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다시 입에서 단내가 났다.
6층까지 기다시피 올라갔던 계단을 도로 내려왔다. 마르스티엘이 있는 곳은 지하의 고문실이었다. 섭정이 그를 지하로 보냈다는 걸 마침 교대를 위해 온 다른 경비가 알려 주었다.
그 얘기를 들은 뒤 다시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도착했다.
지하는 입구부터 아예 구분되어 있었는데, 위층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공기부터가 달랐다. 단순히 눅눅하고 퀴퀴한 게 아니라 음울했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시체들은 지하의 하수 시설을 통해 곧장 해치 바닥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었다.
“문 열어!”
격자로 짠 지하 고문실의 문이 보이자마자 페란스가 소리를 질렀다. 얼굴을 반만 가리는 투구를 쓴 고문실의 경비들이 어리둥절해하며 페란스를 바라보다가, 위층의 경비가 손짓 발짓으로 어서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내자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으으으응…… 쿵!
두툼한 쇠 격자문이 느리게도 올라갔다. 페란스는 사람 몸이 통과할 틈이 나오자 체면도 잊고 허리를 굽혀 지하 고문실로 들어갔다.
“내 약혼자는?”
페란스가 숨 가쁘게 물었다.
“……이, 이 층입니다.”
지하 2층이라 계단을 한 번 더 내려가야 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1층보다 2층이 더 끔찍했다. 1층도 기괴한 고문 도구들이 늘어서 있어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는데 2층은 본격적으로 피를 보는 곳이었다.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페란스는 계단을 내려가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마르스티엘을 이런 곳에 처박은 아만다리스를 제 손으로 목 조르고 싶었다.
“마르스티엘!”
1층보다 훨씬 어둡고 음습한 2층에 발을 딛는 순간 페란스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2층을 채운 것은 썩어 가는 비린내였다. 마티바 탑의 지하 2층에 죄수가 들어온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지만 위스타드의 역사와 더불어 차곡차곡 쌓여 온 피의 흔적은 사라지지도 않고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싶은 이곳에 마르스티엘이 있었다. 십자가 모양을 딴 넓적한 판자에 거꾸로 매달린 채.
머리와 손목, 발목에는 안으로 침이 있는 철구가 채워져 마르스티엘이 미세하게 몸을 비틀 때마다 살갗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툭, 투둑.
철구의 침이 박힌 곳에서 핏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그렇게 고인 피가 바닥을 흘러 제 발 밑을 적셨다.
미칠 것 같았다.
“뭣 하고 있나! 당장 저걸 풀어!”
“네, 네……! 네, 전하!”
페란스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자 경비들이 움직였다. 페란스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문대 앞으로 다가갔다. 마르스티엘은 눈을 감은 채 미동하지 않았다.
“저, 전하. 잠시만 비켜 주십시오…….”
페란스가 동선을 방해해 마르스티엘을 내리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경비들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페란스가 움직이지 않자 할 수 없이 위층의 경비가 페란스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전하.”
“……죽었나?”
“네? 아니, 아닙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움직이질 않는 거야.
페란스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던 말을 씹어 삼키는 사이 경비들이 마르스티엘을 묶은 사슬을 전부 풀었다.
“이, 이젠 어떻게 할까요, 전하?”
“…….”
길쭉한 몸이 축 늘어져 고문대에 반쯤 기댄 채였다.
본성으로 옮기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페란스는 그대로 마르스티엘의 앞에 주저앉았다.
평소보다 훨씬 창백해 보이는 뺨에 손을 댔다. 얼굴이 차가웠다. 페란스가 알기로 마르스티엘은 한 번도 이렇게 차가웠던 적이 없었다.
“죽으면…… 안 돼. 죽음은 허락하지 않겠다.”
“…….”
“눈을 떠. 죽으면 안 돼. 네가 나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어.”
“…….”
“눈을 뜨라고!”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을 붙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하?”
기적처럼 마르스티엘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아…… 아……!”
탄성을 내뱉은 페란스가 허겁지겁 그의 얼굴을 쓸었다.
“정신이 들어? 괜찮나? 내가 누군지 알겠어?”
마르스티엘이 입술 새로 피식 웃었다.
“제가 전하를 못 알아볼 일은 없습니다.”
“네가 너무 차가워. 너무 창백해.”
“피를 좀 흘려서 그럴 겁니다. 그 외에는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 말을 마르스티엘이 했다.
“전하께서는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으십니다. 옷차림새를 뵈니 방금 깨어나신 모양이로군요. 추우실 텐데 망토라도 걸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마르스티엘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한쪽 어깨로 흘러내린 잠옷을 끌어 올렸다.
페란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르스티엘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너는! 네가 지금 어떤 꼴을 하고 있는데!”
“전하께 보이기 썩 좋은 꼴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나가고 싶군요.”
그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열 손가락이 죄다 피투성이였다.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을 당한 듯했다.
그걸 보는데 제 손톱이 죄다 뽑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전하, 손을 주십시오.”
먼저 몸을 일으킨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죽여 버리겠어.”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손을 잡는 대신 이를 부드득 갈았다.
피투성이가 된 저 손가락에 대고 하는 맹세였다. 반드시 아만다리스를 죽일 것이다.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래야 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모두를 위해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르스티엘은 덤덤히 말을 붙였다.
미칠 듯이 뜨겁던 머릿속이 비로소 식었다.
페란스는 이를 질근 물고 마르스티엘이 내민 손을 잡았다.
손이 떨리는 만큼 마르스티엘을 붙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만다리스는 카벨리카 왕실에 풀린 독사였다. 이제껏 물리지 않았다고 해서 계속 놔둘 수는 없었다. 독사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그 누구라도 물 수 있었다.
아만다리스가 문 것은 하필이면 마르스티엘이었고, 페란스는 그 사실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섭정 아만다리스가 페란스 왕자의 약혼자를 감옥에 가둬 고문했다는 소식과 페란스가 직접 마티바로 달려가 약혼자를 꺼내 왔다는 소식이 동시에 수도를 번졌다.
분노한 페란스 왕자는 섭정의 권한을 종식할 것을 공언했고, 아만다리스가 이에 반발하자 작위를 반납하라는 또 다른 왕실령이 이어졌다.
아만다리스가와 카벨리카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흉흉한 뒷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 * *
“멍청했다. 출궁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지 말았어야 해.”
페란스가 이를 갈았다.
그럴 때마다 마르스티엘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던 궁정의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어.”
“지난 일입니다. 자책은 필요 없을 줄 압니다.”
“그래서 개새끼가 자기 집에 숨어 있을 시간을 준 거잖아.”
“길게 보십시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입니다.”
마르스티엘의 손을 볼 때마다 페란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노팅 후 몸 상태는 말로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페란스는 입으로도, 아래로도 피를 쏟아 냈다. 의식은 없었고 깨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꼴이 됐으니 노팅을 했다는 마르스티엘의 말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심하던 찰나 아만다리스가 반나절 만에 출입 금지령을 깨고 입궁했다. 그는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의도적으로 해쳤다고 결론을 내린 뒤 감옥에 가두었다.
당장 섭정을 말릴 수 있는 인물은 궁에 없었다. 페란스는 쓰러졌고, 섭정은 왕권을 대행하는 존재였다.
대귀족회를 앞두고 있던 아만다리스는 지금이 일을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페란스가 쓰러진 틈을 타 궁을 장악하고 마르스티엘이 벌여 놓은 판을 뒤엎으려고 들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페란스가 아만다리스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페란스가 깨어났을 때 아만다리스는 알현실을 찾아온 대귀족들과 밀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페란스가 예상보다 빨리 깨어났기도 했고, 대귀족들 앞에서 출궁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 터라 아만다리스는 더 손을 써 볼 것도 없이 궁을 나서야 했다.
그게 안타까웠다. 아만다리스가 마르스티엘을 지하 고문실에 데려다 놓은 사실을 알았다면 곱게 내보내는 게 아니라 같은 고문대에 묶어 두라고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래서 일이 좀 꼬였다.
아만다리스에게 왕족의 약혼자를 증거 없이 죄인으로 몰아 고문한 일을 두고 섭정직을 그만둘 것을 요구했지만 아만다리스는 뻔뻔하게도 기존의 주장을 고수했다.
지금 아만다리스는 공작저에 틀어박혀 사병으로 빈틈없이 정문을 막고 있었다. 그에게서 섭정직을 내려놓겠다는 항복을 받아 내려면 물리적인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만다리스를 궁에 억류했다면 아무래도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왕실에서 귀족을 핍박하는 모양새가 됐을 테니. 하지만 아만다리스가 사병을 내세운 지금은 다릅니다. 일개 귀족이 왕실의 권한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셈입니다. 아만다리스의 편을 들 귀족들도 한 번은 다시 생각을 해 보게 될 겁니다.”
마르스티엘이 옳았다. 아만다리스가 섭정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반역이라 불러야 했다.
페란스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분해.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