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57)화 (56/122)

57.

몇 번을 망설인 끝에 페란스가 물었다.

“콜더스트……? 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요?”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페란스는 볼 안쪽 살을 으깨듯 씹으며 동요를 감추었다.

“어떤…… 일이 있었나. 그 가문에.”

“반역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몇 년이나 된 터라 섭정에 반발하는 가문이 여럿 있었고, 콜더스트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확실해? 왕실이 아니라, 아만다리스와 문제가 있었던 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신도 세세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전하. 다만 그것이……,”

키슬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냥 얘기를 해. 가리지 말고.”

“콜더스트는 아만다리스 가문의 방계나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콜더스트 남작이 제13대 아만다리스 공작의 의붓조카였고, 그래서 남작의 작위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다른 가문들에 비해 콜더스트 가문의 반역은 누명이었다는 소문이 잠시 돌기도 하였습니다.”

“……그래?”

“소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사오나, 저 또한 당시 이상하다 여겼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

반역……. ……누명이었다고.

최악이군.

“혹시…… 콜더스트가에 아들이 있었나?”

“예. 나이가 어려 처형을 면하고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혹시 이름도 알고 있나?”

“송구하오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나이다, 전하.”

만일 내가 그 아들이었다면.

섭정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가문은 도륙당하고 홀로 외국으로 추방되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어야 했던 열세 살짜리 아이였다면.

나는 누가 가장 증오스러울까.

페란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고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가 아닐 수도 있을까.

그게 아만다리스 하나일 수도 있을까.

나는 그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이용해 먹기 딱 좋았던 오메가 왕자일 수는 없는 걸까.

제 생각이 한심하고 역해 신물이 솟구쳤다.

마르스티엘의 목적을 알 것 같은 지금에서도 자신은 그가 진심이길 원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그간 나한테 했던 짓을 보면 그게 다 거짓일 수는 없는 거잖아.

마르스티엘은 자신에게 해약을 먹였다. 그가 자신을 증오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덩치도 위스타드 출신일지 모르겠군.

콜더스트 가문에 속한 기사의 자식이거나 했다면 둘의 끈끈한 유대도 이해가 갔다.

부모는 같이 죽었을 테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추방령을 받아 함께 노예로 팔렸고, 그래서 함께 자라면서 알파와 오메가로 자연스럽게…….

“……욱!”

페란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신물을 뱉어 냈다.

“전하!”

키슬크가 샛노랗게 질려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이, 이러지 말고 어디 앉기라도 하십시오. 궁정의를 부르겠나이다!”

“됐어. 그냥 속이 안 좋을 뿐이다. 호들갑 떨 거 없어.”

페란스는 키슬크의 손에서 손수건을 가로채 입가를 닦았다.

“전하. 신은 그럴 수 없나이다. 송구하오나 그 말씀은 따르지 않겠습니다. 궁정의를 부르겠나이다.”

“하지 마.”

페란스가 키슬크의 옷자락을 콱 붙들었다.

“전하?”

“별거 아니야. 다녀오겠다.”

“전하. 대체 그리 편찮으신 몸으로 무얼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이전 같으면 역겨웠을 키슬크의 걱정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간이 늦은 건 알지만 비서관을 대기시켜 놔. 법률 고문관도. 돌아오는 대로 둘을 쓸 것이다.”

“전하……. 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신께 언질이라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쯤 되면 키슬크가 아무리 제 역할과 주제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물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만일을 위해…….”

다음 말을 내뱉기 전에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르스티엘이 정말로 콜더스트가의 어린 아들이었다면, 그래서 자신이 이제껏 사랑에 눈이 멀어 저지른 짓들을 되돌려야만 한다면 거기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중절약을 구해 놔.”

키슬크가 도무지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저, 전하……, 그건 몹시 위험할 수도 있사온데 어찌…….”

“알고 있다. 그래도 임신을 지속하는 것보다 나은 상황이 올지도 몰라. 일단 준비해 둬.”

“…….”

키슬크는 입을 벙긋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페란스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사실을 떠났다.

* * *

아만다리스가 닥치는 대로 끌어 모은 사병 오천의 규모는 위압적이었다.

근위대 서른을 동행했지만 무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기분과 동시에, 자신의 왕국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걸려 있나 실감이 들었다.

마르스티엘이 위스타드의 몰락을 바랐다면 그는 가장 빠른 길을 질주하고 있는 셈이었다.

아만다리스의 사병들이 터 주는 길을 따라 왕실의 마차가 달렸다.

끼이이익…… 탁.

굳게 닫힌 정문 앞에서 마차가 멎었다. 안쪽에서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사병들이 근위대 숫자를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그러나 페란스를 공작저로 데려온 근위대장은 섣불리 마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눈이 먼 작자라도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보아야 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마차를 끌고 들어간다는 건, 당장 위스타드 왕실이 다음 왕위 계승자를 알아봐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하. 어떻게 할까요?”

일단 말에서 내린 근위대장이 마차로 다가와 페란스에게 물었다.

“문을 열었나?”

“그렇긴 합니다.”

“들어간다.”

“전하……. 다시 생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근위대장이 키슬크와 똑같은 말을 했다.

우려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 지금에서는 보였다. 어쩌면 그 역시 아만다리스의 꼬리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비로소 페란스는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비좁았는지 깨달았다. 그 좁은 눈이 멀기까지 했으니 마르스티엘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너희들의 목숨은 안전할 것이다. 고작 서른에게 오천을 상대하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라.”

“전하. 저희들의 목숨은 카벨리카의 핏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오로지 전하의 안위입니다. 지금 이곳은 너무,”

“그렇다면 돌아가.”

“……네, 전하?”

“나는 여기서 내리겠다. 너희들은 돌아가.”

“전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된다.”

페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이 있든 없든, 오천 앞에서는 어차피 의미가 없었다. 제 고집에 근위대까지 공연히 죽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나는 섭정과 나눠야 할 얘기가 있다.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어. 너희들까지 휘말리게 할 마음은 없다. 돌아가도 좋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명입니다. 곁에 있겠습니다, 전하.”

잠깐의 실랑이 끝에 근위대는 마차를 지키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쪽입니다, 전하.”

공작가의 집사가 본관 밖으로 나와 페란스를 맞이했다.

“합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해.”

……후우.

집사의 뒤를 따라가며 페란스가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아만다리스의 굴 깊숙한 곳으로 혼자 들어가는 마음은 두려웠다.

하지만 그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오천의 병력이 아니라 아만다리스가 캐 놓았을 진실이었다.

* * *

아만다리스는 그간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매일 젊고 잘생긴 얼굴만 보고 지내서 그런지 아만다리스의 주름이 더 선명해 보였다.

“앉아.”

“…….”

아만다리스는 처음부터 예의를 생략했다.

그를 한번 훑어본 페란스는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만다리스만 있는 응접실에는 미리 테이블 위에 잔이 놓여 있었다. 재미있게도 한 잔은 적포도주였고 다른 한 잔은 백포도주였다.

아만다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입맛을 바꾼 게 아니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들어라.”

“너하고 내가 사이좋게 앉아서 술이나 나눠 마실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할 얘기가 있다며? 들어 주러 왔다. 말해.”

“……변했구나. 정말로.”

아만다리스는 페란스를 응시하며 눈썹을 비틀었다.

“천만에. 원래 이랬어. 네가 그간 눈을 제멋대로 뜨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랬다고.”

아만다리스가 한숨처럼 자조를 내뱉었다. 페란스는 그를 보며 천천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개새끼가 개새끼처럼 굴까 봐 온몸이 긴장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전부 있는 공작저에서 설마 페로몬을 풀까 싶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아만다리스는 구석에 몰려 있어도 괴물처럼 커다란 쥐였다. 고양이를 어떻게 물어뜯을지 몰랐다.

“하지만 눈을 제대로 뜨고 다니지 않은 건 너도 마찬가지지. 안 그러느냐?”

“다른 말은 됐고.”

페란스가 아만다리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와 내가 주고받을 게 있지. 나는 그걸 위해 온 것이다. 다과나 잡담은 필요 없어. 네가 가진 것을 꺼내 놓아라. 그게 얼마나 유용한지에 따라서 너를 제외한 나머지 아만다리스들의 목숨을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

“…….”

아만다리스는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페란스의 반응에 표정을 바꾸었다. 둑에 난 자그마한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물이 결국은 둑을 무너트리듯이, 아만다리스의 표정에 생긴 자그마한 균열이 얼굴 전체로 번져 가 끝내 표정을 무너트렸다.

“나를…… 꼭 죽이겠다는 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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