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
싸늘한 말투가 귀족들에게 없는 눈치를 챙기게 만들었다.
키사드 성으로 밀월을 떠난 줄 알았던 망나니 왕자는 그곳에서 알파 애인과 뒹굴다 온 게 아니라 전쟁을 준비해 왔다.
블루와렌의 막대한 자금력이 왕실에 새로운 힘이 되었다. 귀족들이 알지도 못하는 새 왕실에는 새로운 군대가 생겼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연륜의 용병대가 모인 군대는 명예와 기사도를 가장한 술놀음이나 할 줄 알았던 귀족들의 사병과는 존재감이 달랐다.
그사이 왕실 길드가 싹 바뀌었다. 귀족 출신이었던 길드장이 사라지고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천거했다는 평민 출신이 길드를 장악했다.
그 말은 장차 위스타드의 물자 유통 체계가 바닥부터 뒤엎어진다는 뜻이었다. 귀족들이 독점해 오던 사업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테고,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비교할 수 없는 블루와렌의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대관식을 치르는 것조차 귀찮아 성년을 훌쩍 넘겨서까지 왕자로 지냈던 페란스 카벨리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양손에 검과 창을 들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지닌 무한대의 자금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튼튼한 방패가 되었다.
위스타드의 대귀족들이 아직 이런 변화들을 한눈에 파악할 만한 안목이 없다 해도, 적어도 페란스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표정부터가 달랐다.
그저 왕실의 예쁘장한 인형인 줄 알았던 왕자가 지금은 아름답고 강인한 포식자로 보였다.
“내가 그대들을 보낸 건 협상을 하라는 것이었지, 멍청하게 들은 얘기나 전하라는 게 아니었다. 그럴 거였으면 사람이 아니라 앵무새를 보냈겠지. 그편이 더 빠르기도 할 테고 말이야.”
“…….”
졸지에 새보다 멍청한 존재가 된 귀족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협상을 어떻게 하는 줄은 알고들 있나? 아니면 내가 직접 가르쳐 줘야 하나?”
“…….”
쾅!
걷어찰 발판이 없어진 페란스가 발을 굴렀다.
“대답해.”
찔끔 겁을 먹은 대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결국 테르나텐이 입을 열었다. 이 중에서는 그가 입을 여는 게 예법으로나 신분으로나 맞았다.
“하지만 섭정의 뜻은 명확했습니다. 섭정은 그……,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의도적으로 전하께 접근해 위스타드의 왕위 계승자를 해하려 했으며,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말로만 떠드는 그 증거라는 게 있기나 한가? 대체 뭔데, 그게?”
“오로지 전하께만 전할 수 있는 증거라 하였습니다.”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아아. 그러니 결국 단둘이 만나서 밥이라도 한 술 뜨면서 얘기하자는 건가? 그 빌어먹을 인간이 아직도 나를 열두 살짜리 취급을 하는군.”
“전하. 그리 비꼬아 들으실 게 아니라……, ……섭정의 뜻은 명확하였고, 저희들은 거기서 타협의 여지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페란스가 얼굴을 구겼다.
저들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개새끼에 비하면 테르나텐은 순해 빠진 양이었다. 튼튼하고 보기 좋은 뿔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남을 들이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개새끼가 계속 마르스티엘의 출신을 걸고넘어진다면 대귀족들도 방법이 없었다.
법에 명시된 대귀족회의 의무는 카벨리카의 핏줄을 보호하는 것이었지, 나서서 심부름이나 하라는 게 아니었다.
무능해 빠진 인간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귀족의 본성에는 충실했다. 그들은 아만다리스와 마찬가지로 핏줄을 따질 수 없는 이방인을 못 미더워했다. 노예 출신의 상단주를 공동 통치자로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무슨 흠집이라도 뒤집어씌워 혼인을 반대하는 게 귀족으로서 부여받은 신성한 의무라 여겼다.
“아만다리스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전하께서만 보실 수 있다 하였습니다.”
“말장난은. ……하,”
페란스는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일단 증거를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중재는 그다음부터 가능하옵니다. 그것이 저희들의 뜻입니다.”
“…….”
결국 또 제자리걸음이었다.
퍽!
페란스는 바닥을 걷어차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귀족들이 움찔 놀라 페란스를 바라보았다.
“곧 새로운 카벨리카가 태어날 것이다.”
“전하, 그것이……, ……아?”
한 박자 늦게 임신 사실을 알아들은 귀족들이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굴려 댔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 아이에게 제대로 세례를 내리려면 그 전에 혼인식을 치러야지. 안 그래?”
“무, 물론이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카벨리카의 축복은 곧 위스타드의 영화이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뭐, 아이가 정말로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궁정의가 가능성이 높다 했으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아만다리스에게 전해. 시간 끌지 말라고. 내가 봐줄 수 있는 시간은 아흐레다. 대귀족회가 열리기 전까지 섭정직을 내려놓고 작위를 반납하라 해라. 그럼 영지를 제외한 재산은 몰수하지 않겠다.”
“전하. 그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너무 가혹한 처사이옵니다. 너그러움을 베푸소서.”
알고 있었다.
일부러 아만다리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가 반발해야만 군대를 써먹을 명분이 생겨났다.
죽이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각인으로 생겨난 이 빌어먹을 관계는 그의 목이 잘려야 제대로 끝을 낼 수 있었다.
죽일 것이다. 반드시.
“재산을 남겨 준다는데 어째서 가혹한 일이지? 지나치게 너그러운 처사라고 생각하는데. 프리아나 공은 그게 가혹한가?”
갑자기 질문이 돌아오자 프리아나 후작이 고개를 화들짝 들어 올렸다.
“시, 신께 물으셨습니까, 전하? ……그것이……. 신으로서는 가혹하다 말씀을 올려야 될 것 같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아, 그렇군. 공은 혹시 가시관이라는 이름의 고문대를 본 적이 있나?”
“……? 어, 없사옵니다, 전하.”
“십자가 모양으로 생긴 틀에 사람을 묶는 것이다. 거꾸로. 그리고 머리와 손목, 발목에 철구를 채우는데 이 철구 안에 가시가 박혀 있다. 사람이 거꾸로 매달리면 조금씩 아래로 처지게 되어 있어. 그럴 때마다 철로 된 가시가 살갗을 계속 파고들지. 아래로 처지는 만큼 살을 찢으면서.”
프리아나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전하, 그런……. 왜 그런 말씀을……,”
“아만다리스가 내 약혼자에게 가시관을 씌웠다. 가시관에 비하면 재산을 남겨 두는 일은 너무 관대한 처사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전, 전하……. 그, 그건…….”
프리아나는 이도 저도 못 하겠다는 얼굴로 말이나 더듬었다.
페란스가 프리아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도 비교가 안 된다면 공이 가시관을 써 보는 게 낫겠어. 직접 겪는다면 명확해지겠지.”
“저, 전하! 송구합니다!”
프리아나는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귀족들도 안색을 바꾸며 페란스와 거리를 벌리려 들었다.
설마 페란스가 이 자리에서 그들을 붙잡아 고문대에 묶지는 않겠지만, 저 표정을 보면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아만다리스에게 가서 전해. 나는 필요 이상으로 관대함을 베풀고 있다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관대함도 거두겠다. 그때는 일말의 자비도 없을 것이다.”
“전하.”
“물러가. 내일은 제대로 된 답을 들고 와라.”
“……명을 받았사옵니다.”
귀족들은 꺼질 듯한 한숨을 삼킨 채 알현실을 떠났다.
* * *
“젠장. 기분 잡쳤어.”
고리타분한 인간들을 상대했더니 기분이 찜찜했다.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협상 탓이었지만, 페란스는 귀족들의 생김새를 탓했다.
“늙거나 젊거나 봐줄 만하게 생겼어야지.”
그러니까 마르스티엘을 봐야겠다는 핑계였다.
마르스티엘은 오늘 아침 궁을 떠나 레시토 호텔로 돌아갔다. 아직 몸을 움직이는 게 무리인 건 맞았다. 하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마침내 아만다리스와 페란스 간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혹시라도 아만다리스 편에 설 대귀족들이 없도록 손을 써 놓을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마이카오 백작처럼 귀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일을 더 끌어내야 했다.
마르스티엘이 다음 목표로 잡은 게 수도의 비밀 도박장이었다. 귀족들 위주로 운영되는 도박장에 자금을 대고, 과도하게 돈을 빌린 귀족들을 압박한다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걸리는 계획이라는 점이었다.
마르스티엘은 그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외에도 군대 운영 등의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블루와렌의 발 빠른 정보력이 궁 안에서는 효력을 잃었다. 원활히 일을 처리하려면 마르스티엘은 그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 머물러야 했다.
고작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핑계를 댈 만큼 마르스티엘이 보고 싶어졌다. 결국 페란스는 시종장 키슬크를 불러 외출복을 준비하게 했다.
“……정말 애를 가진 건가.”
페란스가 거울로 제 모습을 훑다가, 배에 시선이 멎는 순간 중얼거렸다.
페란스에게 막 스카프를 대어 보던 키슬크가 잠깐 손을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맞사옵니다, 전하.”
키슬크의 반응에 오히려 페란스가 당황했다.
“아니, 무슨……. 티가 나나? 며칠이나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