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58)화 (57/122)

58.

너무 당연해서 그걸 묻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겠지. 네가 내 의지에 반해 네게 각인하게 만들었을 때부터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다.”

아만다리스는 허물어진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너는…… 그것이 운명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느냐?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랬듯이 너도 우리의 각인을,”

기가 막혀서 실소가 터졌다.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의 얼굴에 대고 비틀어진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개같네, 진짜. 네가 나라면 그딴 걸 운명이라 부를 것 같나? 처자식이 일곱이나 줄줄이 달린 늙은이와 마지못해 발정기를 같이 보내야 하는 걸? 그건 그냥 개같은 일이었다. 내가 미숙하고 어리석었기에 겪어야 했던 개같은 실수였어.”

“그렇게 말하지 마라! 십삼 년이야! 자그마치 십삼 년!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했다면 너와 나는 이미,”

“그래.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지. 너를 죽일 수 있게 되기까지. 더 빨랐어야 하는데.”

“그,”

“시간은 상관없어. 마르스티엘이 일 년 전에 나타났으면 나는 너를 일 년 전에 죽였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이 십 년 전에 나타났으면 십 년 전에 죽였을 것이고, 십 년 뒤에 나타났다면 그때 가서 죽였겠지.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늘 너를 죽일 생각밖에 없었다. 네가 내 손에 죽는 게 네 개같은 운명이야.”

“…….”

마침내 아만다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지독히도 현실감 없는 눈을 했다. 기가 차게도 눈에 물막이 고여 있었다. 무슨 짓이냐며 얼굴에 포도주를 끼얹고 싶었는데, 쓸데없는 친절이 될까 봐 참았다.

“내가 네 얼굴을 봐야 하는 시간을 길게 만들지 마라. 어서 입을 열어. 너는 네 식솔의 목숨을 무엇으로 살 셈인가.”

“……네가 키사드에서 먹었다는 그 독이다.”

아만다리스는 대답 대신 포도주 병 옆에 있는 작은 에메랄드 색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세 방울씩 잔 두 개에 각각 떨어트렸다.

그런 다음 페란스 앞으로 잔 하나를 밀었다. 답지 않게 손을 떨고 있었다.

페란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자세에서 눈썹만 치켜들었다.

“어쩌라고.”

“나도, 웨이모스도 아니었다. 그럼 누가 탔겠느냐.”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같은 걸 구해 왔나?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내가 손을 쓴 것도 아니고, 웨이모스가 한 것도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하나지. 놈이 스스로 탄 것이다. 그 독은.”

그건 페란스도 했던 생각이었다. 다만 마르스티엘이 아니라 알레프라고 여겼다.

어쨌거나 마르스티엘은 알레프가 아니라고 했고, 지금은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실망인데. 내가 꼭 들어 줘야 한다는 얘기가 고작 이거였다면.”

“마셔. 그럼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을 탄 게 놈이라는 걸.”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래야 들어 줄 마음도 생기지 않겠어?”

“잔은 네가 골라. 색이 다를 뿐 같은 양을 넣었다. 봤으니 알겠지만.”

“대체 뭘 하자는 거야.”

“마셔. 그래야 다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쾅!

페란스가 탁자를 내리쳤다. 각기 다른 포도주가 담긴 잔이 흔들리며 포도주가 출렁거렸다.

“같이 죽자는 뜻인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네가 주는 걸 내가 마실 이유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끝내 믿지 못하겠다면.”

아만다리스가 백포도주 잔을 집었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드디어 미쳤나.

페란스가 그를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시간이 좀 걸리는군. 더 많이 탈 걸 그랬나.”

아만다리스가 객기를 부려 댔다. 페란스는 미동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대로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십 분 정도가 흐르자 아만다리스의 안색이 변하더니 몸을 숙이고 구토를 해 댔다.

“우욱! 욱! 커억!”

보랏빛으로 변하는 입술도, 쉴 새 없는 구토도 똑같았다.

……정말 그 독이라고?

페란스는 아만다리스가 남겨 놓은 적포도주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때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때보다 희미하지만, 완전히 감춰지지는 않는 이질적인 향이.

그때는 그게 웨이모스 후작이 특별히 보내온 값비싼 포도주에서 나는 냄새인 줄만 알았다.

“……좋아. 같은 독이라고 하지. 그래서 네가 말하려는 건 뭔데?”

“모르…… 욱! 모르겠느냐?”

아만다리스가 자신이 바닥에 쏟아 낸 흔적을 가리켰다.

그날 같은 독을 먹었던 자신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그 흔적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내뱉은 것은 붉지 않았다. 그저 묽은 액체일 뿐이었다.

“네가 그때 먹은 것이나 내가 지금 먹은 것이나 독이 아니야. 구토제지.”

“……뭐?”

“피를 쏟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피가 아니라 포도주였을 것이다.”

“무슨 그런……,”

“독이 아니니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네게는 독이라 했겠지. 그래야 네가 나를 의심하고 미워하게 될 테니. 놈이 꾸민 짓이다.”

“말도 안 돼!”

“믿지 못하겠으면 먹어 봐. 붉은 포도주를.”

“…….”

몇 번인가 구토를 하고 나자 아만다리스의 안색은 차츰 제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해약이 필요 없는 약이었다.

독이 아니라 구토제였으니까.

“먹고 네가 붉은 것을 쏟아 내면 내 말이 맞다는 뜻이겠지.”

“아니……. 안 믿어. 믿지 않겠다. 이따위 속임수는 얼마든지 쓸 수 있어.”

독약이어야 했다. 단순한 구토제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럼 마르스티엘은 자신에게 해약을 양보한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아만다리스가 더러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로 하여금 독을 삼키게 만들려는 사기극이었다.

“그래? 아직도 놈을 믿고 싶은 게냐?”

아만다리스는 적포도주 잔을 들어 목구멍에 쏟아 부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어쩌면 말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만다리스가 스스로 독을 마실 리 없다는 것을. 구토제니까 마셨을 것이다.

영원 같은 십 분이 흘렀다.

“……커억!”

아만다리스가 구토를 했다.

토사물이 내려앉은 카펫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피를 토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큭……, 보아라. 어떻게 보이는지.”

“…….”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잔에는 붉은 포도주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페란스는 목을 뒤로 젖혀 불순한 포도주를 삼켰다.

“……빌어먹을.”

퍽! 쨍그랑!

페란스가 빈 잔을 아만다리스를 향해 집어 던졌다. 머리통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유리잔이 뒤편의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같은 독, 아니 같은 약이었다. 먹을 때 목으로 넘어가 혀에 남던 맛이나 코끝에서 느껴지던 향, 그리고 먹고 난 뒤 스멀스멀 위에 번지던 메스꺼움이 전부 같았다.

페란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해약이 필요 없는 구토제를 한번 삼킨 것으로 마르스티엘은 많은 것을 얻었다. 그가 아만다리스를 상대하면서 필요하다고 말한 모든 것이 왕실 공식 문서가 되었다.

페란스는 그것들을 제 진심으로 포장해 기꺼이 건넸다.

-제가 무얼 가지고 싶은지 깨달았습니다. 그 무엇도 전하의 목숨보다 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먹은 독은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일 인분의 해약을 자신에게 양보한 마르스티엘에게 진심보다 더한 것을 주고 싶었다.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각인한 몸을 그에게 던졌다. 노팅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생기는 것으로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해했다.

가능한 한 전부를 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제 목숨을 걸었으니까. 그게 그의 마음이었을 테니까.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그 마음이 자신과 똑같은 줄 알았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아닐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던 모든 게 전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네 마음도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그런 걸까…….

페란스가 다시 눈을 떴다.

포도주에 섞인 구토제가 독약처럼 위를 쥐어짰다.

“네가 오늘 내놓을 건 그게 전부였나?”

“설마 그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냐?”

부족하지 않았다. 차고도 넘쳤다.

그러나 페란스는 한 가지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했다.

마르스티엘이, 아니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가 원하는 건 아만다리스의 몰락만일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서 접근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진 것을 얻기 위해 거래를 했다. 시작은 거래였지만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아니더라도, 아주 나중이 되더라도.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매일 부대끼며 살다 보면. 아주 뒤늦게라도.

“콜더스트가 복수를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주겠다. 네 목을 따는 게 내가 아닌 그가 될지라도 환영하겠다. 그게 나의 답이다.”

“놈이 콜더스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 그런데도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게냐!”

“콜더스트 가문에 누명을 씌운 것은 너였잖아.”

“그래! 내가 그랬다! 내가 그랬어! 너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단 말이다!”

“……뭐라고?”

아만다리스가 상체를 들썩이며 페란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너 때문이었다! 콜더스트가를 그렇게 만든 건! 네가……! 얌전히 침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네가! 쓸데없이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

페란스가 발현과 각인열 속에 지워 버린 얘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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