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의사가 붕대에서 손을 떼자마자 페란스는 그를 제 몸으로 떠밀고 마르스티엘의 앞에 앉았다.
“어디 봐 봐. 아직도 아픈가?”
떠밀린 궁정의가 엉거주춤 남은 붕대와 연고를 챙겼다. 사실 손만 문제가 아니라 여기저기 상처들이 많아 치료를 더 해야 하는데 왠지 지금 둘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아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전에 보셨을 때와 비슷합니다.”
페란스는 궁정의가 붕대를 갈 때마다 와서 이렇게 참견이었다. 의사처럼 사람 몸에 대해 뭘 아는 것도 아니면서 약이 잘 안 듣는 게 아니냐, 왜 이 이상 낫질 않느냐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냐? 약이 형편없는 걸 수도 있어. 블루와렌에서 취급하는 약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에 궁정의가 페란스의 등 뒤에서 안색이 노래졌고, 마르스티엘은 작게 웃었다.
“지금 바른 게 블루와렌산 약입니다.”
“아, 그랬어?”
페란스가 입술을 삐죽댔다.
죽을 뻔하다 살아난 건 페란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눈에 띄는 외상이 없어서인지 일단 겉보기에는 그가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마르스티엘의 눈에는 아니었다. 그는 페란스를 다섯 걸음만 걸어도 곧 쓰러질 사람 취급을 했다.
“그런데 너무 자주 움직이시는 것 아닙니까? 치료를 마친 뒤 제가 전하께 가면 되는 일입니다. 일부러 오지 마십시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좀 움직여도 괜찮아.”
마르스티엘은 자연스럽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페란스의 허리를 붙잡아 제 팔에 기대게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렇다면서도 또 부축을 받아 오셨을 게 아닙니까.”
“지팡이보다 그게 낫더라고.”
“저는 좀, 거슬립니다.”
그 말이 의외였던지 페란스가 콧등을 구겼다.
“내가 오는 게 거슬린다고?”
그래 봤자 옆방이었다. 키사드에서 급하게 치른 약혼식 덕에 마르스티엘은 공식 약혼자의 신분으로 페란스의 옆 침실을 쓰고 있었다.
“아니요. 다른 알파에게 매달려서 오시는 게.”
“아니, 매달려서 오긴 누가……. 그리고 알파 아니야. 확인했어.”
“말만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젠장, 아니라고. 아만다리스가 근위대에 알파는 붙어 있지 못하게 했어. 내가 오메가니까.”
“그 인간이 했다는 게 짜증나긴 하지만 잘한 짓이로군요. 그래도 전하께서 오진 마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내가 내 약혼자를 보겠다는데 무슨 재주로 그걸 말리겠다는 거야? 됐어. 그럴 거면 빨리 낫기나 해.”
“지금 전하께서 몹시 귀여우신데, 그래도 짜증은 납니다.”
“귀엽다는 말 좀 집어치워. 내가 짜증나려고 하니까.”
“짜증내십시오. 그러나 저를 말리지는 못하십니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쩌면. 말했듯이, 귀여우셔서.”
“…….”
궁정의가 애써 터지려는 헛기침을 삼켰다. 눈하고 귀를 어디에 놔둬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 쌍의 사랑앵무 같은 인간들이었다. 대체 섭정이 왜 저런 분들을 두고 복수니 암살이니 하는 얘기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짜증나.”
페란스는 입술을 질겅대며 고개를 홱 옆으로 틀었다.
그러나 궁정의는 페란스의 양쪽 뺨이 미미하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싫으시진 않은 듯했다. 한 쌍의 사랑앵무 같은 사이니까.
“……다 끝난 거 아냐? 왜 거기서 그러고 있나?”
그리고 페란스도 궁정의의 표정을 읽었다.
무안해진 그가 엉뚱한 궁정의에게 날 선 말을 던졌다.
“아, 아직 돌볼 상처가 좀 더 남았습니다, 전하.”
“뭐야.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페란스는 괜히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일어섰다.
“다시 앉아. 제대로 해.”
“……네, 전하.”
궁정의는 제대로 하고 있었다는 항변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셔츠를 좀 내리겠습니다.”
손톱 다음으로 심각한 상처는 빗장뼈 위의 염증이었다.
페란스는 아직 보지 못했던 상처였다. 궁정의가 조심스럽게 마르스티엘의 셔츠 단추를 푸는 동안 페란스가 고개를 쭉 빼들고 힐끔힐끔 상처를 살폈다.
자신이 대신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근위대 알파가 어쩌고 하던 마르스티엘과 똑같은 인간이 될까 봐 참는 중이었다.
“곪은 건 다 짜냈습니다만 아직 나을 기미는 안 보이는군요. 당분간 물이 닿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쓰셔야겠습니다.”
궁정의가 끝이 휘어진 쇠막대로 상처에 남아 있는 염증을 긁어냈다. 그런 짓을 당하는 마르스티엘보다 페란스의 얼굴이 더 요란하게 구겨졌다.
“거긴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야? 인두로 지진 건 아닌 것 같고……. 살갗을 도려 낸 건가? 그것도 아닌데.”
“……. 모르십니까?”
마르스티엘이 한 박자 느리게 되물었다.
“몰라. 이런 건 처음 봐. 뭘로 해야 이렇게 되지?”
대답은 궁정의가 했다. 변명을 하자면 좀 전부터 너무 긴장해 있던 터라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물린 자국입니다.”
“……물었다고?”
“네. 물리고 난 뒤 치료할 시간을 놓쳐서 상처가 곪았습니다.”
“물다니. 이제는 고문할 때 그런 짓도 한다고? 대체 누가 저런 곳을……. ……젠장.”
말을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사람을 고문하려면, 굳이 저런 부위를 물게 하지는 않는다는 걸.
고문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이 물었을 것이다. 각인 반응이 오면 그 어떤 미친 짓이라도 하게 되니까.
“괜찮습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가 입을 다무는 이유를 빠르게 눈치챘다.
“……뭐가 괜찮아. 안 괜찮아.”
“괜찮습니다. 흉이라도 지면 더 좋을 테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얘깃거리가 될 겁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마르스티엘이 제 상처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네가 생긴 날의 기념 훈장 같은 것이라고 말해 줄 생각입니다.”
“무슨……. ……아이?”
페란스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박댔다.
“아이라고?”
“네. 노팅을 했으니까.”
“아니, 그게……. ……미친,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갑자기 무슨 아이 얘기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래도 그게……. ……아니, 아이라고?”
“네. 노팅을 했으니까.”
마르스티엘이 친절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팅을…… 아이가…… 물론 그게 임신을 하기 위한…… 그런 거라고 해도…… 아이가……?”
“네. 노팅은 임신을 위한 거라.”
“아, 아이가…… 아니, 갑자기 왜……. 노팅을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래도 아이가 갑자기……,”
페란스는 눈동자를 흔들며 계속 횡설수설해 댔다.
보통 남자 오메가들이 임신 앞에서는 저런 반응이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궁정의가 쐐기를 박았다.
저럴 땐 옆에서 계속 확신을 주어야 했다. 아니면 계속 임신을 부정하는 기간이 길어지는데, 그건 임부나 아이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노팅을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아이가 들어섰다고 말하기에는 이른 시기입니다만, 이상형질의 특성상 노팅이 있었다면 임신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안전한 착상을 위해 넉넉히 일주일 정도는 관계를 갖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하라고 해도 못 해. 그땐 진짜 더럽게도 아파서 어떻게 되는 줄 알았……. ……아, 잠깐. 기억이 났어.”
페란스는 노팅하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가 찢어지도록 아팠고 마르스티엘이 비 오듯 땀을 쏟아 냈다. 끔찍하도록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이었다.
“그게……. ……아이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면 그 끔찍하던 순간이 어쩐지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아이란 아주 굉장한 존재였고, 그러니까 그에 걸맞은 대가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둘러야겠군요. 약혼식이 아니라 혼인식을.”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을 조용히 끌어와 입을 맞췄다. 페란스는 붕대가 감긴 손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개새끼부터 죽이고.”
“동감입니다.”
“…….”
궁정의가 또 움찔했다.
다행히 치료가 대강 끝나 나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궁정의는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왕자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대귀족회가 아흐레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 * *
페란스는 이번 대 섭정의 지위를 종식한다는 공식 입장을 대귀족회에 전했다. 아만다리스 또한 자신이 벌인 일이 정당했음을 신께 맹세한다는 장문의 서한을 대귀족회에 보냈다.
그전까지 대귀족회란 유명무실한 사교모임 수준이었지만, 섭정과 왕실이라는 왕국의 두 축이 서로 등을 지자 본의 아니게 중재 역할을 맡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대귀족회가 아니면 그 역할을 대신할 곳이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가장 큰 문제는 대귀족회가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왕명과 성문법을 논의하는 대신 사교를 가장한 오메가 난교 파티에나 더 익숙한 인간들이었다. 영지에서 나오는 풍요로운 소득으로 이제껏 아무 걱정 없이 놀고먹던 인간들에게 갑자기 너무 무거운 역할이 주어졌다.
그들은 중재라는 말을 사전에서나 들어 봤다는 듯, 근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양쪽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아무런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쾅!
이번에도 이틀 전처럼 시원찮은 답변뿐이었다.
페란스가 의자 발판을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간 발판이 테르나텐 공작의 발치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
테르나텐을 비롯한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이틀 전에도 들었는데.”
페란스는 발판이 사라진 의자에서 다리를 꼬았다.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괸 자세는 비딱했고,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왜 자꾸 같은 말을 듣게 만드는 거지? 그대들은 똑같은 말밖에 할 줄 모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