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일부러 키사드 성을 비웠다.
짐작했던 대로 아만다리스가 움직였다. 키사드 성에 들어와 페란스를 강제로 데려갔다.
그간 아만다리스가 제 뒤를 캐고 다니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그걸 페란스에게 얘기하려고 안달이 났을 것이다. 무얼 알아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그래도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닙니까? 페란스 왕자를 미끼로 던져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메넌이 그런 소리를 했다.
“던져 주다니. 지켜보고 있잖아.”
“아니, 손도 못 대게 하실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정말로 아만다리스와 접촉을 하게 내버려 둬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알레프가 인상을 썼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뭐? 내가 무슨 못 할 말을 했다고.”
“그랬으니까 닥쳐.”
알레프는 여전히 페란스를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가 살아서 아이를 낳는 편이 더 낫다고 말을 해 뒀지만 알레프는 여전히 재각인의 위험성을 걱정했다.
우습게도 정작 자신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일 각인이 된다면 지금의 페란스는 자신도 각인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자신에게 진심이 되었으니까.
쌍방 각인이라면 다른 어떤 계약보다 더 확실할 수도 있었다.
이번 납치 사건에서 아만다리스는 제 역할을 하고 달아났다. 아만다리스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콜더스트가의 예전 땅을 사들였다는 것뿐이었다. 그 정도라면 아직 이름을 들키기에는 일렀다.
납치 사건으로 페란스가 군대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아만다리스의 몰락이 코앞이었다.
“이게 네 페로몬인가?”
두 번째 발정기를 보낸 뒤 각인 반응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생각보다 진행이 빨랐다. 조만간 각인이 완전히 깨어질 것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직은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재각인의 위험성은 여전했다. 페란스가 각인을 깨는 건 그 위험성을 자신이 어느 정도 통제하게 된 뒤라야 했다.
“이상해. 네가……,”
페란스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미친 것처럼 예뻤다.
페란스의 껍데기가 제 이상형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페란스 카벨리카를 너무 일찍 알게 되었다. 한 번 각인된 아름다움은 다른 얼굴로 쉽게 교체되지 않았다. 각인을 풀고 난 이후에도 제 취향은 한결같았다.
가끔은 짜증이 났고, 가끔은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열세 살에 일방 각인한 채 살아남은 인간이 멀쩡한 것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몸을 움직일 만해지자 페란스는 알아서 약혼식을 준비했다.
“네가 내 것이라는 증거를 하루라도 빨리 남기고 싶었어.”
페란스가 자신에게 진심이 되는 건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 왔다.
하지만 의도가 성공했다는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사제 앞에서 이름을 묻지 않는 눈치도 마음에 들었다. 페란스 카벨리카는 자신의 출신까지 전부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을 그렇게 드러냈다.
“오늘부터 나는 네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제 심장 근처에는 카벨리카의 붉은 백합이 매달렸다.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가운데 카이넨 웨이모스의 등장이 잡음을 만들었다.
페란스는 웨이모스나 아만다리스가 독을 쓰지 않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다행히 구멍을 빨아 주는 것으로 넘길 수 있었다. 페란스는 제 변명을 믿어 주기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나 사랑스럽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는 말을 숨 쉬듯이 내뱉고 있다는 것을 그즈음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의도적이었던 말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그건 저 찬란한 껍데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말과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네 것이라는 걸 증명해 봐.”
그건 도발이 아니었다. 허락이었다.
……정신이 나갔군.
페란스는 그간 자신이 그를 얇은 유리그릇처럼 다뤄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각인 반응이 얼마나 개같은 것인지 반도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
허락이 떨어진 이상 망설일 게 없었다.
로젠게인은 머리끝부터 발톱까지 전부 제 취향대로 생긴 몸을 공들여 안았다. 구석구석 전부 깨물고 핥았다.
처음으로 한 섹스다운 섹스였다. 각인을 깨는 과정 같은 건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그저 안고 또 안았다. 페란스는 각인 반응으로 진저리를 치면서도 다리를 벌려 주기 위해 끙끙거렸다.
이건 뭐야.
너무 간만의 섹스라서 그런 걸까.
그래서 자신이 섹스가 뭔지 잊고 있었던 걸까.
섹스란 게 원래 이랬나.
몸이 더워지는 게 아니라 뱃속이 더워졌다.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심장 부근이 끓어올랐다.
이게 뭐야.
뭐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데.
어느 순간 통제를 잃었다. 페란스가 악을 쓰며 울어 댔다. 각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알파의 노팅을 받아들이는 게 어떤 고통을 불러오는지, 그도 알지 못했다. 각인한 인간들을 제법 봐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노팅을 끝냈을 때 페란스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꽤 많은 피를 흘렸다. 살갗은 차가웠고 안색은 겨울 호수처럼 싸늘했다.
죽지 마.
생각보다 먼저 두 팔이 페란스를 끌어안았다. 창백해진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심호흡을 하는 동안 내내 머리를 짓누르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죽지 마.
페란스가 없는 위스타드의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제 계획에는 늘 페란스가 있었다는 걸 그렇게 깨달았다.
죽지 마.
제발.
페란스가 마티바 탑을 찾은 뒤 혼자 아만다리스를 대면하러 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에도, 그게 계획에 없던 변수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로젠게인이 떠올리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죽지 마.
노팅은 실수였다.
각인이 풀리지 않은 몸이 다른 알파의 씨를 곱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가능하다면 없던 일로 돌리고 싶다. 거래를 깨겠다.”
페란스가 그런 개같은 말을 내뱉을 때도 제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임신은 아직 안 돼.
그런 의미에서 페란스가 위약금을 물겠다고 나서면 곤란했다. 페란스는 아직 몰랐지만 임신을 한 게 맞다면 그는 여느 때보다도 자신을 필요로 하게 되어 있었다.
“제 말을 들으시는 게 좋습니다. 저는 지금 위스타드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대를 가진 입장입니다.”
페란스가 그 말을 협박으로 알아듣는 게 안타까웠다. 사실은 죽지 말라는 말에 더 가까웠는데.
살아서 오래도록 나와 함께 있자는 말과 다를 바 없었는데.
“살려 내!”
페란스는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죽어서는 안 됐다.
궁정의 중 하나가 포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언급했다. 이미 손쓰기에는 늦었다는 의견과, 그렇게 되면 카벨리카의 후사는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반대가 빠르게 오갔다.
“후사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닥치고 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두려웠다.
페란스가 이대로 제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 * *
“살려 내! 뭐든 허락할 테니 살려 내!”
소리치는 마르스티엘에게 궁정의가 뭐라고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러면 다시는…… 아이를 가지실 수 없…… 왕실의 후사가…….”
“닥치고 하란 말이다!”
뭘…… 하라는 거야.
마르스티엘의 목소리가 키슬크만큼이나 절박하게 울부짖는 것처럼 들려서 그게 희한했다.
아……. 아이를 잃으면 네 계획도 어긋나니 그런 건가.
안됐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줄 걸 그랬어. 어차피 내가 죽으면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인간이 피가 좀 섞였다고 왕관을 쓰게 될 텐데. 그럴 바엔 네가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어.
그걸 알게 되자 허탈했다.
왜 이런 건 뒤늦게 깨닫는 걸까.
그게 제 마음이었다. 지키려 했지만 사실은 주고 싶었다.
“……안 너무 늦…… 사실 아니…… 나는 너를……,”
“전하.”
마르스티엘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러나 제 눈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더듬어 만지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죽지 마십시오. 저를 두고 죽지 마십시오. 이런 식으로 저를 벗어나려 하지 마십시오.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궁정의에게 소리치던 때와는 다르게 차분해진 목소리가 제 귀에서 속삭였다. 그 목소리를 만지고 싶었다.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정말 그런 건지 알고 싶었다.
그 계약…… 미안하게 됐군. 제대로 끝을 내지 못해서.
생이 끝나 가는 지금에서 정말로 아쉬웠던 게 뭔지 깨달았다.
마르스티엘과의 계약이었다.
만일…… 만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래서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그땐 꼭 계약을 이행하겠어. 카벨리카의 피로 맹세하겠다.
“다……음…… 만약……에…….”
페란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마르스티엘에게 맹세를 전하려 했다.
“계약…… 끄, 끝……. …….”
……툭.
그러나 죽음은 의지보다 강했다.
끝내 마치지 못한 맹세와 함께 끝내 마르스티엘을 만지지 못했던 손이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게 제 마지막 기억이었다.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