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70)화 (69/122)

70.

안 될 게 뻔한 얘기였지만 마음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됐다. 너까지 잃고 싶진 않아.”

“저, 전…… 전하아!”

키슬크의 눈알이 빨개졌다. 본격적으로 소매에 얼굴을 묻고 한바탕 울 기세라 페란스가 그 전에 먼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여간 그래서 블루와렌산 억제제가 필요해. 세이무어라면 구하는 법을 알지도 모른다. 아니면 방법을 알 만한 자라도.”

“그야…… 맞는 말씀이옵니다, 전하.”

키슬크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데려오겠나이다.”

“음. ……그리고 혹시 모르니 다른 귀들을 조심해라. 누가 아만다리스의 꼬리일지 모른다. 네가 아는 정보들을 전부 동원해. 그래서 사람을 가려.”

“물론이옵니다, 전하.”

키슬크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시종 생활이 몸에 익은 지도 근 십 년. 궁과 권력의 생리라면 알 만큼 알았다.

섭정이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나이 어리고 병약한 왕자는 그 사실을 의연하게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방 각인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섭정을 가장 먼저 죽이고 싶은 건 페란스 왕자였다.

하지만 일방 각인을 한 입장에서 섣불리 상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상대를 죽이면 페로몬 쇼크가 오는 경우도 있었고, 극심한 우울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페란스 왕자는 양친을 잃은 뒤부터 계속 우울에 시달려 왔는데 거기에 다른 우울을 더할 수는 없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전하. 한 가지만 더 묻겠사옵니다. 신이 아둔하여 전하의 뜻을 완전히 알 수가 없나이다. 전하께서는 섭정과의 일을…… 어찌 마무리하고 싶으십니까. 그것이…… 각인은 절대 풀 수 없는 게 아닙니까…….”

키슬크의 말은 그것이었다.

각인은 풀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선은 쌍방 각인을 하는 것이었다. 쌍방 각인을 하게 되면 둘은 그 순간부터 죽어도 떼어 놓을 수 없는 한 쌍이 되었다. 섭정이 혼인하여 슬하에 자식을 여럿 두고 있는 몸이긴 하지만, 이혼을 한다면 그 뒤에 재혼이 가능했다. 잡음이야 많겠지만 카벨리카의 혼인이라면 다른 귀족들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섭정을 죽일 것이다.”

“전하, 그것은…….”

“그 전에 각인을 풀 거야. 방법은 알고 있어. 단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지금은 억제제가 필요해.”

“전하,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옵니까. 신은 전하께서,”

“그만.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는데.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말했듯이 내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세이무어를 데려와. 억제제를 구할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해.”

“……예. 전하.”

할 말이 아주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키슬크는 한숨을 삼킨 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그런 뒤 세이무어가 왕실 집무실로 들어섰다.

알현 허락이 떨어질 줄 몰랐던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였지만, 블루와렌산 억제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침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새 사업을 위해 위스타드에 잠시 들어와 있다고 했다.

세이무어가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데려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 * *

“마르스티엘입니다.”

“…….”

페란스는 할 말을 잃고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데려오라 이르면서도 기분이 굉장히 이상하긴 했다. 같은 이름, 같은 신분이었다. 이번 대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노예 출신이라고 했다. 역대 수호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역으로 가장 수완이 좋다고 했다. 사업의 확장을 위해 직접 위스타드에 올 정도로 공격적이고 의욕적인 자였다.

머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심장은 그를 기다리며 자꾸 두근거렸다.

이름이 같다고 같은 사람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비슷한데 마르스티엘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나타난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메넌이었다.

“왜 네 이름이 마르스티엘인 건데?”

페란스가 이상하게도 힐난처럼 들리는 말을 던지자 메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 이름이 마르스티엘이면 안 되는 겁니까?”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전부 다 마르스티엘인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제가 제 의지로 선택한 이름입니다.”

“하아…….”

페란스가 메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가 달라진 모양이군.

앞으로 그 이름을 선택하는 자는 로젠게인 알란드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되돌아오면서 로젠게인 알란드의 앞날도 바뀐 듯했다.

……아니, 차라리 다행인 건가.

적어도 네가 노예로 팔려 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니까.

메넌이 뜬금없다는 듯 눈을 깜박대다 물었다.

“그럼 인사를 마저 해도 되겠습니까?”

“하도록.”

“카벨리카의 핏줄을 뵙습니다. 영광입니다, 전하.”

메넌 또한 앳된 얼굴이었다.

네가 몇 살이었지……. 막연히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것보단 많았던 모양이야. 그나저나 네 얼굴은 여전히 열받는데.

메넌은 더 이상 머리를 땋고 있지 않았다. 짧게 잘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상태였다. 그 어쭙잖은 머리 모양을 바꾸자 새삼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드러났다.

예법에 맞춘 격식 있는 옷차림을 했다. 자유분방하고 종잡을 수 없어 보이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블루와렌의 수호자라는 이름에도 제법 어울려 보였다.

“반갑군, 빨간……. ……마르스티엘.”

습관적으로 빨간 머리라는 호칭을 입에 담으려던 페란스가 말을 바꾸며 피식 웃었다.

메넌이 여유롭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입궁하기 전 염색을 할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 머리 색이 위스타드의 예의와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말입니다.”

“눈에 띄기는 하지. 기척을 지우고 다닐 생각이라면 염색도 나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이런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그저 남들 눈에 띄는 게 좋은 모양이군.”

메넌이 눈빛을 살짝 바꾸었다.

“왜 전하께서 저를 잘 알고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군요. ……아, 이런 말이 비례라면 용서하십시오. 위스타드의 예법은 아직 다 익히질 못했습니다.”

“네게 예의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정직한 거래는 기대하고 있어. 네가 취급하는 물건 중에서 특별한 억제제가 있을 텐데…… 맞나?”

“외람되지만 원래 왕족은 말투가 그렇습니까? 그리고 억제제라면 종류별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전하.”

“내 말투가 어떤데?”

“그게 좀……. 애늙은이 같…… 아니, 이 말은 부디 잊어 주십시오. 나이가 어리심을 전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때도 메넌은 저런 식이었다. 마르스티엘이나 알레프나 둘 다 말수가 적어 상대하기 어려운 반면 메넌은 조금 나았다. 게다가 잘만 하면 말실수도 제법 해 주는 편이었으니까.

이런 건 반가움인가.

나는 지금, 네 열받는 얼굴도 보기 좋아.

자칫하면 친한 친구처럼 소맷자락을 붙잡고 편한 말을 늘어놓게 될 것 같아 걱정이 일 정도였다.

“특별한 억제제는 특별한 효과를 보증하나?”

“장사꾼으로서 제 대답은 하나입니다. 네, 블루와렌산 억제제는 효과를 보증합니다. 하지만 정직함을 요구하셨으니……,”

“아니라는 말인가?”

“기존의 억제제 가운데서는 그만한 것도 없다는 게 가장 정직한 답인 듯합니다, 전하.”

“망했군.”

페란스가 자연스럽게 혀를 차자 메넌이 눈을 깜박댔다.

“그런 말씀을, 아주 편안히 하십니다?”

아마도 그는 천사 같은 외양을 한 소년이 값비싼 왕족의 옷을 입고 앉아 자신처럼 격의 없는 말을 쓰는 게 몹시 수상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투 얘기는 집어치워. 네게 예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그럴 거라는 뜻이니까.”

페란스가 단 아래, 저 멀리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메넌에게 손짓을 했다.

“좀 더 가까이 와.”

“엇, 그래도 됩니까, 전하?”

“예의는 잊으라고, 젠장.”

“…….”

다행히도 메넌은 더 이상 허둥대지 않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거기 서. 맡아지나?”

페란스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발현 때문에 제 몸에서 계속 약하게 번지고 있는 페로몬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였다. 그도 알파니 제 페로몬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대로 메넌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네, 전하.”

“오해는 하지 말고. 네게 관심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 지금 발현 중이다.”

“아, 그래서 까칠하신 겁니까?”

“너는 입단속을 하는 법을 더 배워야겠군.”

페란스가 눈매를 찡그리자 메넌이 싱긋 웃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래서 더 매혹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전하.”

그때도 말을 돌리는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메넌은 자신의 각인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들었다.

하긴, 눈치는 빠른 작자였지.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불경한 발언이로군. 내가 열여섯이라는 건 아나?”

“아, 이런. 알고 있습니다. 깜박했을 뿐.”

“그럼 입조심해. 내가 네게 이런 걸 말하는 이유는 내게 어떤 억제제가 필요한지 알아들으라는 뜻이다.”

“…….”

메넌이 잠깐 뭔가를 생각하듯 입술을 물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효과가 있을 법한 억제제가 있다고 한다면, 언제까지 복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십삼 년.”

“네?”

“아니, 그건 너무 길어. ……어쩌면 육 년?”

육 년 뒤는 로젠게인 알란드가 성년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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