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페란스가 홱 등을 돌렸다.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지금은 그에게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느끼는 이 음울한 절망감은 상상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고 쓰라렸다.
그에게 자신의 위치는 이것저것 다 떼고 저 아래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거대한 좀벌레처럼 마음을 순식간에 갉아먹었다.
쾅!
“전하.”
페란스의 몸이 빠져나갈 만큼 문을 열기도 전에 마르스티엘이 그 문을 도로 닫았다.
문과 그의 팔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손을 치워. 명령이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퍽!
페란스가 주먹으로 문을 후려쳤다. 어쩌면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후려치는 쪽이 나았을 것이다. 손이 더럽게도 아팠다.
마르스티엘이 한 손으로 페란스의 주먹을 감싸 쥐며 말했다.
“네.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퍽!
결국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갈겼다. 반듯한 턱이 훌쩍 돌아갔다. 뺨에 남은 손자국이 붉었다. 각인 반응이 아닌데도 시야가 어지러웠다.
“말을 하지 마! 어차피 그 말도 거짓일 테니!”
“……제가 전하께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까?”
“독을 탄 건 덩치였잖아! 너는 대체 내 눈을 어디까지 가릴 수 있으리라 믿는 건데! 내 마음이 네게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날 기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그게 네 본심인가?”
“전하.”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페란스가 몸을 비틀었다.
“놔! 손을 치우라고 했다!”
“알레프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놈 말고 누가 있어! 누가 네게 포도주를 가져다주었는데!”
“알레프는 아닙니다. 알레프가 설령 전하께 독을 먹일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 독을 함께 먹는 사람이 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해약을 가지고 있었잖아! 정확히 일 인분을!”
“해약을 가지고 있던 건 메넌이었습니다. 알레프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뭐……? ……아니, 믿을 수 없어.”
“진실입니다.”
마르스티엘은 양손으로 페란스의 얼굴을 쥐고 눈을 마주치게 했다.
“전하. 저를 봐 주십시오.”
그리고 페란스는 상처받은 표정을 감출 자신이 없었다.
“싫어.”
“전하. 그 순간 제가 생각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해약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걸 전하께서 드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말을…… 돌리지 마라. 그렇게 네 거짓을 포장하려고 들지 마. 속지 않을 것이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 순간 제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페란스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속지 않는다고 했잖아!”
“제가 가지고 싶은 것은 살아 계신 전하였습니다. 제가 마신 독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이 안도였습니다.”
“그런…… 그런 말을 잘도,”
“알레프는 아닙니다, 전하. 알레프가 독을 탔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또다시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아닌 건가? 정말로?
그럴 수도 있나? 아만다리스가 그렇게까지 발 빠르고 유능했다고?
혼란스러웠다. 후작이 한 짓이 아니었다. 아만다리스는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고 했다.
가장 말이 되는 범인은 알레프 하나였다. 그런데 아니라고 했다. 어디서부터 뒤엉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게 전하의 목숨과 저울질할 수 있는 건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해약 없는 독을 드신다면 저도 같은 것을 먹겠습니다.”
“…….”
혼란 속에서 단 하나 선명한 것은 마르스티엘이 지금 내뱉은 말이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무거우리라는 것. 심지어 그의 목숨보다 더.
페란스가 비로소 눈을 뜨고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그게…… 진심인가?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인가?”
마르스티엘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처받은 사람처럼.
“왜 그걸 모르시는 겁니까. 전하께서.”
“나는…… 아니, 나는 몰라. 너는 늘……,”
“제가 전하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너는 늘…… 여유롭잖아. 너는 늘…… 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눈이 머셨군요. 제가 어디를 봐서 그랬다는 겁니까?”
“아니야. 너는 늘…… 한 발짝 물러섰잖아. 마치 그 정도 선은 지켜야 한다는 것처럼. 늘 나만 네가 곁에 있기를 애걸하고 있었잖아.”
“헛소리는 작작 하십시오.”
마르스티엘의 눈이 새파래졌다.
“설마 제가 전하를 거절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를 물고 인내하던 그 순간들을?”
“그럼…… 그건…… 뭐였는데.”
페란스의 얼굴을 쥔 마르스티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짓눌리는 피부가 아팠다.
“다른 알파에게 각인한 전하를 두고 발정하는 제가 정상일 것 같습니까? 끝내 저를 거부하는 페로몬에도 감지덕지 헐떡대는 제가 이상한 적은 없으셨습니까? 제가 왜 최음제 없이도 매번 발기해 있는지 모르셨습니까?”
“그……,”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에게 자신은 오메가도 아닐까 봐 매번 두려웠다. 그가 늘 묻히고 오는 알레프의 페로몬이 매번 끔찍했다. 자신의 망가진 페로몬에 비하면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낙원처럼 달겠다 싶어 자괴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지 않은 게 되어 버렸다.
그걸 자신이 놓치고 있었다.
“너는 그게…… 그럼 네가 나를……. ……해서라는…… 그런 말이야?”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가까이 가져왔다. 입술이 달라붙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제가 아는 건, 전하를 볼 때마다 발가벗겨서 전부 핥아먹고 싶다는 겁니다.”
“…….”
할 말을 잃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하나밖에.
“그럼 그렇게 해.”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스카프를 콱 움켜쥐었다.
“벗겨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 몸이 어쩌느니 핑계 대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 말로만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몸으로 증명해 봐.”
“후회하지 마십시오.”
마르스티엘은 그대로 페란스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질근 전해져 오는 통증에 페란스는 눈을 꾹 감았다.
“절대로.”
후회라니.
안 해. 절대로.
마르스티엘이 입술을 벌렸다. 아만다리스가 했던 것처럼 입 속으로 페로몬이 쏟아져 들어왔다.
* * *
퍽!
강렬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시점에 이르렀지만 강렬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간 했던 것은 장난처럼 여겨질 만큼 몸이 너덜너덜했다. 각인 반응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하으, 으…… 하, 헉!”
퍽퍽퍽!
제 몸을 두들기는 게 성기가 아니라 불쏘시개 같았다.
페란스는 팔다리를 늘어트린 채 거칠게 흔들리고만 있었다. 시트가 토사물로 범벅이 되자 마르스티엘이 저를 안고 카우치로 옮겨 온 것은 기억이 났다. 성기를 아래에 박은 채 몸이 옮겨지는 게 낯설어 진저리를 쳤었다.
두통이 머리를 딱따구리처럼 쪼아 댔다. 이러다 미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끔찍했는데, 그럼에도 간간이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나, 좀……. 그, 어서…….”
고개를 틀고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그게 유일한 안식이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게 개새끼가 아닌 마르스티엘이라는 게.
“예쁩니다, 전하.”
마르스티엘은 한 짝씩 움켜쥐고 있던 페란스의 허벅지를 놓고 몸을 기울였다. 몸 안에는 불덩이 같은 성기를 꽂은 채 그가 제 손으로 입가에 묻은 더러운 얼룩들을 닦아 내 주었다.
“나…… 흣!”
그의 손이 닿자 페란스가 울컥 신물을 토해 냈다. 마르스티엘은 그때까지 단추가 뜯긴 채 팔이 꿰어 있던 셔츠를 벗어 다시 더러워진 얼굴을 다시 닦았다.
왠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더러워진 셔츠가 개같았다. 고개를 돌리면 코를 찌르는 시큼한 오물 내가 역겨웠다.
“너는…… 이래도…… 좋나?”
“네.”
어떻게 그런 대답이 들려올 수 있는 걸까.
“나는 싫…… 싫은……,”
“저에 비하면 전하는 아직 덜 미치신 모양입니다.”
“네가, 왜……,”
마르스티엘은 소리 없이 웃으며 몸을 내려 페란스의 어깨 살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전하께서 세상만사가 다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연회장에 들어서시던 그 순간부터.”
“아…… 나, 나를…… 그때.”
“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마르스티엘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아니, 어쩌면 알아서 하는 대답일지도 몰랐다.
너는 그때부터 내가 갖고 싶었나.
안 된다고 생각했을 그때부터.
“전하.”
어깨의 잇자국에 입술을 문지르며 마르스티엘이 속삭였다.
“왜…… 컥!”
더 이상 섞인 것도 없는 묽은 물을 내뱉는 페란스를 마르스티엘이 다정한 연인처럼 바라보았다.
“페로몬을 풀어 주십시오.”
“아, 안……. 그건 네가…….”
“전하의 전부를 느끼고 싶습니다.”
“아, 하……. 하아…….”
페란스는 한숨이면서 웃음이기도 한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이 모든 게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각인 반응이 몸을 쥐어짜는 와중에 그와 죽을 것처럼 몸을 섞는 자신도 이상했고, 토하고 울부짖는 꼴을 보면서도 아랫도리를 세워서 박아 대는 마르스티엘도 이상했다.
전부 다 이상하고 전부 다 엉망이었다. 쾌락이 없는 섹스는 더럽고 괴로울 뿐이었다. 이 행위는 자해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누가 제 심장을 솥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평생 바라 왔던 게 지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는 마르스티엘을 더럽게도 사랑했다.
끔찍하게 원하고 빌어먹게도 욕정했다.
이러다 미쳐도 좋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