

“각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짐작만으로 내 목숨을 가지고 놀고 싶은 생각도 없어. 공은 그러한가?”

“그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지금 하는 짓을 보면 그런 것 같은데. 내 안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콜더스트가를 없애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잖아. 누가 아니라 하겠나?”

말을 마친 페란스가 귀족들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

“…….”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페란스의 각인은 수도의 귀족들 중 이제껏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자도 있는 콜더스트 가문을 카벨리카와 한데 묶어 버렸다.

“전하.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저는 선왕으로부터 카벨리카의 피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간섭하실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만다리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을 따라. 섭정으로서 그대의 역할은 나를 지키는 것이다. 나의 각인 상대를 지키는 것도 마땅히 선왕께서 부여한 공의 역할이다.”

“각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반대로 묻지. 각인이 됐다면? 그럼 공은 어쩔 건가?”

“…….”

결국 아만다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대회당이 전부 조용해졌다.

“후작.”

페란스가 오늘의 의장 웨이모스 후작에게 눈짓을 했다.

“네, 전하. ……두 증인이 모두 침묵하였으므로 이제 카벨리카의 피에 중재를 맡기겠나이다. 말씀을 내리십시오, 전하.”

“이번 일은 나의 예기치 않은 발현과 아직 나이 어린 몸이 미숙하여 벌어진 사고로, 그 책임은 오로지 내게 있다. 콜더스트가와 아만다리스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화해할 것이며, 함께 나의 책임을 지켜볼 것을 명한다.”

“이의가 있는 자는 이 자리에서 입을 여십시오. 아니면 무덤까지 침묵하시오.”

“그, …….”

아만다리스가 몇 번 입술을 헛놀리다 끝내 침묵했다.

그것으로 대회당의 중재회의는 끝이었다.

거기에 페란스가 쐐기를 박았다.

“아, 콜더스트 남작과 섭정은 돌아가지 말고 내 사실로 오도록. 혼사를 얘기해야 하니까.”

순간 회의가 끝이라 생각해 자기들끼리 숙덕이던 귀족들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콜더스트 남작만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아만다리스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페란스는 그가 내뿜는 분노를 귓등으로 흘려 넘기며 포도주 잔을 휘적였다. 아직 나이가 어린 관계로 키슬크는 그의 포도주 잔에 과일즙을 섞어 올렸다. 게다가 오늘은 뭔가 다른 것도 하나 더 넣으라 일러두었다. 괴상한 주문을 들은 키슬크가 한바탕 울 기세였지만 그래도 말은 들어주었다.

키슬크 역시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와 피치 못하게 대면하는 순간을 몹시 걱정하고, 경계했다. 그것만으로도 여유를 가장하는 일이 한결 쉬워졌다.

“저는 절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전하. 성년도 되지 않은 전하의 혼사라니요! 선왕께서도 당연히 허락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약혼으로 하겠다잖아.”

페란스가 포도주를 한 모금 꿀꺽 넘겼다. 그리고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달콤한 과일즙이 아무리 많이 들어갔어도 포도주는 쓰다 하는 게 페란스를 더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것을 올리라 할까요, 전하?”

콜더스트 남작이 친절히 물었다.

유약하지만 선한 인상의 귀족이었다. 눈매를 보면 자신이 아는 마르스티엘과 제법 닮은 편이었는데, 콧대와 하관이 달라서인지 비슷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페란스는 콜더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분명 제 아들도 선량한 마음으로 키웠을 것이다.

“……아니, 괜찮아. 과일즙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래.”

“외람되오나 전하, 표정을 보면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페란스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너무 애 취급은 말아 주지 않겠나? 어쨌거나 혼사를 논하는 자리라.”

“송구합니다, 전하. 하지만 전하께서는 이미 성숙하시니 입맛 정도는 벌써부터 나이 들고자 애쓰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아……. 갑자기 마르……, 로젠게인이 부러워지는데. 그는 좋은 부친을 뒀군.”

“황공합니다, 전하. 그 아비 또한 좋은 아들을 두었습니다.”

포도주 하나로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벌써 가족이라도 된 모양새였다.

그게 아만다리스를 못 견디게 만든 듯했다.

그가 벌컥 다가오더니 페란스의 손에서 확 잔을 빼앗아 들었다.

“공! 이게 무슨 무례란 말입니까!”

콜더스트 남작이 벌떡 일어섰다.

아만다리스가 그를 홱 떠밀어 도로 의자에 주저앉도록 만들었다.

“공!”

눈을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페란스에게서 빼앗은 잔을 홱 팽개쳤다.

쨍그랑!

섬세한 크리스털 잔이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전하. 솔직해지시지요. 각인이라는 말은 거짓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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