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3)화 (62/122)

63.

“미쳤어? 나는 내 왕관을 돌려받으려는 것이지 뜯어 먹기 좋게끔 양념을 발라 던져 주겠다는 게 아니야!”

……솔직하군.

그렇게 말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꽤 열이 받았다.

나를 남들이 물어뜯기 좋은 허물이라 여기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받는데.

안타깝지만 한발 물러설 때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두었으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페란스는 제 발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폭풍의 가호를.”

로젠게인은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아만다리스의 오메가 아들을 상대하는 건 불편할 뿐 아니라 역겨웠지만 페란스를 낚기 위한 미끼로 그만한 것도 없었다.

다행히 옌스 포르본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석 몇 개를 줬더니 그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다루기 쉬운 미끼였다.

그러나 이렇게 효과가 빠를 줄은 몰랐다.

“오늘부터 나를 제외한 다른 오메가를 곁에 두지 마라. 너는 내 것이다.”

삼십 분 뒤 페란스가 제 손에 풀반지를 끼우고 있었다. 어설픈 반지가 어이없기도 했고, 제법 귀엽기도 했다.

질투심이 있는 편인가.

질투로 몸이 달아 안절부절못하는 페란스를 생각하자 폭소가 터졌다.

짜릿할 것이다. 저 찬란한 얼굴에게서 질투라도 받게 된다면.

“나가!”

약혼 소식을 듣고 궁으로 뛰어온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쏟아 냈다. 페란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신을 먼저 내보내려 했다.

이해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페란스는 각인을 수치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걸 자신에게 끝내 감추려 드는 게 딱하고도 귀여웠다.

각인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그걸 눈앞에서 감춘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일단은 사실을 나섰다.

페란스가 따로 믿는 구석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만다리스는 그 안에서 일이라도 치를 기세였다. 페란스의 반항을 꺾고 자신이 주인이라는 점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근위대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로젠게인은 시간을 계산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적당한 시간에 근위대를 밀치고 다시 사실로 뛰어갔다.

등 뒤에서 근위대가 뒤쫓아 왔다. 썩 괜찮은 장면이 만들어질 것이다.

쾅!

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만다리스가 페란스를 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친.

순간 머리로 열이 확 올랐다.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에게 손을 대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 광경을 직접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드득!

아만다리스의 손목을 잡아 꺾으며 아예 부러트리지 않게 애를 써야 했다. 문제가 커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부러트리고 싶었다. 페란스의 몸에 닿았던 열 손가락 전부, 하나씩.

……아. 설마 이래서 감추려고 한 건가.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눈으로 겪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잘된 일이었다. 그건 페란스가 자신을 확실히 알파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계획이 한 발짝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키사드 성으로 향하는 여행은 많은 기회를 의미했다.

고립된 곳이라면 행적을 감추기도, 아만다리스의 눈을 피하는 일도 쉬웠다. 그리고 정보를 조작하는 것도 쉬웠다.

“너무 느긋하신 게 아닙니까? 이러다 페란스 왕자가 여행을 무르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메넌이 잔소리를 해 댔다.

출발 시간이 꽤 지나긴 했다.

로젠게인은 스스로도 지루해졌을 무렵 겉옷을 벗었다.

“약간의 신뢰를 쌓으려는 거야. 거기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메넌이 혀를 찼다.

“일부러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 신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흔들리고 난 후에 견고해지는 것도 있으니까.”

이제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적당히 흐트러진 모습을 꾸민 로젠게인이 말고삐를 잡았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가 필요했다.

“알레프.”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메가의 페로몬이 필요했다.

알레프는 메넌의 뒤편으로 그를 데려가 페로몬을 흘렸다. 미리 오메가의 페로몬을 덮는 이유는 그가 페란스에게 각인했었던 과거 때문이었다. 각인은 풀렸다지만 같은 페로몬에 계속 노출이 되면 재각인이라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페로몬이 뭉글뭉글 옷과 살갗 틈에 내려앉았다. 메넌이 힐긋 뒤를 돌아보았지만 알레프는 그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너무 진해도 곤란해. 카벨리카의 핏줄들은 어릴 때부터 냄새와 맛을 구분하는 훈련을 받는다. 독을 대비하기 위해서. 네 향을 기억할 정도로 남기지는 마.”

“……어렵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알레프가 투덜거렸다.

모험을 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급하게 오메가 몇을 구해 페로몬을 섞었다. 그러느라 시간이 좀 더 지체되었다.

페란스는 그때까지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문을 박차고 뛰어내려 땀투성이가 된 자신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고가 있었습니다.”

미리 지어 낸 얘기를 들려주었다. 페란스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곧 왕실 길드와 그 소유의 유통망이 제 손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문제가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한 각인은 질기게도 파편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페란스 카벨리카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말도 없이 늦는 자신을 무턱대고 기다린 것도 그랬고, 걱정 어린 눈도 그랬다.

이런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페란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손이 자연스럽게 그를 붙잡아 제 허벅지 위에 눕혔다. 재킷을 벗어 덮어 줄 때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발을 벗기고 스타킹을 벗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새하얀 발가락이 아주 귀엽게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어처구니없이 예쁜 인간이네.

입에 넣어서 빨아 보고 싶었다.

잠든 그를 토닥이고 있으려니 제 허벅지에 뺨을 비벼 댔다.

뭘 하는 거야.

속눈썹이 눌려 바스락 소리를 냈다.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풍성하고 긴 속눈썹일 것이다. 날렵한 코는 끝이 둥글어 묘하게도 아이 같은 느낌을 주었다. 표정을 지울 땐 세상에서 제일 냉정하고 거만해 보이는 인간이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웃을 땐 아이처럼 천진했다.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페란스의 페로몬이 떠올랐다.

처음 그 페로몬을 맡았을 때 느꼈던 충격도. 무턱대고 갖고 싶어졌던 욕망까지 함께.

……위험해.

손이 멋대로 페란스의 금발을 만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로젠게인이 손짓을 멈췄다.

위험했다. 페란스의 곁에 있는 게.

결국 그는 핑계를 대고 마차에서 내렸다.

“위험합니다, 도련님.”

알레프가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알레프의 페로몬이 제 몸에 남은 페란스의 페로몬을 덮는 중이었다.

“다시 각인이 되면 어쩌실 겁니까? 제발 그만두십시오.”

“설마.”

페로몬을 몇 번 맡는다고 해서 다시 각인이 되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했다. 그러나 페란스의 뒤틀린 페로몬에도 자꾸만 몸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각인 후유증은 깊고도 질겼다.

“이름은 되찾아야지. 너와 나는 그걸 위해 살아왔잖아.”

“……하지만 도련님이 다시 각인을 하는 위험을 겪을 정도는 아닙니다.”

알레프의 말은 예외였다.

제 부모가 처형당할 때 알레프의 부모도 함께 죽었다. 콜더스트가의 기사단장이었던 알레프의 부친은 더 처참한 꼴로 죽었다.

위스타드는 죽음에도 신분이 있었다.

교수형처럼 깔끔한 죽음은 귀족들이나 허락받았다. 알레프의 부친은 팔다리가 먼저 잘린 뒤 혀를 잘리고, 그다음 목이 잘렸다. 주군의 반역죄를 충신에게 대신 치르게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개같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알레프의 복수심은 제 것보다 더 처절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이상했다.

“페로몬은 애착을 부른다던데.”

그때 떠오른 것은 아만다리스를 쳐다보는 페란스의 눈빛이었다. 애착이라는 평범한 말로 부를 게 아니긴 했지만 불쾌할 정도로 질기고 끈적대긴 했다. 십삼 년 동안 각인한 그 둘 사이에는 자신이 짐작도 못 할 것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혹시 너도 그런가?”

“제게 도련님을 연모하게 되었느냐 물으시는 거라면, 대답은 아닙니다.”

“그럼 놔둬. 이름을 찾는 게 우선이다.”

“도련님이 다시 각인이 된다면 이름을 찾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 어째서?”

“페란스 카벨리카를 죽일 수 없으니까요.”

“…….”

그때는 계획이 조금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란스 카벨리카를 꼭 죽여야 하나……?

콜더스트가의 몰락을 묵인한 건 페란스였다. 그가 단 한 마디만 했어도 부친이 처형을 받아들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로젠게인은 아만다리스가 침실에서 페란스의 옷을 벗기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사냥용 오두막에서 자신이 갓 발현한 페란스 왕자를 범한 사실로 뒤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알파라고 해도 제 나이가 열셋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미친 소리였다.

그러나 아만다리스는 확고했고, 페란스 왕자는 끝내 침묵했다.

최악이었다. 무슨 말을 더 해 볼 틈도 없이 그 역시 각인열이 시작되었다. 제 각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오두막에서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이 페란스 왕자를 범했다는 개같은 소리에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던 것은 각인열 때문이었다.

그렇게 콜더스트가는 사라졌다. 부친은 반역죄를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자신은 추방령을 받았다.

우습게도 위스타드에는 반역죄보다 강간죄가 더 끔찍한 취급을 받았다. 뼛속까지 신분에 얽매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역죄는 고상한 귀족들이나 돼야 저지를 수 있는 죄였지만, 강간은 누구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부친이 아만다리스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제 몸은 산 채로 개에게 물려 뜯겼을 것이다.

페란스 카벨리카가 죽는 건 알레프의 머릿속에서 너무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꼭 죽여야 할까.

살려 두면 쓸 데가 많을 텐데.

어쩌면 그의 이용가치는 핑계일지도 몰랐다.

이대로 죽이기에 페란스 왕자는 너무 눈부셨다.

구토제는 효과가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페란스는 자신을 완전히 믿기로 한 듯 보였다.

“너와 낳은 아이가 카벨리카의 이름을 이을 것이다.”

그들의 약혼이 진짜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몸을 혹사시키긴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계획을 바꿔야 했다. 페란스 카벨리카가 제 아이를 낳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었다.

“빨아 보면 안 될까? 조금만.”

그 말을 하면서 힐긋 제 다리 사이를 쳐다보는 페란스는 어떤 벽을 허물어트렸다.

비틀린 페로몬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결코 젖지 않는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구토를 하고 비명을 지르는 몰골을 보면서도 제 성기는 시들지 않았다. 이제는 좀 무서울 정도였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각인이 되살아난 게 아닐까 싶어서.

알레프의 페로몬에 의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알레프는 걱정을 넘어서 짜증을 내는 눈치였다. 메넌도 마찬가지였다. 둔한 알레프야 귀에 대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메넌은 예전부터 알레프에게 발정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조만간 들킬 겁니다. 페란스 카벨리카가 제 목을 자르라 할지도 모릅니다.”

페로몬을 덮어 주며 알레프가 투덜거렸다.

로젠게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페란스가 알레프를 질투하려나.

그럼 자신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 기분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다.

페란스는 내내 알레프를 신경 썼다. 그의 페로몬을 언급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자신이 페란스 카벨리카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혼인식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