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지금 제 힘으로 콜더스트 가문을 무사히 지킨다는 건 핑크빛 자만이었다. 아만다리스는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왕권을 쥐고 있었고 대귀족들은 거의 다 그의 편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갓 발현한 열여섯 살짜리 왕자를 믿고 섭정 아만다리스 공작에게 등을 돌릴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로젠게인 알란드가 자신을 도왔을 뿐이라는 발언은 아무런 힘도 없을 것이다. 왕실 근위대를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숫자가 너무 적었다. 아만다리스가 무력을 동원해 콜더스트 남작가를 없애기로 한다면 왕실 근위대만으로는 말릴 수 없었다.
페란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너라면 블루와렌에서 사람 목숨 하나쯤은 지킬 수 있겠지.”
“어쩐지 후하시더라니. 아주 막중한 일을 맡기시려고 그러셨군요.”
“아만다리스가 손을 댈 수 없게 최대한의 조치를 취해 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만다리스는 내 눈이 보이지 않는 데서 어떤 수작이든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자야.”
“막중하다 못해 어깨가 부서져 나갈 것 같습니다, 전하.”
“엄살떨지 마. 할 만한 일이라는 걸 아니까. 길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성년이 될 때까지만이야. 내가 아만다리스에게서 왕관을 가져올 때까지만.”
“뭐,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지요. 무게가 곧 값이 되는 상품도 있기 마련이니.”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마르스티엘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라면 메넌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도 할 일이었으니 지금도 해낼 것이다.
“이것으로 너는 답을 얻었나?”
“음……. 대충은. 하지만 이제는 콜더스트 남작의 아드님을 만나 뵙고 싶어지는군요.”
“만나. 내 반지를 주겠다. 그에게 전하고 중재가 끝날 때까지 네가 보호하고 있도록.”
“저런. 벌써 심부름인 겁니까?”
“필요한 일이다.”
“아, 불만이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벌여 놓은 일이 있어서 바쁘긴 합니다만 그보다는 전하의 일이 우선이니.”
메넌이 산뜻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되지만 전하,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시키신 일까지 전부 하려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그리고 다음에는 저희 쪽 약제사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라면 전하의 몸에 맞춰 억제제를 지을 수 있습니다.”
“네가 데려오는 자의 입궁을 허락하겠다. 다음에 볼 때까지 왕실 길드장을 공석으로 만들어 두지.”
“감사합니다, 전하.”
메넌이 떠났다.
페란스는 그가 떠나고도 알현실에 남아 마르스티엘, 이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메넌이라고 하면 안 돼. 이제는 그쪽이 마르스티엘이니까.
이름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것은 잠깐이었다.
이제는 로젠게인 알란드라는 원래 이름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 * *
대회당이 북적였다.
선왕의 서거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대귀족들뿐 아니라 수도의 귀족들은 전부 몰려온 듯했다. 저 인원들을 일일이 신분과 얼굴을 확인해 들여보냈을 키슬크의 고생이 느껴졌다.
“페란스 카벨리카 전하 드십니다!”
페란스가 대회당에 도착하자 근위대가 길게 뿔나팔을 불었다. 구식이긴 했지만 카벨리카의 전통을 기리는 의미 있는 의식이었다.
“전하.”
“전하.”
“카벨리카에 영광을.”
페란스를 향해 몸을 돌린 귀족들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건넸다.
페란스는 그대로 걸어 정면의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에는 의자가 두 개였다. 매우 개같은 일이었지만 그중 하나에는 벌써 아만다리스가 앉아 있었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페란스는 혼자서 왕좌에 앉을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의자를 하나 더 늘려 섭정이 곁에 앉도록 되어 있었다.
……탁.
페란스는 단상에 오르기 전 걸음을 멈췄다.
“거기는 공의 자리가 아니다. 내려오도록.”
“외람되오나 전하, 이 자리는 제 것이 맞습니다. 선왕께서 신의 부르심을 받은 뒤로 늘 그래 왔습니다.”
“그거야 공이 심판을 받는 자가 아니었을 때였지. 내려와.”
“전하. 선왕께서 제게 부여하신 섭정의 자격으로, 그 말씀은 따를 수 없습니다.”
“공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과연 제대로 된 중재가 있으리라 믿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나서도록.”
페란스가 고개를 돌려 등 뒤에 늘어선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귀족들은 힐긋 아만다리스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금슬금 손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나서기 전에 생각을 해 보는 걸 권하지. 만일 콜더스트 남작이 아니라 자신이 저 증언대에 올랐을 때도 섭정이 왕좌에 앉는 게 공평하다 여겨지는지.”
“…….”
“그런 자가 있다면 만일 섭정과의 분쟁에서 내 중재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기꺼이 의사를 따라 주겠다.”
슬금슬금 올라가던 손들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그럴 줄 알았다. 페란스는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공과 너무 가까이 앉는 게 불편하고 불쾌하다. 저번처럼 공이 내게 페로몬을 흘릴까 봐 걱정이 되는군.”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아만다리스가 울컥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페란스가 귀족들을 전부 불러 모은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각인은 페란스의 치부였고, 약점이었다. 감춰야 하는 게 맞았다.
각인을 드러내는 순간 페란스는 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섭정에게 종속된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카벨리카와 아만다리스의 주종 관계도 뒤엎어질 게 뻔했다. 왕좌가 바닥부터 흔들릴 일이었다.
아만다리스도 알고, 페란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만다리스는 페란스가 아슬아슬하게 각인이라는 선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착각하셨을 겁니다. 저는 신께 맹세코 전하에게 불경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개새끼가. 말장난은.
아만다리스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을 뿐 페로몬을 풀지 않았다고 한 게 아니었다. 페란스가 그에게 각인을 했으니 제 페로몬은 불경이 될 수 없었다. 속으로 그렇게 계산했을 게 뻔했다.
“이젠 내 잘못으로 몰아가는군. ……뭐, 좋아.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릴 일은 그게 아니니. 하지만 공에게 의혹이 있는 바, 내 곁에는 너무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겠어. 호이헨 홀에서 공이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섬뜩하다. 발현열로 정신이 없는 내게 다짜고짜 페로몬을 풀다니.”
“……. 전하께 왕좌가 아닌 다른 의자에 앉으시라 할 수 없으니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아만다리스가 이를 갈다 일어섰다.
온통 흰 옷을 입고 카벨리카의 붉은 백합 펜던트를 가슴에 건 페란스는 아만다리스가 완전히 내려오길 기다려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화려한 금박 대신 묵직한 철 그대로의 재질을 살린 왕좌는 그래서 더 주변을 유리시켰다. 그 자리에 흰옷과 붉은 보석을 걸치고 앉은 페란스는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는 고귀함 같았다.
“앉았다. 시작하지.”
“예, 전하.”
오늘 하루 의장을 맡긴 웨이모스 후작의 대답으로 중재 회의가 시작되었다.
* * *
아만다리스는 완고했다.
제 역할은 카벨리카의 피를 수호하는 것이며, 이는 선왕이 직접 명하신 것으로 그 어떤 강압이나 거짓으로 거둘 수 없는 의무라 했다.
그 번드르르한 말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콜더스트 남작이 필사적으로 아들의 행동을 변명했지만 어떻게 해서도 그날 남은 파편들을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오두막에 숨어든 페란스를 발견했지만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 페란스가 발현 중이었다는 것, 그리고 발견 당시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고 목에는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것 등은 충분한 의혹을 만들어 냈다.
……아니라고 해 봤자 들을 인간이 없겠군.
그러리라 예상은 했다.
아만다리스는 처음 발언 때부터 계속 페란스는 발현 중이었으며 의식이 온전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귀족들의 절반 이상이 이상형질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이상형질 가족을 지겹도록 보아 온 자들이었다.
발현열이 어떤 것인지 알 만큼 알았다. 페란스가 로젠게인 알란드의 편을 들어 봤자 아만다리스에게 각인한 사실마저 드러내지 않는 한 온전치 않은 몸 상태로 제 피도 돌보지 못한 가여운 오메가 왕자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므로 콜더스트가는 위스타드의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죄를 지은 그의 아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개에게 물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귀족들은 좌절해 휘청하는 콜더스트 남작에게 돌팔매질 같은 시선을 꽂았다.
“전하. 대귀족회의 판결을 인가하시겠습니까?”
웨이모스 후작이 왕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따라 페란스를 향했다.
말 몇 마디로 이 상황을 뒤엎을 재주가 있는 인간은 없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페란스는 드러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내게 달리 할 말이 없음은 이미 아만다리스가 말해 알고 있을 것이다.”
“…….”
소리 없이 제 눈을 따라오는 시선들이 어깨에 매달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다.
“지금도 열은 다 내리지 않았다. 섭정의 말대로 그때 내 의식이 온전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없다. 그래도 기억하는 게 있다. 그 오두막에서 날 발견한 콜더스트 남작의 아들 로젠게인 알란드와의 대화가 퍽 즐거웠다는 것이며,”
“…….”
몇몇 귀족이 고개를 갸웃대거나 콜더스트 남작을 힐긋 돌아보거나 했다.
“내가 그에게 각인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발언에 침묵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