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9)화 (68/122)

69.

페란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째?”

“그리하여 섭정께서 남작의 처형을 결정하였나이다. 콜더스트 남작이 반발한 탓에 섭정께서 직접 사병까지 거느리고,”

“미친!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페란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키슬크가 화들짝 놀라 좀 진정하시라는 손짓 발짓을 해 댔다.

“아이고, 전하. 아직 미령하신데 어찌 이리,”

“그래서 아만다리스는 지금 어디서 뭘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거야!”

개새끼가 개새끼 짓을 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틈을 타 그날 있었던 일을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수작을 부렸다.

그 당시 오두막을 먼저 찾은 로젠게인의 셔츠가 단정하지 못했고, 목덜미에 잇자국이 있는 점을 들어 그가 페란스 왕자의 발현을 틈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몰아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당시 상황을 보고 들었던 기사들은 콜더스트 남작의 사병이라 증인이 되지 못했다. 콜더스트가는 꼼짝없이 추저분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추방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사실 아만다리스의 목적은 추방 따위가 아닌 죽음일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누명을 씌우려는 이유는 뻔했다. 남작의 아들이 각인에 대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만다리스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한 말에 따르면 자신을 업고 호이헨 홀로 돌아온 남작의 아들은 침실로 옮기라는 명을 거부하고 아만다리스의 접근을 막으려 애를 썼다고 했다.

아만다리스는 로젠게인의 입을 막기 위해 반은 핏줄이나 다름없는 남작가를 깡그리 죽여 없앨 심산이었다.

“지금 전령이 될 만한 인간이 누가 있지? 제일 발 빠른 인간으로.”

“전하……?”

“아니, 아니야. 차라리 근위대장을 보내. 그게 낫겠어. 근위대 열…… 아니, 서른을 동행시켜. 아만다리스한테 보내서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리고 개짓거리는 그만두라고 해. ……개새끼가 그냥 뭉개 버릴 수도 있으니 뭐라도 한 줄 갈겨써야겠군. 당장 펜과 종이를 가져와. 인장도 미리 준비해 놓고.”

“저, 전하?”

키슬크가 스카프를 쥔 채로 입을 짝 벌렸다.

“전하, 지금 좀…….”

“내가 지금 뭐? 그리고 빨리 움직여.”

“아니, 그게……. 말투가 거치신데 그게…… 굉장히, 전하 같으십니다.”

“흰소리 그만하고 시킨 일부터 해.”

“아, 알겠나이다.”

키슬크가 허둥대며 스카프를 손에 쥔 채 후다닥 드레스룸을 떠났다.

“……이러다 죽을 때가 된 게 아니냐는 말이 나돌겠는데.”

페란스가 화장대를 양손으로 짚고 체중을 실으며 거울을 힐긋 쳐다보았다.

제대로 마주한 열여섯 살의 모습은 앳되고 앳되었다.

로젠게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아이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안색은 딱할 정도로 창백했는데 입술만 붉었다.

이 얼굴로 스물아홉 살처럼 굴었으니 키슬크가 놀랄 만도 했다.

“너무 말랐네. 볼품없게.”

페란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귀 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치렁치렁 흔들렸다.

머리라도 잘라야겠다. 지금은 숨을 안 쉬고 있으면 잘 만들어 놓은 밀랍인형 취급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몰골이니 아만다리스가 저를 더 우습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뭐라고 했건 간에 콜더스트가를 입막음 시키려고 들었겠지.”

각인을 피했다고 해서 전부 다 해결이 된 게 아니었다.

아만다리스는 끝까지 콜더스트가를 노릴 것이다. 열세 살의 마르스티엘을 지키는 것은 제 몫이었다.

“두고 봐. 내가 어떻게 하는지.”

내가 개새끼를 어떻게 죽이는지.

페란스가 거울을 향해 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생뿐 아니라 마르스티엘의 인생도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과거로 돌아온 것은 믿지 못할 행운이었다.

* * *

페란스가 다급하게 갈겨쓴 편지를 품에 안고 달려간 근위대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두 가문 간의 전쟁을 멈출 수 있었다.

카벨리카의 깃발을 왕궁에서부터 휘날리며 달려가는 근위대는 아주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한쪽 성문을 걸어 잠근 채, 다른 한쪽은 성문을 부수려고 간을 보던 와중에 왕실 근위대가 끼어들자 상황은 그대로 멎어 버렸다.

아만다리스가 끝까지 입장을 바꾸지 않았기에 근위대의 임무는 아만다리스와 콜더스트 남작을 페란스 앞으로 데려가는 일이 되었다.

수도 남쪽에서 벌어진 일은 그날 오후 몹시 발 빠르게 소문으로 번져 나갔다.

열여섯 살의 병약한 오메가 왕자가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적은 이제껏 없었다. 수도는 유례없을 정도로 시끌벅적했고, 일부 귀족들은 알현을 위해 입궁하기도 했다.

“……네, 전하?”

키슬크는 좀 전부터 계속 계속, 끝도 없이 놀라는 중이었다.

아직 발현열이 떨어지지 않은 왕자는 더는 침대에 붙어 있을 마음이 없다는 듯 아예 장소를 선왕의 집무실로 옮겼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돌려보내라고 했다. 세이무어만 들여보내. 알현실이 아니라 여기로.”

“아니, 그것이…… 몹시 외람되오나 이곳은 선왕의 집무실입니다, 전하. 아직 어리신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실 필요가 없사옵고…… 아니아니, 그리고 왜 하필 세이무어입니까?”

키슬크는 귀족 출신에게 으레 붙여야 하는 경칭도 생략해 버렸다. 세이무어는 알라우딘 가문의 사생아로, 모친이 죽고 오갈 데가 없는 그를 알라우딘 백작이 체면상 양자로 거둬들인 자였다. 그러나 운이 좋게 백작의 직계들이 요트 사고로 한꺼번에 죽은 뒤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출신이 모호한 터라 진심으로 상대해 주는 사람은 별반 없었지만 세이무어는 위스타드의 사교계 행사에 열심이었다. 백작가의 상속자가 되기 전 외국을 오래 떠돌았던 경험이 그에게 그래도 자리 하나는 만들어 주었다.

페란스는 그가 말을 옮기길 좋아하며, 그리고 블루와렌에서 제법 오래 머물러 연줄이 있다는 점을 기억했다.

잘 쓰면 꽤 유용해질 인물이었다.

“그는 전하께서 상대하실 만한 인물이 아니옵니다. 부디 생각을 달리하소서, 전하. 세이무어…… 또한 전하께서 알현 신청을 들어주시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예전 같았으면 키슬크가 뭔가를 반대하고 나섰을 때 그게 아만다리스의 의도가 아닐지 의심했을 것이다. 지금은 전부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볼일이 있어서 그래. 데려와.”

키슬크가 끄응,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전하. 대체 전하께서 그런 자에게 볼일이 있으실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블루와렌산 억제제가 필요할 거야. 이제.”

“네?”

키슬크가 또다시 놀랐다.

“억제제라면 궁정의가 만들면 되는 것을…….”

“그런 것 가지곤 안 돼.”

“아니, 왜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발현을 다 마치지도 않았으니 벌써 억제제를 염려할 필요도 없사옵니다. 억제제는 전하의 주기에 맞춰 신이 잘 준비해 놓겠습니다.”

“각인했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던져지는 담담한 말에 키슬크는 조금 늦게 놀랐다. 어쩌면 너무 놀라다 못해 심장이 잠깐 늦게 반응했을지도 몰랐다.

“네, 전하. 각인을 하셨으면……. ……네, 전하? 각인…… 헉! 각인이라고요! 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각인이라니요! 전하께서는 아직,”

“쉿. 목소리 낮춰. 여럿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얘기다.”

“전하께서는 아직! 아직 발현이……! 세상에! 신이시여! 어쩌다 이런! ……전하, 뭘 잘못 아신 게 아니옵니까? 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키슬크가 아직 한참은 더 놀랄 기세라 페란스가 친절하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라고 했다. 각인한 게 맞아. 제대로 알고 한 게 아니긴 하지만.”

“으에 어으 미이이가아 가히 저은아으!”

“아만다리스.”

“에……. ……에?”

도무지 안 되겠던지 키슬크가 억지로 페란스의 손에서 벗어났다.

안색이 새파랬다. 키슬크가 눈을 부릅뜬 채 양손을 덜덜 떨었다.

“저, 전하……. 지금 신이 들은 얘기가 맞…… 정말 맞사옵니까? 전하를 각인시킨 인간이 아만다리스 공이라 하셨습니까?”

“맞아. 내가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다. 내가 늦은 나이에 발현하리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잖나. 나 역시 내가 베타라 믿었다. 각인에 너무 무지했어.”

“저, 전하……. 그렇다면…… 그렇다면!”

“너만 아는 얘기다. 너 외에는 누구한테도 알릴 생각 없어. 당분간 비밀로 해 둬. 내가 방법을 찾기 전까지.”

“저, 전…… 전…….”

자꾸 말을 더듬는 게 답답했던지 키슬크가 앙, 혀를 한 번 물었다.

“외람되오나 신이 묻지 않을 수가 없겠나이다. 그렇다면 섭정과 전하 두 분의 관계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제가 전하의 옷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전하의 몸에서 그 어떤 각인의 흔적도 보지 못했나이다!”

그걸 묻는다는 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뜻이었다. 키슬크는 제 편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나만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각인을 어찌 한 사람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짓이옵니다! 게다가 감히 전하의 몸에!”

“그래야 아만다리스가 나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

새파랬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키슬크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소리쳤다.

“전하! 제가 가서 섭정을 죽이고 오겠나이다! 부디 허락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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