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54)화 (53/122)

54.

“노팅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회임이 맞으실 겁니다.”

키슬크의 반응은 담담했다.

혼인식도 하기 전에 애를 가졌다고 하면 저 고지식한 성격에 기절하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니, 그게…….”

“물론 그날 전하의 모습은 노팅을 했다 하기엔 참으로 섬찟했습니다만……. ……아니, 이 말은 부디 듣지 않으신 것으로 해 주십시오. 송구하옵니다, 전하.”

섬찟하다는 말을 듣고 못 들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어졌다.

“이미 들었어. 말 한마디로 얼버무리려고 들지 마.”

페란스가 거울에 비친 키슬크를 향해 눈을 흘겼다.

키슬크가 매우 민망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전하께 변고가 닥친 줄 알고 신이 제정신이 아니었사옵니다. 지금도 그날 전하의 모습을 떠올리면 밤에 잠이 오지 않……. ……이런 말은 그만 올리겠습니다, 전하.”

키슬크가 입을 다물고 스카프를 골랐다.

페란스가 거울로 키슬크를 쳐다보았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마르스티엘을 마티바 탑으로 끌고 가라는 개새끼의 지시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얘기를 우연찮게 궁인들의 입을 통해 들어서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개새끼 편인 줄 알았는데. 왜 거기서 마르스티엘을 감싸고 든 거지.

“노팅하면 간혹 그럴 수도 있다던데.”

페란스가 간을 보듯 이런 말을 던졌다.

키슬크가 입술을 꾹 문 채 고개를 저었다.

“저는 들어 보지 못했나이다, 전하. 노팅이 오메가의 몸에 몹시 힘든 일이긴 하다지만 각혈을 하다니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전하.”

“그럼 내가 뭘 잘못 먹었을지도. 키사드에서 독을 먹었었잖아. 그게 회복이 덜 된 걸 수도 있겠네.”

사실은 각인 반응 때문이었지만 키슬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전하의 안위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제 잘못이옵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페란스가 고개를 갸웃대며 다시 물었다.

“노팅 때문에 그런 꼴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서 왜 마르스티엘을 가두는 데는 반대했나?”

“그건 전하의 뜻이 아니라 생각했사옵니다.”

“내 뜻이 뭔데?”

키슬크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그러시지 않았나이까. 아만다리스 공이 키사드에서 전하를 납치하려 하였다고.”

“그랬지.”

“아만다리스 공은 전하께서 혼인하시는 걸 바라지 않는 것이옵니다. 전하의 혼인은 대관식을 의미하니까요.”

“……그것도 그렇지.”

“그래서 기회가 되면 전하의 약혼자를 없애려 하지 않을까…… 마티바의 지하라면 누가 죽어도 이상한 곳이 아니니 그렇게 만들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나이다.”

“아…….”

듣고 보면 꽤나 상식적인 말이었다. 머리가 굴러가는 작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큰 파문을 그리는 것은, 만일 키슬크가 아만다리스의 꼬리였다면 할 수 없는 발언인 탓이었다.

“너는……,”

“예, 전하.”

“내게 늘 아만다리스의 말을 따르라며 잔소리하지 않았나?”

“그건 전하께서 성년이 되기 전의 일이었사옵니다.”

“…….”

키슬크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제 눈에는 페란스가 젊은 치기로 왕이 될 기회를 내어주지 않는 아만다리스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건 몹시 위태로운 일이었다. 키슬크는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에게 왕관을 쓰는 법을 차근히 배우길 바랐다.

아만다리스가 진심으로 페란스를 위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선왕은 아만다리스에게 페란스를 부탁했고, 아만다리스는 죽음을 목전에 둔 선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제 피를 걸고 맹세했다.

페란스가 아만다리스를 잘 따르기만 하면 모두가, 모든 것이 평화로울 줄 알았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아만다리스 가문과 혼담이 오가는 인물을 상대로 고르셨지요. 그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습관이 된 반항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페란스는 전혀 아이 같지 않았다. 아만다리스 때문에 마르스티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르스티엘이기에 아만다리스와 척을 질 결심을 했다고 했다.

“그때 알게 되었나이다. 전하께서는 진작 장성하셨음을. 늙은 신만이 전하의 나이를 아직도 저 어릴 때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대체 뭐라고 해야 좋은 걸까.

키슬크의 말에는 아만다리스를 위해 꼬리를 흔들어 왔다는 의혹 같은 건 느껴질 틈이 없었다. 그저 선왕을 잃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걱정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는 마음만이 있었다.

“너는…… 그렇다면 마르스티엘을 반대하는 게 아닌가?”

“제 마음이야 그 어떤 가문의 알파를 데려다 놓아도 전하께는 부족하다 여길 겁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늦도록 마음에 맞는 상대가 없이 지내 오셨음을 압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그 시간만큼의 의미가 있는 자라 받아들였습니다.”

“…….”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페란스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키슬크를 바라보았다.

“너는…….”

“네, 전하.”

“너는…….”

페란스가 계속 말을 하지 못하자 키슬크가 눈을 끔벅댔다.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됐어.”

너는 내 사람이었나.

그 시절 동안 내내.

아만다리스에게 범해지는 밤을 네가 묵인한다 여겼던 것은 그저 내 착각이었나.

페란스는 십 년 전에 물었어야 했던 질문을 입 속으로 삼켰다.

이미 늦었다. 자신은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택했고,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아니, 어쩌면 늦지 않았다.

아만다리스를 없애고 마르스티엘과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은 훨씬 더 길 테니까.

“스카프를 제대로 골라. 근사해 보이도록.”

페란스는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키슬크는 웃으며 짙푸른색 실크 스카프를 골라 들었다.

“전하께서는 언제든 근사해 보이시지만, 오늘 의상에는 이것이 가장 잘 어울릴 듯하옵니다.”

“생각이 통했군. 나도 그렇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키슬크는 평소처럼 맵시 나게 스카프를 둘러 매듭 위로 스카프용 펜던트를 늘어트렸다.

“몹시 근사합니다, 전하.”

“마음에 들어. 수고했다.”

페란스가 키슬크의 어깨를 툭 쳤다. 키슬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이전까지는 없었던 일이라는 반증이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라 페란스도 내심 당황했다.

눈이 마주치고 시간이 잠시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키슬크였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전하.”

“그런……. 그런가.”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신의 미욱한 생각으로는, 약혼이 전하께 기분 좋은 날들을 가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 마르스티엘에게 감사해야겠군.”

키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나이다, 전하.”

“…….”

어쩌면. 어쩌면 늦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부터였다.

페란스는 거울 앞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 늦을지도 몰라.”

“다녀오십시오, 전하.”

떠나는 페란스를 키슬크가 배웅했다.

앞으로 펼쳐질 기분 좋은 날의 시작이었다.

그런 줄 믿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 * *

“손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레시토 호텔의 지배인이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고 어렵사리 답을 했다.

호텔 1층 응접실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페란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뭐, 마르스티엘이 호텔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바쁜 몸이었으니까.

그건 차치해도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만드는 지배인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혼자라고, 내가.

내 얼굴이 그렇게 흔해 빠진 것도 아닌데 미리 알아보고 방으로 안내해도 되잖아.

이러니까 그냥 마르스티엘을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기다리는 건 할 수 있었지만 손님 취급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 온다는 말 같은 건 없었겠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전하.”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방에서 기다리지. 안내해.”

“저, 전하.”

소파에서 일어서는 페란스를 향해 호텔 지배인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마주 잡았다.

“저어, 그것이 전하…….”

“왜?”

“블루와렌에서 오신 투숙객께서, 그 어떤 예외도 없이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페란스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나는 그 예외일 것이다.”

“저어, 그게……. 정말로 아무도……,”

“시끄럽군. 내가 누군지 내 입으로 말을 해야 알아들을 텐가?”

“저, 그게……. 그게 정말이지……. 일전에도 방문객을 방으로 모셨다가 제 목이 잘릴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하. 부디 제 목숨을 헤아려 주십시오…….”

페란스를 화나게 한 것은 방문객이라는 말이었다.

“방으로 안내했던 인간이 있었다고? 그게 누구였는데?”

“그, 그게…….”

지배인은 대답 대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순간 입을 잘못 놀렸구나 싶은데 이미 엎지른 물이라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부디 아량을……,”

“아량이고 나발이고. 어떤 인간인데 방으로 안내했는지 말을 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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