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듣지 않으려고 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만다리스의 말은 이제껏 막연하던 공포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키슬크에게 혹시 모르니 중절약을 구해 놓으라고 했던 이유.
그 말을 하는 순간까지 만약이라고 자신을 달랬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아이를 가졌다면, 결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게 이렇게 끔찍한 방식일 줄은 몰랐다.
-너를 진정 아꼈다면 각인을 깨기도 전에 노팅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건 혹시 마르스티엘이 각인을 깨는 일을 절대 서두르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인 걸까.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퍽!
페란스는 아만다리스를 거세게 밀쳐 냈다.
“더는 네 개소리를 듣지 않겠다. 얘기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 네 죄에는 콜더스트 가문에 누명을 씌운 일도 더해질 것이다. 자백한 점을 고려해서 네 식솔들의 목숨은 붙여 놓지. 처형은 너 하나로 끝내겠다. 자비에 감사하도록.”
“자비……?”
그때였다. 아만다리스의 눈빛이 돌변한 것은.
“다 알았으면서도 끝까지 놈을…….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어떻게!”
아만다리스는 홱 달려들어 페란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큭! ……놔!”
“네가 꼭 나를 죽여야겠다면, 그러면 같이 죽자. 빼앗기느니 그렇게라도 갖겠다. 그래, 그게 좋겠어.”
“놔!”
“놈은 절대 너를 가질 수 없어! 네가 나 아닌 놈의 아이를 낳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는 내 거야! 죽더라도 내 것인 채 죽어야 해!”
“미친…… 놓으라고!”
퍽! 우당탕! 챙그랑!
페란스의 발길질에 탁자가 걸렸다. 탁자가 옆으로 쓰러지며 포도주 잔과 화병 같은 것들이 요란하게 쏟아졌다.
페란스는 바닥을 더듬어 깨진 화병 조각을 집어 들었다.
“크읏…… 놔……!”
퍽!
“크악!”
화병 조각이 아만다리스의 눈을 찔렀다. 아만다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페란스의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다. 페란스는 그를 발로 걷어차고 문으로 달려갔다. 아만다리스가 뒤에서 페란스를 쫓아왔다.
페란스가 문고리를 잡기 직전, 아만다리스가 그의 덜미를 낚아챘다.
“윽!”
“내가 너를 놓아줄 줄 아느냐? 어림도 없지. 네가 없는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너를 안고 죽겠다.”
“무슨 그런 미친 소리를, 큭!”
한쪽 눈이 감긴 아만다리스가 미친 말을 내뱉는 미친 인간이 되어 다시 페란스의 목을 조르려던 그 순간이었다.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둘을 모두 멈추게 했다.
이 시간 급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불길한 예감의 다른 말이었다.
“합하! 문을 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공작저의 집사였다. 키슬크보다 나이가 많은 회색 머리의 집사가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차가운 긴장이 페란스와 아만다리스의 시선을 서로 엮은 채로 얼려 버렸다.
아만다리스는 못을 삼키듯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집사가 이런 말을 전했다.
“이곳이…… 포, 포위되었습니다.”
“뭐라고?”
“상대의 병력은 이곳의 두 배입니다, 합하.”
* * *
아무도 마르스티엘이 사병으로 에워싼 아만다리스 공작저에 군대를 보낼 줄은 몰랐다.
너무 빨랐고,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일만이나 되는 병력은 총 열둘로 인원을 나눠 그 어떤 목격담보다 신속하게 이동했다.
마르스티엘군의 요구는 하나였다. 페란스 왕자를 무사히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미 눈을 하나 잃은 아만다리스는 그 이상은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협상을 거절했다.
그 뒤로는 전쟁이었다.
공작저의 앞마당에 도합 천사백이십팔 구의 시체가 만들어졌을 때 전투는 끝이 났다. 그중 천이백 구가 아만다리스의 사병이었다.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아만다리스가의 기사단장은 스스로 항복을 고하고 목숨을 건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아만다리스는 페란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떨어질 때 나무와 부딪친 아만다리스는 목이 부러졌지만 죽지 않았다.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으로는 피거품을 쏟는 모습이 몹시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듣기로 그가 두 발로 걷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 했다.
마르스티엘군이 잠겨 있던 공작저의 문을 연 시간은 이제껏 페란스가 본 것 중 가장 푸른색을 띤 새벽이었다.
“더 기뻐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왕실 마차를 타고 궁으로 돌아온 페란스는 깨진 화병 조각을 잡느라 손바닥에 생긴 자그마한 생채기를 제외하면 궁을 나설 때와 똑같았다. 아만다리스와 나눠 먹은 구토제의 약효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해약 같은 건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목을 조른 손은 살갗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스티엘은 모르는 듯했다.
아만다리스가 죽기 직전까지 페란스에게 어떤 상처를 얼마나 남겼는지.
“설마 그를 연민하시는 겁니까?”
궁으로 돌아와 키슬크가 해 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지쳐 빠진 몸을 어딘가에 앉혔다. 그러자 마르스티엘이 축배를 위한 포도주를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
페란스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앞으로 다가와 턱을 들어 올렸다.
“이 표정, 마음에 안 드는군요.”
“…….”
“아만다리스가 전하를 두고 죽으려 했던 일이 그렇게 충격이었습니까?”
“……. ……아니.”
페란스는 한참 후에야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대답을 내뱉었다.
계속 무게를 더해 가는 고개를, 마르스티엘이 억지로 제 시선이 닿도록 고정시켰다.
“그럼 왜 이러시는 겁니까.”
너를 미워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이 순간 가장 두려운 건 마르스티엘이나 회임 여부가 아닌 제 마음이었다.
“피곤하다. 쉬게 나가 봐.”
“전하.”
마르스티엘은 턱을 쥔 채 집요하게 시선을 부딪쳐 왔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나가지 않겠습니다.”
무서웠다. 제 마음이.
오늘 알게 된 사실들을 전부 외면한 채 그가 건네는 잔을 받아 들고 축배를 들고 있을까 봐.
“……피곤하다는 말은 답이 되지 않나?”
“네. 이제껏 제게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말이니까.”
“…….”
그는 제 마음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할 계획인 걸까.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고 한 건 너잖아. 술은 안 돼.”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마르스티엘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페란스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술이 아니라 다른 거라면 괜찮겠습니까?”
“술 말고 축배를 들 만한 게 있나?”
그의 손이 부드럽게 볼을 쥐었다.
“키스해 주십시오. 아만다리스의 몰락을 환영하는 의미를 담아.”
환영이라…….
그렇게나 바라 마지않던 결말이었는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두렵고 두려울 뿐이었다.
“고개를 낮춰.”
“기꺼이.”
마르스티엘이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 페란스가 그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착각일까. 순간 마르스티엘의 목덜미에서 익숙한 오메가 페로몬 향이 나는 듯했다.
페란스가 굳었다. 이 오메가 페로몬이 실재인지, 아니면 제 두려움이 불러오는 환각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전하?”
페란스가 그대로 멈춰 있자 마르스티엘이 그를 불렀다.
페란스가 심호흡을 한 뒤 그를 마주했다.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
여전히 나는 네가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그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과거를 갚을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에게 아만다리스를 죽여야 했던 이유가, 자신을 속여 왕실로 들어와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를 전부 이해해도 제 목숨이나 왕관을 가져가라고 내어줄 수는 없었다.
“네게서 오메가 향이 나.”
“……그럴 리 없을 텐데요.”
마르스티엘의 표정이 가볍게 경직되었다. 페란스가 굳은 입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 코가 미친 게 아니라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페란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마르스티엘이 눈썹을 웅크렸다.
“물러가라. 오늘 같은 날 다른 오메가 향을 맡고 싶지는 않다. 다음부터는 내게 다가오기 전 몸단속을 하고 오도록.”
“전하.”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는 손목을, 마르스티엘이 붙잡았다.
“무슨 짓인가.”
“다시 맡으십시오. 그럴 리 없습니다.”
“너는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군.”
페란스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네게서 그 향을 맡은 게 벌써 몇 번째야. 한두 번이라면 네 변명을 믿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 네 번이면 네가 날 등신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유? 네게서 오메가 향이 맡아지는 이유를 내게서 찾는 건가? 과연. 그렇게 뻔뻔해야 부정도 저지를 수 있다는 건가.”
“오해입니다. 저는 전하께 어떤 부정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사실일까. 아닐까.
거짓일까. 아닐까.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제 눈은 심하게 멀어 있었고, 마르스티엘의 거짓말은 너무 능란했다.
“이 약혼을 유지할 생각이라면 네 오메가부터 돌려보내. 다시는 내 눈에 띄게 만들지 마라.”
“제 오메가는 전하십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애초에 네 몸에서 다른 오메가 냄새를 맡는 일이 없었어야지!”
퍽!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몸을 거세게 떠밀었다.
“나가. 허락이 있을 때까지 나타나지 마라. 지금부터 네 왕궁 출입권을 없애겠다.”
“……나타나지 말라니.”
떠밀린 채 굳어 있던 마르스티엘이 상체를 바로 하다 피식 웃었다.
다음 순간 그가 페란스를 홱 낚아채 부둥켜안았다.
“무슨 짓이야. 나가라고 명했다.”
마르스티엘은 제 몸을 꼼짝할 수 없게 얽은 뒤 천천히 중얼거렸다.
“페로몬은 그저 핑계겠고……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시는 겁니까,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