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페란스가 그대로 굳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뺨을 가볍게 툭 두들겼다.
“아, 말씀을 안 드렸나 보군요. 아만다리스가의 남은 사병들은 마르스티엘군이 흡수했습니다. 만사천이나 되는 병력을 감당할 무력이 전하께 있습니까?”
“웃기지…… 마라. 여긴 위스타드야.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세워진 왕국이다. 내가……,”
“징병을 하시려면 애를 먹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제 대귀족들은 저와 꽤 친분을 쌓은 터라.”
“…….”
뼈가 아플 정도로 유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징병에는 시간이 걸렸다. 반면에 마르스티엘군은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 오늘 새벽 아만다리스 공작저의 문을 열었듯이 위스타드의 성문도 열 수 있었다.
“물론 저는 이대로 계약을 이행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마르스티엘은 보란 듯 저를 밀쳐 낸 손을 끌어와 손가락 새에 입을 맞췄다.
“전하께서는 제 진심을 의심하고 계시지만 제게 오메가는 전하뿐입니다. 전하의 얼굴, 몸, 제게는 한 번도 젖은 적이 없는 아래 구멍까지 전부 제 이상형입니다. 저는 전하보다 젊으니 늙어서까지도 전하께서 언제든 빨기 좋게 아래를 세우고 있을 자신도 있습니다.”
“…….”
그때는 진심이었다.
그때는 설마 마르스티엘이 제 마음을 조롱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기에 솔직했다.
“전하께도 그게 더 나을 겁니다. 각인은 아직 풀리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회임을 하셨으니 제가 더욱 필요하실 겁니다.”
“…….”
이제껏 제 인생에서 각인보다 더 큰 덫은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다.
마르스티엘은 그가 도무지 벗어날 수 없도록 정교하고 거대한 덫을 만들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은 계승권자의 친부로서 이 왕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막대한 위약금을 물고 파혼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둘 중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만사천 명의 대군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었다.
“너는…… 언제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갔겠지. 네가 했던 모든 거래에서.”
키스가 진해졌다.
“과찬이십니다. 손해를 본 적도 제법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손해를 보고 있는 편이겠군요.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쉽게 계약을 파기해 준 상대는 전하가 처음입니다.”
마르스티엘이 입을 맞출 때마다 페란스의 손이 움찔거렸다.
“시간을…… 줘.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
“좋습니다. 내일 눈을 뜨신 뒤 답을 주십시오.”
“그건 너무 빨라.”
“그럼 다리라도 벌리십시오. 동침 한 번에 하루씩 늘려 드리겠습니다.”
“너는…….”
그가 내뱉는 모욕이 몸속 어딘가를 잡아 찢는 듯했다. 페란스는 이를 악물었다.
“네, 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개같은 인간이야.”
“…….”
마르스티엘이 피식 웃었다. 키스를 멈춘 그는 대신 페란스의 약지를 꽉 깨물었다.
“읏!”
잇자국을 따라 피가 맺혔다. 마르스티엘은 손가락을 따라 동그랗게 번지는 피를 핥으며 말했다.
“계약을 이행한다는 결정을 내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근사한 반지를 해 드리겠습니다.”
“…….”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좋은 꿈을.”
마르스티엘이 마침내 제 몸 위에서 일어섰다. 카우치 옆에 선 그가 허리를 숙여 페란스의 이마에 키스했다.
기만이란 원래 달콤한 것이라 착각할 만큼 다정한 밤 인사였다.
……탁.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자 마르스티엘이 문을 닫고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
페란스는 유령처럼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사실에서 이어진 문을 통해 침실로 들어섰다. 침실 옆,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날마다 키슬크가 옷을 입혀 주는 방이 있었다.
달칵.
페란스가 거울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매일 몸에 지니는 간단한 소지품 따위가 들어 있는 서랍에 이번에는 다른 게 있었다.
자그마한 약병이었다.
약병을 가져다 놓은 사람은 키슬크였다.
페란스는 뚜껑을 열었다. 각인 반응이 일어날 때 마르스티엘의 페로몬에서 맡아지는 묵직한 습지 냄새 같은 비린내가 올라왔다.
페란스는 거울을 한번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흐트러지고 지친 얼굴을 한 오메가 왕자가 있었다.
이 얼굴로 왕관을 쓰면 어울리기나 할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그 오메가 왕자는 조만간 대관식을 치르고 카벨리카의 왕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어울리게 되겠지.
페란스는 입술로 약병을 가져갔다. 스르륵 눈을 감은 그는 병에 담긴 약을 전부 받아 삼켰다.
……탁.
약병을 비운 페란스는 병을 다시 서랍에 넣고 침대로 향했다.
그런 다음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커헉!”
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방이 온통 피 냄새에 절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피를 뱉어 내야 했다. 몸을 비틀자 다리 사이에서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났다. 그것도 피였다. 자신은 궁인들이 정신없이 수건으로 닦아 내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게 피를 쏟아 내는 중이었다.
“전하! 전하!”
키슬크가 저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약……. 그게 잘못……된 건가?”
페란스는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애써 돌려 키슬크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짓을…… 전하! 전하! 아아…… 신이시여!”
키슬크의 손과 옷자락도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온통 핏발이 선 눈을 보면 그가 지닌 죄책감의 무게를 알 것 같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마 내 몸이…… 감당 못, 커헉!”
페란스가 입으로 피를 쏟아 냈다. 키슬크의 얼굴에 온통 피가 튀었다.
“전하!”
키슬크가 오열하고, 이어서 미친 사람처럼 궁정의의 멱살을 잡았다.
“빨리 뭐라도 해! 전하를! 전하를 이리 두지 말고! 어서!”
아아……. 저런 성격이었나.
조금 웃고 싶었다.
이제껏 그 성질머리를 내 앞에서 어떻게 감추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키슬크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게…… 전부인가.
의식이 점차 멀어져 갔다. 고통도 그만큼 멀어졌다.
시야가 온통 흐려졌다. 분명 키슬크도 있었고 궁정의들도 있었지만 제 시야는 그저 희고 눈부실 뿐이었다.
시종장 외에는 별반 아쉬울 것도 없다니. 왕족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군.
궁정의가 뭐라 뭐라고 빠른 말을 내뱉었다. 궁인들이 달라붙어 무언가를 하려 들었다. 키슬크가 통곡을 했다. 지금은 그저 다 귀찮았다. 미친 듯이 자신을 불러 대는 간절한 목소리들도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주 작은 벌레가 내는 소리가 되었다.
페란스는 그저 하얘진 앞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 공허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대로 죽으면 나는……,
페란스가 스르륵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려 내!”
웅웅대는 작은 소음을 찢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르스티엘이었다.
* * *
페란스 카벨리카가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몇 시간 전까지 그렇게나 눈부시던 사람이었다. 찰랑이는 금발이 금을 부어 만든 것처럼 반짝였었다.
페란스의 문제점은 그것이었다. 너무 찬란하다는 것. 그래서 수시로 제 눈을 멀게 한다는 것.
지금 페란스는 더 이상 찬란하지 않았다. 파란색 입술을 가진 밀랍인형 같았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는 늘 찬란해야 맞을 텐데.
“따로 만날래요?”
먼저 추파를 던진 건 페란스 왕자였다.
로젠게인은 놀라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포도주 잔을 세게 쥐었다.
표정이 없다는 건 상단주로서 제가 지닌 장점이었고, 늘 잘해 온 일이었는데 지금은 무표정이 깨질 뻔했다.
“각인한 몸으로 여러 알파를 상대하는 일은 몸이 힘드실 겁니다.”
그러자 페란스는 날것처럼 생생한 경악을 드러냈다.
역시 각인이 맞았군.
열세 살, 그때 제 눈이 본 것이 각인인지 그는 몰랐다. 열세 살은 각인에 대해 미리 경고를 주기에는 한참 이른 나이였다. 게다가 부모는 둘 다 베타였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난히 잘생긴 아들 또한 당연히 베타라고 굳게 믿던 중이었다.
하여간 페란스가 노예 출신의 상인에게 신분을 감추고 추파를 걸어 오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각인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열여섯 살 때도 페란스는 발현열을 앓으면서도 각인에서 도망치고자 했다.
얘기가 빠르겠어.
로젠게인이 미소 지었다.
그가 짠 계획의 가장 큰 변수는 페란스가 각인 상대에게 갖는 애착이었다. 그사이 도망치고 싶어 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그저 애착만 남아 있었다면 제 계획은 성공하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가 아는 대로의 페란스라서.
페란스 왕자는 처음 봤을 때처럼 여전히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