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흑!”
정신이 들었다.
몸이 지독하게 뜨거웠다. 페란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발정기와 같으면서도 미세하게 다른 감각 속에서 눈을 떴다.
빌어먹을. 벌써 발정기인가.
말이 되지 않았다. 발정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임신하면 발정기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 그럼 아이를 잃어서……. ……그래, 그랬나 보군.
생각해 보면 웃긴 노릇이었다.
제 아이는 아직 배 속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페란스는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오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이 때문이 아니겠지.
끓어오르는 욕구 때문에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페란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이를 잃었다는 건 마르스티엘을 잃었다는 말이었다.
내가 중절약을 먹은 걸 알게 됐겠지. 너는 이제 어떻게 나올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제 들은 협박대로 그는 이제 위스타드에서 가장 크고 강한 군대를 가진 입장이었다. 페로몬의 통제를 벗어났더니 이제는 무력에 굴하게 생겼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왕족 인생이 이래.
페란스가 투덜거렸다. 숨을 몰아쉬는데 하얀 입김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좀 추웠다. 침대가 딱딱했다. 기가 막혔다.
환자를 대체 어디에 눕혀 놓은 거야?
페란스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마르스티엘이 코웃음이나 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런 거지같은 침대에 눕혀 놓은 이유나 대라고 따질 생각이었다.
“여기…… 미친…… 여기가 어디…….”
기를 쓰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페란스는 넋을 놓았다.
궁이 아니었다.
그가 아는 한 궁 안에 이렇게 천장이 낮은 곳은 없었다. 지붕과 벽이 전부 나무로 된 방도 없었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일절 없는 동물 머리 박제가 주렁주렁 벽에 걸려 있을 리도 없었다.
“내가 왜…… 누가 나를…….”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억지로 이으려고 했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간신히 일으킨 몸이 다시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페란스가 입술을 물고 신음을 흘렸다.
꿈에서 오줌이라도 싸는 것처럼, 그만두고 싶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을 때처럼 페로몬이 줄줄 흘렀다. 질척해진 바지가 살갗에 들러붙었다.
“이…… 개…… 자식, 아무리 거래가 파토…… 그래도 발정기를 이렇게 방치하는 게 어딨……,”
원망이 두 눈에 핑 돌았다.
아만다리스는 이제 더는 없었다. 대신 마르스티엘도 없었다. 중절제를 먹은 것은 마르스티엘이 아이를 빌미 삼아 위스타드를 휘젓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제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마르스티엘은 떠나거나 아니면 군대를 써먹을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자신과 함께 있는 쪽은 아니었다. 이제 앞으로 닥칠 발정기는 혼자 해결해야 했다.
“빌어…… 먹을,”
페란스가 베개를 움켜쥐고 욕설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똑똑.
누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혹시 이 안에 계시는 건가요?”
앳된 음성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발정기를 들키고 싶지 않은 약간의 자존심과 각인을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알지 못한다는 걱정은 반가움보다 덜했다.
페란스는 발정기를 혼자 보내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르스티엘이 아직 궁 어딘가에 있다면 억제제를 구걸하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 ……흐읏!”
페란스가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가 살갗을 쉽게도 찢었다. 피가 후두득 떨어져 베개를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전하. 들어가도 되나요?”
“허, 허락한……. ……들어……,”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끼이익.
문이 열렸다.
페란스는 눈썹을 적신 땀을 애써 닦으며 방에 들어오는 자를 보았다.
앳된 목소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이는 자신보다도 더 작을 것 같은 소년이었다.
“너……. …….”
“전하. 어디 아프신 건가요?”
“…….”
첫 인상을 말하자면 예쁘게도 생긴 얼굴이었다.
얼굴도 작고, 두상도 작고, 체구도 작았다. 눈이 사파이어처럼 맑고 파랬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있어서 두상이 더 동그래 보였다.
“너……,”
분명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머리가 길었으면 소년인지 소녀인지도 헷갈렸을 것이다. 자신은 저런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왠지 누가 연상되었다. 소년보다 훨씬 더 연한 색 눈을 가진 누군가가. 소년보다 훨씬 더 큰 체구와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저 작은 어깨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넓은 어깨를 가진 누군가가.
표정이나 성격, 저를 대하는 시선까지 전부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거라고는 결이 좋은 검은색 머리칼밖에 없는 누군가가.
“전하. 괜찮으세요? 아파 보이세요.”
말투도 전혀 달랐다.
“피가 납니다. 일단 이걸로 닦으세요.”
소년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공손히 내밀었다.
탓!
페란스가 손수건을 쳐 냈다.
“전……,”
그가 당황하는 소년의 손을 움켜쥐었다.
희한하게도, 체구는 작았는데 손은 제법 큼지막했다.
“네 이름…… 이름이 뭐야? 넌 누구야?”
“……전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소년의 표정이 약간 흐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곧 그는 시선을 똑바로 맞춰 오며 말했다.
“제 이름은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입니다, 전하. 카벨리카의 스웨인 3세로부터 렌스코우 영지를 하사받은 콜더스트 남작의 장남입니다.”
“아……. ……하,”
열에 들떠 붉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전하. 왜 그러세요?”
소년 로젠게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그런…… 미친…… 네가 그일 리 없……,”
동그래진 눈에 가득 들어찬 게 걱정이었다는 것을, 페란스는 정신을 놓고 풀썩 쓰러지며 깨달았다.
* * *
“그럼……. ……겠습니다, 전하.”
머릿속은 여전히 혼미했다. 아니,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몇 배나 더 복잡했다.
꿈일 것이다. 가장 말이 되는 것은 꿈이었다.
그가 그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기억에서 전부 사라진 어린 시절이 꿈에 나오다니.
페란스는 허우적대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꿈속이었다. 자신은 어딘지 모를 그 방, 조금 딱딱한 침대에 누워 벽에 걸린 기괴한 박제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제 페로몬 향에 질식할 것 같았다. 몸이 얼마나 이런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희한하게도 버틸 만했다. 아마도 마르스티엘과 두 번의 발정기를 함께 보낸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니, 젠장. 어차피 꿈이잖아.
생각을 잇던 페란스가 혀를 찼다.
발정기거나 말거나. 꿈이라고.
그러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페란스는 페로몬과 오메가 애액이 줄줄 새어 나오는 이 개같은 꿈을 나름대로 즐겨 보기로 했다.
“너는…… 지금 열셋…… 맞나?”
“네, 전하.”
뭘 하겠다면서 옆으로 다가온 마르스티엘이, 아니 로젠게인이 손가락을 꼼지락대고만 있었다.
왠지 수줍어하는 것 같아 그게 좀 웃겼다.
……이건 좀, 배덕한 기분이 드는데.
열세 살밖에 안 된 너라니. 게다가 지금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
다시 봐도 예쁜 얼굴이었다. 얼굴은 동그랗고 눈도 동그랬다. 짙은 푸른색 눈은 물기를 머금고 반짝거렸다. 눈 속에 별이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눈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페란스가 작게 중얼대며 로젠게인의 눈가를 손끝으로 슥 문질렀다.
로젠게인의 뺨이 붉어졌다.
“전하…….”
“아, 그래. 어렸을 땐 이렇게나 귀여웠네.”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짧았다.
“내가 널 기억하고 있었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저는 지금도 괜찮아요. 첫 만남은 잊었다 하셔도요.”
“……? 이전에도 날 본 적이 있었어?”
“처음 호이헨 홀에 당도하셨을 때요. 그날 처음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전하께서 땀을 흘리고 계셔서 제 손수건을 쓰셨어요.”
“그랬나…….”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호이헨 홀에 도착한 첫날을 떠올리려던 페란스는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흔들었다.
로젠게인이 갑자기 페란스의 손을 꼭 잡았다. 자그마한 체구나 동그란 얼굴에 비해 두툼하고 커다란 손은 제 것보다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문득 페란스는 제 손가락이 부서질 것처럼 희고 가느다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저는 전하께서 어서 편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저도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무섭지 않아요.”
“뭐가 안 무섭다고?”
“각인이요.”
“뭐……?”
페란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젠게인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페란스가 입은, 땀과 체액이 잔뜩 젖어 있는 셔츠 단추에 손을 올렸다.
“하나만 열겠습니다, 전하.”
“뭘…… 왜……?”
“그래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페란스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로젠게인이 하는 짓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방금 각인이라고 한 것 같은데……. 대체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나는 아직도 네가 각인했다는 그 오메가가 신경 쓰이는 걸까.
셔츠 단추를 푼 로젠게인이 조심스럽게 목깃을 벌렸다. 그가 제 뒷목에 입술을 댔을 때, 비로소 페란스는 각인이라는 말이 섬뜩한 현실로 구체화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