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8)화 (67/122)

68.

페란스가 기억하는 아만다리스의 마지막 모습은 씁쓸하기도 했고, 한심하기도 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며 아무나 닥치는 대로 원망하다가 덜덜 떨리는 다리로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그 와중에도 같이 죽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할 거면 등을 떠밀어 주겠다고 하자 저주를 퍼부으며 떨어졌다. 페란스는 지금까지도 그가 몸을 떨다 발을 헛디뎌서 엉겁결에 떨어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여간 그때보다는 젊은 아만다리스는 쓸데없이 팔팔했다. 검술이라고는 몇 달 배우는 척했던 게 전부인 주제에 허리에 얇은 장식용 검이 아닌, 기사들이 차는 실전용 검을 차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게 하필 허리에 찬 검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코웃음이 나왔다.

“전하. 어째서 신을 이리 괴롭히십니까. 발현 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저 개새끼가. 혓바닥 놀리는 꼴하고는.

“몸을 아끼느라 숨어 있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공이 잘 알지 않나.”

페란스가 입을 열자 아만다리스가 뻣뻣하게 굳었다.

“전…… 하?”

말투가 달라진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페란스는 자신이 열여섯 살 때 어떤 식으로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을뿐더러 흉내를 낼 생각도 없었다.

“모르겠다면 그건 둘 중의 하나지. 공이 너무 뻔뻔하거나, 아니면 너무 멍청하거나.”

“전하.”

아만다리스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어째서 신께 그리 가시 돋은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이 심해 전하께서 잠시 이지를 잃으셨다 여기겠습니다.”

“다가오지 마. 발현기다. 너도 알파라는 걸 잊었나?”

“…….”

아만다리스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발을 멈췄다. 얼굴도 모르는 기사들의 눈치가 보이기는 하는 모양이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기 계속 계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 네가 알아 버렸으니 그렇겠네. 수도로 돌아가겠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의사라면 이런 시골 영지보다는 수도에 쓸 만한 자들이 더 많겠지. 지금,”

갑자기 페란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그러나 경고는 될 만큼.

아만다리스의 감정을 반영한 페로몬은 각인한 오메가를 심정적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열여섯 살의 자신이라면 그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먼저 기분을 맞추려고 들었을 것이다.

페란스가 보라색이 된 입술을 떨면서 웃었다.

“공. 어디서 페로몬을 풀고 있나.”

하지만 스물아홉 살의 그는 아니었다. 이제는 아만다리스가 그저 개새끼라는 것도, 그가 가진 무기는 각인 하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각인으로 엮인 뒤로는 섹스가 필연적이었다. 열여섯의 페란스는 그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는 게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들었다. 그건 카벨리카라는 제 이름과 자긍심을 더럽히는 오물이었고, 그렇기에 들키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전……,”

아만다리스가 당황해 주춤거렸다. 콜더스트가의 기사들이 아만다리스와 페란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발현기라는 것을 알면서 페로몬을 푼다면 그 의도가 심히 불경하군. 너희들, 아만다리스를 밖으로 끌어내. 카벨리카를 지키기 위한 일이니 위계를 따질 것 없다.”

“전하, 제게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아만다리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너야말로 내가 발현열을 겪는 중에 페로몬을 푸는 개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뭐 하고 있나. 끌어내라니까.”

로젠게인이 페란스의 앞을 막아섰다.

작은 머리통이 제 눈앞에서 어른대는 게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전하의 명을 따르라. 아버님께서 추후라도 너희들을 탓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남작가의 아들이 나서니 기사들도 더는 주저할 수가 없었다.

“그럼…… 명대로.”

기사 둘이 아만다리스의 팔을 양쪽에서 붙들었다.

“놔라! 감히 어디에 손을 올리고 있나!”

아만다리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잠깐 움찔한 기사들은 페란스를 한번 돌아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아만다리스를 밖으로 이끌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로젠게인이 페란스를 돌아보았다. 동그란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괜찮…….”

……지 않아.

지금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페란스가 남은 힘으로 로젠게인을 떠밀면서 중얼거렸다.

“내 곁에…… 더는…… 마. 그리고 나를…… 성으로……,”

그리고 페란스가 의식을 잃었다.

열여섯 살의 몸으로.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스물아홉 살로 돌아가 있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페란스는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손을 확인했다.

여전히 희고 여위어 있었다. 혼란이 한차례 지나가자 차츰 안정감이 찾아왔다.

……그래. 너는 내게 각인하지 않았어.

어쩌면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온 게 아닐까. 이미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난 그때는 수습할 도리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면 하나하나 되살릴 수 있으니까.

그래. 여기서라면.

너는 불행하지 않아.

“…….”

페란스가 짧게 숨을 들이쉬고 야윈 팔목을 내렸다.

정신을 얼마나 잃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장을 보니 제 침실이 맞았다. 수도로 돌아오긴 한 모양이었다.

페란스가 손으로 침대 기둥을 더듬어 시종을 부를 때 쓰는 끈을 찾았다.

잠시 숨을 몰아쉬고 있자 키슬크가 궁인들을 대동한 채 허둥지둥 들어섰다.

“전하……! 깨어나셨습니까!”

“아, 그래……. ……안녕.”

그를 보자 어쩐지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키슬크는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젊고, 머리숱도 더 많았다. 이마가 반들반들해서 안타깝게도 곧 대머리가 될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더 생기 있게 보였다.

넓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보였다. 그게 다 걱정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왜 이런 걸 보지 못했을까.

페란스가 인사를 건네자 키슬크는 완전히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네, 저는 안녕합니다. 전하께서도 안녕하시온지…….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만 허둥대. 몸은 아직 안 괜찮고, 얘기는 들었겠지만 발현 중이야. 열도 계속 있는 듯하다. 의사가 필요해.”

“아, 예! 참으로 다행……이 아니라 심히 애석한 일이옵니다. 의사는 곧 불러오겠습니다.”

키슬크가 등 뒤의 궁인 하나에게 얼른 뛰어갔다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궁인이 재빨리 뒷걸음으로 침실을 떠났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사흘이 지났사옵니다, 전하! 사흘 동안 내내 주무셔서 저희 모두 애간장이 다 녹았사옵니다!”

키슬크가 울 것처럼 와르륵 말을 쏟아 냈다.

스물아홉 살 때는 키슬크가 사용하는 저 과도한 궁정 용어가 거슬렸다. 본심을 감추기 위해 앵무새처럼 뱉어 내는 거짓이라 여겼다.

이제 와서 보니 키슬크의 성격이라면 전부 다 진심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사흘. 그래도 꽤 빠른데.”

“네, 네? 전하? 뭐가 빠른지요?”

“아무것도 아냐. 사흘간 아만다리스가 여기 온 적이 있나?”

“아니옵니다, 전하. 섭정께서는 지금……,”

말이 막 이어지려는 찰나 궁정의들이 도착했다.

키슬크는 말을 하다 만 게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이 더 서둘러 궁정의들을 맞았다.

궁정의들은 대부분 페란스가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발현열은 가라앉는 중이며 열이 떨어지면 발현도 끝날 것이라고 했다. 진짜 열여섯 살일 때는 열이 몇 달씩 갔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길어야 이 주 정도라고 했다.

역시나 아만다리스가 개새끼였다. 침실에 가둬 두고 계속 제 페로몬을 받아들이게 하는 바람에 각인열이 더 오래 간 것이었다.

페란스는 궁정의들이 권하는 대로 해열제와 진정제를 마신 뒤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나 목욕을 마칠 때까지 정신이 내내 몽롱했다.

그래도 머릿속에서는 내내 열세 살짜리 마르스티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 *

“……뭐라도 내리는 게 좋겠어.”

“네, 전하?”

목욕을 마치고 났더니 그럭저럭 사람 꼴이 되었다.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던 열기와 식은땀이 가시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콜더스트 남작의 아들. 호이헨 홀에서 날 도와줬는데 그 일로 상을 내리고 싶다. 그렇다고 부담스러울 만큼 과하지는 않은 걸로. 뭐가 좋을까?”

페란스는 옷시중을 키슬크로 바꾸었다.

현재 시종장은 다른 이였고, 키슬크는 왕자궁의 시종 중 하나였다. 시종장은 제 일을 키슬크에게 줬다는 말에 난색을 드러냈지만 페란스는 단호했다.

이제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제 눈에 닿는 사람들은 전부 신뢰할 수 있는 자들로 바꾸어야 했다.

하여간 그래서 키슬크는 여느 때보다 달뜬 얼굴로 페란스의 옷을 입혀 주는 중이었다.

셔츠를 입힐 때는 왜 이리 야위셨냐며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는데, 새삼 저런 수선스러운 성격을 왜 이제껏 알아보지 못했나 싶었다.

“저, 전하를 도왔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오해는 마. 그냥 그랬다는 거니까. 남작의 아들이 열세 살이라는 건 알고 있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페란스는 나이를 의식해 한마디 덧붙였다.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는 분명 몇 년 안에 번듯하게 성장해 그림처럼 아름다운 알파가 될 것이다. 제 눈으로 봤으니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열세 살이잖아.

아직 자신이 열여섯이 되었다는 자각이 부족한 페란스는 자꾸만 나이 차이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몹시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랬다.

“참 이상한 일이옵니다, 전하. 섭정 아만다리스 공의 말로는 콜더스트 남작의 아들이 전하께서 의식을 잃은 틈에 몹쓸……, 크흠, 짓을 하였다고……,”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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