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아무나 주인도 없는 방으로 데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약혼자나 가족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르스티엘은 위스타드에 가족이 없었고, 약혼자는 자신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들어갔었다는 거야.
“그, 그분도 약혼자의 신분으로……,”
페란스의 눈이 점점 새파래지자 지배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아만다리스의 셋째 오메가 아들이었군.
“그게 언제였는데?”
“그게……,”
지배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미 열린 입이었다.
지배인은 옌스 포르본이 호텔로 찾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며 비교적 최근까지도 나타나 난동을 부렸다고 실토했다. 호텔에서 방문을 거부하자 어떻게 일꾼을 매수해 뒷문으로 출입, 몰래 마르스티엘의 방에 숨어 들어갔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셋째 놈도 같이 죽여 버려야겠는데.”
페란스가 잇몸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진짜 빌어먹을 집구석이었다. 아비는 자신에게 집적대고 아들은 제 약혼자에게 집착했다. 그리고 옌스 포르본이 제게 집착한다는 말을 마르스티엘은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열이 받았다.
“그, 그런 일이 반복되고 블루와렌의 손님께서는 방문객을 예외 없이 전부 거절하도록 신신당부를 하였사옵니다, 전하. 제가 비록 위스타드의 신민으로 제 충성심은 오로지 카벨리카의 핏줄에게만 있사오나 호텔 일이라는 게 투숙객의 뜻을 최우선으로 해야만 하는 고충이 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전하…….”
호텔 지배인은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며 바지 자락이라도 붙들고 늘어질 기세였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누굴 누구하고 비교하는 거야. 빌어먹을.
페란스가 근위대에게 손짓을 했다. 지배인을 제 눈앞에서 치우라는 신호였다. 근위대가 재빨리 지배인의 팔을 양옆에서 붙들었다.
“너희들은 마차에서 대기해.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네, 전하.”
지배인이 울상을 지었다.
“저, 전하? 정말이지 그러시면 제 목은…… 전하…….”
페란스는 그 애절한 음성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마르스티엘의 방으로 향했다. 이전에도 왔던 곳이라 위치를 알고 있었다. 3층 가운데 방이었다.
“저언하아…….”
지배인이 울면서 끌려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번져 왔다.
페란스는 그 소리가 날파리라도 되는 것처럼 손짓으로 지워 버렸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3층은 고요했다. 사실 일꾼들이 오가는 1층을 제외하면 나머지 층은 조용한 게 맞았다. 마르스티엘이 데려온 자들은 그와 동행했거나, 아니면 그가 시킨 일을 하기 위해 저 어디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시점이었다.
철컥.
페란스는 가운데 방의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지만 그게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마르스티엘 님!”
문이 열리고, 페란스가 발을 채 들여놓기도 전에 누군가 튀어나와 안겨들었다.
“뭐야 이건!”
“헉!”
갑자기 뛰어든 인간이나, 얼떨결에 끌어안긴 인간이나 서로 당황해 몸이 굳었다.
“저, 전하……? ……헛,”
페란스의 얼굴을 확인한 옌스 포르본이 홱 몸을 떼더니 그를 밀치고 달아나려고 했다.
“어딜.”
페란스가 재빨리 옌스 포르본의 덜미를 잡아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오메가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옌스 포르본은 성별의 구분조차 애매한 가느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노, 놓아주십시오. 제가 여기 있는 걸 아버님께서 아시면……,”
“잘 아는군.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오늘 교훈을 줄 생각이다.”
하는 짓이 너무 어린애 같아서일까.
몰래 방에 숨어든 집착이 열받는 것에 비해 옌스 포르본에게는 크게 반감이 일지 않았다.
저런 어린애를 데리고 마르스티엘이 별다른 감정을 느낄 것 같지도 않았다. 옌스 포르본이 반반한 얼굴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알레프의 페로몬보다는 덜 거슬렸다.
“교훈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티바 탑에 두어 달쯤 갇혀 있으면 남의 약혼자에게 미련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정도는 머릿속에 제대로 박히겠지.”
맹세코 말하지만 옌스 포르본을 인질로 써먹을 생각은 없었다. 성년이라도 됐으면 모를까, 어린애를 인질로 삼는 짓은 카벨리카의 이름과 걸맞지 않았다.
그래도 마티바에 가둬 놓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덜 자랐거나 말거나 마르스티엘에게 집적대는 오메가가 있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제가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그런데 옌스 포르본이 미친 소리를 했다.
“……뭐라고?”
탓!
옌스 포르본이 페란스의 손을 뿌리쳤다. 이쪽을 향해 치켜뜬 눈이 매서웠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제 약혼자를 빼앗아 가셨습니까?”
“하,”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에 페란스는 헛숨을 흘렸다.
“네 아비의 욕심으로 겨우 혼담이 한번 오간 것 가지고 약혼은 무슨. 마티바에 가면 할 일도 없을 테니 정신을 차릴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틀렸습니다. 전하께서 잘못 아셨습니다. 아버님께 먼저 혼담을 청한 쪽은 마르스티엘 님이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페란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네가 이러는 걸 아만다리스는 모르고 있나?”
“신년 연회에서 먼저 춤을 청한 것도, 제 검은 눈이 마음에 든다 한 것도 마르스티엘 님이었습니다.”
“꿈이라도 꾼 모양이군. 적당히 깨어나도록.”
“아닙니다. 신년 연회에서 춤을 추고, 그다음 날 제게 꽃과 보석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만남을 받아들이자 기회를 주어 영광이라 하였습니다. 둘만 있을 때는 세상 그 어떤 이보다, 제 부모님보다 다정했습니다. 제 볼우물이 사랑스럽다 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말은 부끄럽다 이르면 자신은 그런 말버릇을 지닌 사람이니 받아 달라 하였습니다. 저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마르스티엘 님과 보냈던 모든 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 전하께서 빼앗아,”
“잠깐.”
헛소리였다.
덜 자란 오메가가 근사한 어른 알파를 동경해 말도 안 되는 꿈을 꿨을 뿐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 했으니까.
“……뭘 했다고?”
그런데, 아닐지도 몰랐다.
옌스 포르본이 하는 말은 그가 아는 마르스티엘과 너무 닮아 있었다.
제 엉덩이의 보조개를 두고 핥기 좋아 사랑스럽다고 했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페란스는 그게 사랑한다는 말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 건지 알지 못해 끙끙 앓았다. 삼 년이나 늦게 태어난 주제에 자신에게 자꾸만 귀엽다고 했다. 그게 너무 간지러워 한마디 했더니 말버릇이 그렇다며 받아들이라고 했다.
꿈은 내가 꾸고 있는 건가.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이건 꿈인가. 내가 깜박 잠이라도 들어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돌려주십시오. 전하가 빼앗아 가신 게 아니었다면 마르스티엘 님은 저와 혼인했을 겁니다.”
“…….”
옌스 포르본의 목소리가 저 멀리, 지옥처럼 먼 곳에서 우웅 번져 오는 메아리 같았다.
“돌려주세요. 나의 로젠을.”
“……뭐를?”
“로젠게인.”
“……?”
옌스 포르본이 천천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전하께서는 마르스티엘 님의 원래 이름도 모르고 계시군요. 그 약혼은 과연 진짜가 맞습니까?”
“…….”
페란스의 얼굴이 굳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제를 앞세워 한 진짜 약혼식에서도 밝히지 않았던 이름을, 어째서 약혼자가 아닌 옌스 포르본이 알고 있는지.
그 이름은 진짜인지.
뭐가 진실인지.
* * *
로젠게인 알란드 콜더스트.
그게 마르스티엘의 이름이었다.
옌스 포르본을 쥐어짜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제 머리가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나 기민하게 돌아간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머리뿐 아니라 온몸의 감각이 아프도록 예민해져 있었다. 예민하고 예리하게 날을 세워 옌스 포르본의 실낱같은 반응을 샅샅이 훑게 만들었다.
마르스티엘이 스스로 이름을 말해 주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옌스 포르본 같은 인간한테 무턱대고 알려 줄 이름이라면 제게도 비밀로 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였으니까.
처음 호텔 방으로 숨어든 날, 우연히 엿들은 것이었다. 콜더스트라는 성을.
옌스 포르본은 별로 똑똑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콜더스트라는 이름은 제법 친숙했다. 위스타드식 이름이었다.
그래서 부친에게 말을 했다. 마르스티엘이 어쩌면 위스타드 출신일지도 모르겠다고.
그 순간 경악으로 굳던 부친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부친은 콜더스트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콜더스트 가문에 알파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것과 그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아만다리스가 계획한 페란스의 납치 사건은 그즈음에 일어났다. 마르스티엘에 관해 할 말이 있다던 게 거짓이 아니었다.
“…….”
페란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힘을 이기지 못한 채 주먹이 부르르 떨려 왔다.
콜더스트.
그게 네 이름이었어.
제 기억 어딘가에도 그 이름이 있었다. 열여섯, 갓 발현을 했던 그 무렵 그 비슷한 이름을 가진 가문 하나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어 둔 것 같았다.
그 무렵에는 모든 기억이 엉망진창이었다.
발현열을 겪으며 동시에 각인을 하는 바람에 페란스는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을 발현 후유증에 시달렸다. 삼촌이나 다름없던 아만다리스가 매일 밤 침실로 들어오는 것도 충격이었고, 발정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웠다. 그 시절의 대부분은 수면제에 절어서 지냈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에 이끌려 눈을 뜨면 대개 자신은 알몸인 채였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악몽 같았던 그 시간이 나중에는 개같은 현실로 무뎌졌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아만다리스나 키슬크에게 종종 들었지만 대부분이 반대쪽 귀를 통해 스르륵 흘러나가 버렸다. 콜더스트는 그런 기억들의 아주 작은 파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