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열여섯 생일 근처였고, 봄은 우울했다.
차례로 부모를 잃은 페란스는 봄을 극복하지 못했다. 겨울 내내 언 땅에 파묻어 두었던 우울과 슬픔이 봄이 되면 녹은 땅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궁인들 모두 근심이 짙었다. 아만다리스는 행복하지 못한 왕자에게 먼 교외에서 요양하기를 권했다. 제 발로는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페란스는 너무 마르고 창백했다. 시골에 내려가 해를 쬐면서 말을 타고 개와 어울리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호이헨 홀이라고 부르는 아만다리스 공작가의 시골 별저는 요양을 위해 마련해 둔 곳이었다. 너무 크지 않은 호수와 강처럼 위협적이지 않은 맑은 개울이 있었다. 저택에서 키우는 사냥개들은 온순했고 주변에는 새가 많았다.
수도와 아주 멀리 떨어진 그곳에 도착한 지 이틀째, 발현이 찾아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곁에 머물러 시중을 드는 키슬크도, 아직도 궁을 떠나지 않고 페란스를 돌봐 주는 유모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개인 교사도 없었다. 페란스가 의지할 사람은 오로지 아만다리스뿐이었다.
아만다리스는 다정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저 다정함 같았다. 따듯하게 열이 오르는 몸을 안고 발현을 설명했다. 열여섯, 우울증을 앓는 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운 신체적 발현 증상을 하나씩 해결해 주며 몸을 달랬다. 앞으로 주기가 찾아올 때마다 같은 증상이 생긴다는 말은 페란스를 좌절하게 만들었고, 그렇기에 각인을 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제안은 열로 인해 혼란한 머리에 다정한 보살핌으로 다가왔다.
각인은 첫 섹스가 되었다.
젖은 아래를 닦아 주고 사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페란스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만다리스의 다정함은 다정함이 아니었다.
열에 흠뻑 젖은 채 도망쳐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렸다.
호이헨 홀은 작았지만 주변을 둘러싼 숲은 거대했다. 널찍한 사냥터에는 사냥용 오두막이 여러 개씩 있었다.
도망친 페란스는 다음다음 날 그 오두막 중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발현열과 각인열이 동시에 겹친 몸은 혼절한 채 호이헨 홀로 돌아왔다. 그다음부터 아만다리스는 페란스가 쓰는 침실 문을 잠갔다.
콜더스트 남작이 역모에 가담한 죄로 처형을 당한 건 이 주 뒤의 일이었다.
“나를…… 누가 데려왔다고?”
콜더스트 남작의 외아들이 오두막에서 페란스를 찾아냈다. 콜더스트의 영지는 호이헨 홀 근처였고, 두 가문의 근친한 관계로 인해 남작의 가족이 호이헨 홀을 관리하고 있었다. 페란스가 모습을 감춘 이틀 동안 콜더스트 남작은 부릴 수 있는 인원을 전부 동원해 호이헨의 숲을 뒤졌다.
당시 남작의 열세 살 외아들이 페란스를 업고 호이헨 홀로 데려왔다. 페란스의 두 발이 땅에 질질 끌렸는데, 맞지 않는 작은 구두의 뒤꿈치를 구겨 신고 있었다고 했다. 남작의 외아들은 신발 대신 진흙이 잔뜩 묻은 양말을 신고 있었다.
페란스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얘기였다.
“각인에 대해 알고 있었어…….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너를 침실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나를 보는 눈도…… 아이가 어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대로 놔두면 분명히 제 부모에게 말을 했을 거야. 뭐라도 했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어.”
처음에는 들어 줄 만하던 아만다리스의 말이 기억과 얽히기 시작하면서부터 횡설수설이 되어 갔다.
그건 페란스의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너였나.
열셋, 그리고 열여섯.
그때가 처음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구두를 벗어 신겨 준 열세 살짜리가 있었던 적은 제 삶에서는 없었다.
그 열세 살짜리가 자신을 지키려 들었다는 것도 몰랐다. 아만다리스가 열세 살짜리를 부모에게서 떼어 놓고 그 부모를 처형한 뒤 열세 살은 외국으로 가는 노예선에 실어 보냈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만다리스는 열세 살이 안쓰러워 죽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부모가 처형을 당하고 열세 살은 열병을 얻었다고 했다. 멀쩡한 사람도 앓거나 죽게 만드는 노예선에서 열병에 걸린 열세 살이 무사히 살아남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아만다리스는 제 손을 조금 덜 더럽히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는…….”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구토제의 효과가 이제야 올라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페란스는 손으로 입을 막고 밀려드는 어지러움을 견뎠다.
너는…….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나를 사랑하는 날은 오지 않겠군.
그에게서 늘 같은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게 아닐까.
그에게는 애초에 자신에게 줄 마음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노예선에서 전부 썩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놈을 죽여야 해.”
아만다리스가 와락 달려들어 페란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네가 할 일은 나를 협박하는 게 아니야. 놈을 없애는 일이야. 놈이 그 군대로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없애야 해!”
어깨를 놓은 그가 허겁지겁 페란스의 손을 쥐어 손등에 입술을 댔다.
“네가 내게 한 모든 짓을 용서하마. 전부 다 잊을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라이브라와 이혼하겠다. 그리고 너와 내가……,”
탓!
페란스는 손을 잡아 뺐다. 아만다리스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페란스를 쳐다보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게야.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얼마나 더……,”
“말했잖아. 내가 널 죽인다고.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아.”
“그건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몰랐을 때 얘기가 아니냐!”
“너를 죽이는 건 마르스티엘과는 상관없어. 너와 나의 일이다. 너를 내 손으로 죽여도 내 입에서 용서라는 말이 나올 일은 없어.”
“나를 죽이면! 나를 죽이면 놈은 누가 죽이느냐! 머리가 있으니 생각을 해 보거라!”
“그렇다고 너와 손을 잡을 일은 없어. 너와 마르스티엘, 둘 중 하나의 손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마르스티엘의 손을 잡을 것이다.”
“이렇게나 멍청할 수가! 놈이 너를 살려 둘 것 같으냐!”
“그건 내 문제야. 너와 내가 한배에 탄 것처럼 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놈은 너를 가장 괴로운 방식으로 죽일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듣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악에 받쳐서 아무렇게나 내뱉는 개소리일 테니까.
“놈은 강제로라도 노팅을 시도할 것이다. 네가 피를 쏟으며 혼절했다 들었다. 각인이 노팅을 거부해서 그런 게야.”
아만다리스는 각인 반응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노팅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였다.
“내 말을 잘 들어. 노팅이 놈의 계획이야. 날 믿어야 한다. 놈을 죽이려 했던 건 결코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너를 위해서였어. 놈이 널 죽일 테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아만다리스는 다시 페란스의 어깨를 붙들어 자신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놈은 나를 없애고, 너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위스타드를 한입에 삼킬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틀렸다. 노팅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팅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죽는 것도 아니었다.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죽지 않았다.
탓!
페란스는 아만다리스의 손을 제 어깨에서 잡아 뜯었다.
“그게 네 패착이다. 각인이 전부라 믿는 것. 각인은 조만간 깨질 거야. 그리고 노팅은 이미 했어.”
아만다리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뭐……? 뭐라고?”
“못 느꼈나? 네 앞에 서도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걸? 각인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걸 몰랐어?”
“그건…… 그건 말이 안 돼! 거짓말하지 마라! 그럴 리가 없어!”
“그래. 계속 그렇게 있어. 내가 너를 완전히 벗어나는 그날까지.”
“노팅이 어떻게……. 아니 그건……. 아니, 아니야!”
악을 쓴 아만다리스가 페란스를 꽉 붙들었다.
“잘 들어. 노팅은 절대 하면 안 돼. 놈이 아무리 달콤한 말로 꾀어내도 절대 하면 안 돼. 하면 네가 죽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거 놔! 그리고 이미 했다. 네가 틀렸어.”
“그게 아니야! 놈의 아이를 낳으면 네가 죽는다!”
“헛소리.”
“생각해 봐! 각인 반응이 어떤 건지! 다른 알파를 허용하지 않는 게 각인이야! 그런데 아이를 갖는 몸이 무사할 것 같으냐?”
“각인은 곧 깨진다. 네가 걱정할 것 없어.”
“놈이 정말로 각인을 깰 줄 안다면 벌써 깼겠지! 왜 각인을 깨지 않은 상태에서 노팅을 했겠나, 그럼!”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흔들릴 이유도 없었다.
“놈이 정말로 널 아낀다면! 그랬다면 절대 노팅은 하지 않아! 각인한 몸을 안지도 않겠지만, 노팅은 완전히 다른 얘기야! 네가 놈의 아이를 가지면……! 각인한 몸은 그걸 견뎌 내지 못해! 놈은 네 목숨이 아니라 아이를 택할 것이다. 아이가 왕관을 물려받기 전까지 놈이 왕관을 쓰겠지. 그만한 복수가 어디 있겠어! 그게 바로 놈이 그려 온 그림이라는 걸 끝까지 모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