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7)화 (66/122)

67.

하필이면.

페란스가 이를 갈았다.

기왕이면 며칠 전으로 돌아올 것이지.

십삼 년 전 그때라면 이건 발현열과 각인열이 동시에 겹쳐서 벌어지는 증상이었다.

몇 달을 이렇게 앓았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견딜 만하다는 생각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꼴로 몇 달을 더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치가 떨렸다.

손으로 아래를 달래다가,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 문을 열까 망설인 게 수십 번이었다.

지금을 견디지 못하고 아만다리스의 성기를 빌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각인은 이루어졌으니 페로몬은 종속됐겠지만 몸을 섞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제는 단 한 순간도 아만다리스를 참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 빌어먹을.”

문을 열려던 페란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발……. ……누가 좀,”

누가 좀 와 줘. 개새끼는 말고.

페란스가 흠뻑 젖은 옷을 잡아 뜯으며 신음했다.

“전하…….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로젠게인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 순간 아만다리스보다 더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페란스가 비명에 신음을 섞어 외쳤다.

“안 돼! 저리 가!”

“전하…….”

“절대 안 돼!”

남은 힘을 쥐어짜 악을 썼다. 그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괜찮아요, 전하.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조금 더 컸으면 좋겠는데…….

페란스가 흐느끼며 그 손에 뺨을 묻었다. 단추가 뜯긴 셔츠를 그 손이 조심스럽게 아래로 끌어 내렸다.

“곧 전하도 괜찮아지실 거예요.”

어떻게?

뒷목을 덮은 머리칼이 흩어지고, 작고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순간 등에 칼이라도 꽂히는 것 같았다.

“하, 하지 마!”

페란스가 반쯤 부서진 것 같은 몸을 기를 쓰고 일으켰다.

아마도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땀과 체액으로 흠뻑 젖은 자신을 로젠게인이 침대로 옮겨 온 것 같았다.

말 잘 듣는다는 건 취소.

마르스티엘이나 너나 똑같아. 왜 자꾸 얼쩡대는 거야.

눈이 마주쳤다.

로젠게인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께서는 벌써 몇 번이나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너무 괴로워하고 계세요.”

“대체 각인하면 괜찮아진다는 미친 생각을 어디서……. ……제발 하지 마. 그냥 좀 가.”

“전하께서 방금 전에도 제게 부탁하셨는데요.”

“하, 미친. 누가……,”

페란스가 여윈 손가락으로 로젠게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잘 들어. 그건 개소리야. 내가 아무리 넋이 나갔다고 해도 그런 말은……, 아니, ……?”

“전하……?”

“아,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페란스가 미친 사람처럼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마르스티엘은 각인을 했는데……. ……그게?”

“마르스티엘이 누굽니까.”

“그게 그럼…….”

페란스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새파래졌다.

“내, 내가…….”

각인을 하면 더는 이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했던 건 아만다리스였다.

멍청하고 순진했던 자신은 그 말을 믿고 그에게 각인했다. 각인을 하고, 내내 정신이 없었다. 눈을 떠 보면 아만다리스가 제 성기를 핥고 있거나 아니면 엉덩이를 벌려 손가락을 넣고 있거나 했다. 천사 같은 몸이라면서 구석구석 더듬고 핥고 빨아 댔다. 그래도 열은 계속 올랐다. 아만다리스가 내뱉는 페로몬을 끝도 없이 삼켜 댔다.

그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만다리스가 제 입에 발기된 성기를 들이대고 혀를 내밀게 시키는 일 같은 건.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이 열로 달아오른 몸에 해갈을 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건 옳지 않았다. 게다가 아만다리스는 자신에게 각인하지 않았다. 제 몸을 편하게 해 준다면서 자신에게만 각인을 시키는 것은 이상했다.

그래서 미쳐 버린 머리가 아만다리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새로 각인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널……?”

페란스가 열로 흐릿해진 눈을 억지로 깜박댔다. 시야가 조금 맑아졌고, 로젠게인의 셔츠 단추가 풀려 있는 게 보였다.

로젠게인이 볼을 붉히며 뒷목에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놓았다.

“전하께서 먼저 제게 각인하셨습니다.”

“아니……,”

각인이 될 리가.

이미 아만다리스에게 각인을 했다. 자신은 멍청하게 로젠게인의 살갗을 깨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열세 살의 알파는 각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열여섯 살의 자신도 그랬다.

그래서 그런 미친 짓을…….

마르스티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번져 왔다.

-제가 기억하는 페로몬이 있습니다. 다르긴 해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페로몬을 두고 하던 말이었다.

각인열이 다 내리지 않아 아직은 그렇게 많이 뒤틀리지 않은 상태의.

-연인은 아니었습니다.

각인 상대를 묻자 그가 한 대답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처음 맡아 본 페로몬의 주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자신에게 각인하게 만들었다.

아만다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는 아만다리스보다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을지도 몰랐다.

“잘…… 들어.”

페란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에는 열이 너무 높았다. 그렇지만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가 자신을 또다시 증오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오늘 보고 들은 건 잊어. 너는 여기 온 적도 없고, 나를 발견한 적도 없다. 내가 열에 들떠 지껄인 헛소리도 들은 바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비밀로 두고 싶으신 건가요?”

“비밀 같은 건 없어. 너는 그런 걸 보거나 듣지 못했다. 네가 나를 발견한 적이 없으니까.”

“…….”

로젠게인이 열세 살답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마르스티엘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고자 할 때 짓던 그 표정이었다.

“돌아가. 가서 전부 잊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명령이다.”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그게 네가 살 길이다. 너와 콜더스트 남작가가.”

“…….”

로젠게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남작에게라도.”

“……그럼 그 일도 없는 게 되겠군요.”

“그 일이 뭔데?”

“전하께서 제게 청혼을 약속하신 일.”

“…….”

“잊어야 하나요? 그것도?”

별이 아주 많은 눈동자가 잊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저 깊은 물속처럼 느껴지던 마르스티엘의 눈과는 너무 달랐다. 반짝대는 눈은 물기가 많아서 조금만 크게 떠도 우는 것처럼 보였다. 찬란하고, 다채로웠다.

……네가 스물여섯 살 때도 이런 눈을 했다면 나는 정신을 못 차렸을 거야.

페란스가 쓰게 웃었다.

“네가 비밀을 지킨다면, 나도 약속을 지키겠다.”

“정말인가요?”

“그래.”

겉모습은 열여섯 살일지 몰라도 페란스가 생각하는 자신은 스물아홉이었다. 열세 살짜리한테 청혼을 약속하는 게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꿈인 줄 알고 그랬어.

나를 사랑해 줘, 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꿈인 줄 알았다고. ……진짜야.

“그럼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

페란스가 들리지 않게 한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로젠게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콜더스트가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로젠게인은 자신에게 각인하지 않았고 그가 자신을 미워할 일도 더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이제 어서 돌아가.”

“전하께서는요. 지금 몹시 편찮으시잖아요.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실 텐데요.”

“아니, 괜찮아.”

호이헨 홀 본관에 있는 건 더 위험했다. 열이 어느 정도 내릴 때까지는 아만다리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다.

제 기억으로는 분명히 각인열이 몇 달씩이나 갔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페로몬을 풀어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아만다리스가 없으니 열도 곧 내려갈 것이다.

이제껏 겪은 발정기에 비하면 정말이지 견딜 만했다. 이제 발현 중이라 증상이 평소보다 약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스물아홉이었다. 스물아홉의 자신은 열여섯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비하면 몸을 다스리는 법을 알았다.

어느 정도 페로몬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수도로 돌아갈 것이다. 수도에서는 블루와렌에서 들어오는 억제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괜찮지 않아 보이세요.”

“네가 있으면 더 힘들지도 모른다. 너도 알파니까.”

조금 전부터 그에게서 계속 마르스티엘의 페로몬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론 열세 살짜리가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페로몬을 풀고 있다는 미친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리움을 불러왔다.

마르스티엘의 페로몬은 제 별자리였다. 자신의 의지로 어두운 밤하늘을 몇 시간이고 훑으며 처음으로 발견한 별자리였다. 제 애정의 이정표였다.

“아, 그건…….”

무슨 말을 하려던 로젠게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로젠게인이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갑자기 우르르, 발자국 소리가 몰린다 싶더니 쾅, 하며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아만다리스가 등장했다. 콜더스트 남작가의 기사들을 거느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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