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전하. 위험합니다.”
근위대 수석 기사는 페란스를 말리는 쪽이었다.
“넷이 다라며? 너희들은 열 배쯤 되지 않나? 지금 그걸 위험하다 하는 건가?”
“대포를 준비해 왔습니다. 또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그럼 몸수색이라도 해. 네 명이 그렇게 겁나거든 몸이라도 묶든가. 외부 알현실을 이용하겠다.”
“전하.”
“데려다 놔. 저러는 걸 어떻게 무시하라는 거야.”
페란스가 수석 기사를 손짓으로 내보냈다.
다행히도 마르스티엘까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진 않았다.
“저도 곁에 있겠습니다, 전하.”
“아니. 그건 안 돼. 카이넨 웨이모스가 원한 건 독대였다.”
호위로 근위대를 두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마르스티엘은 예외였다. 정식 약혼을 통해 그는 왕실의 일원이 될 것을 약속받았다. 그를 포함하면 더는 독대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메넌이라도 곁에 두십시오. 근위대보다 쓸모가 있을 겁니다.”
“그건 괜찮아.”
마르스티엘은 의자에 앉은 페란스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으로 앉았다. 양손이 얼굴을 쥐었다. 무표정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얼굴을 쥐는 손길이 유난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워 그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의로 대하지 마십시오. 독을 품고 왔을 겁니다.”
페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 아비가 너와 내게 독을 먹였고, 나는 그 아비를 교수대에 보내려 하고 있지. 멀쩡한 정신으로 독대를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주하셔야 합니까?”
“그런 사이니까. 마주 볼 필요도 있을 거라고 보는데.”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내 걱정은 빨간 머리한테 시켜. 그러라고 옆에 두라는 게 아니었나?”
“만에 하나 오늘 다쳐서 오시기라도 한다면 전하는 침대에만 계셔야 할 겁니다. 제가 일을 다 끝내는 그날까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갔다.
“네가 그렇게까지 날 걱정할 줄은 몰랐는데.”
“이참에 아십시오. 심장이 저릴 만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건 꽤……. ……아니야.”
……심장이 저리는 건 내 쪽인데.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각인 반응이 약해지며 새롭게 알게 된 것 중 하나였다.
자신은 마르스티엘의 신호 하나하나에 예민했다. 그가 눈빛을 조금만 바꾸거나 시선의 방향을 돌리면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변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혹시라도 제 페로몬 향이 역해진 건지, 저도 모르게 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래서 제 몰골이 역하게 보이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리고 진심을 말하는 데 계속 애를 먹었다.
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걸 알게 돼서, 나는 지금 심장이 저리다.
이런 말을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지금 내 눈에 정신이 나갈 것처럼 근사해 보인다는 말도, 나는 너처럼 눈을 사로잡는 인물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는 아닌 것 같아.
마르스티엘은 자신처럼 초조해 보이거나 등신처럼 굴지 않았다. 한결같이 다정하고 사려 깊고 정중했다.
나는 왜 그런 것도 무서운 걸까. 내 마음만 혼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것 같아. 너는 아닌데. 너는 그대로인데.
“뭐가 아닙니까?”
“별것 아니야. 묻지 마라. 지팡이를 갖다 줘.”
“그 전에 약속하십시오. 절대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상형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얼마나 다른 걸까.
그걸 알고 싶어서 속이 타들어 갔다.
마르스티엘의 부축과 함께 페란스는 외부 알현실로 향했다.
* * *
카이넨 웨이모스는 놀라울 정도로 전의가 없었다.
그는 두 팔이 묶인 채 근위대에게 끌려왔다. 세 명의 가신들은 마찬가지로 몸이 꽁꽁 묶여 창고에 갇혀 있다고 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지 말해 봐. 듣겠다.”
페란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위대에 의해 페란스의 발치에 무릎이 꿇린 카이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웨이모스 후작을 빼어 박은 회색 눈이 기묘했다. 텅 빈 것 같은데 형형했다. 그게 다 포기했지만 단 한 가지는 포기하지 못한 자의 눈이라는 것을 페란스는 아직 몰랐다.
“……목숨을 건지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다 쉬어 있었다. 눈가에는 짓무른 흔적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난 가문의 비극을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야 했을 것이다.
“나는 후작의 아들들까지 죽이겠다고 하진 않았다. 네게는 추방령을 내릴 것이다.”
“그냥 이 땅에서 죽겠습니다, 전하. 부친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아 주십시오.”
“……내게 할 말이란 그것이었나?”
“아닙니다, 전하.”
카이넨은 수분이란 수분은 다 쏟아지고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키사드는 웨이모스가의 영지 안에 있는 성입니다. 부친께서는 늘 그것을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키사드의 시종장이 된 것을 더없는 영광이라 여기며 충심으로 성을 가꾸셨습니다. 키사드에는 선왕비께서 전하를 회임 중이셨을 때 즐겨 찾으시던 루테이아 꽃이 매년 피고 있습니다. 키사드 궁의 후원은 위스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루테이아 꽃을 피우는 장소입니다. 부친께서는 전하께서 이곳을 찾으실 때 언제라도 루테이아 꽃을 보실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오래 피워 두라며 정원사에게 신신당부를 하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후작이 내게 보내온 술에 독을 탔다.”
“음독하신 전하께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제 입으로 하려던 말은……,”
거스러미가 떨어져 나간 입술에서 어느샌가 피가 흘렀다. 카이넨은 반쯤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키사드 성에 루테이아 꽃이 피는 한, 웨이모스 가문에는 카벨리카의 피를 이은 분께 독을 올릴 이유가 없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개소리였다.
포도주를 보내온 것은 후작이 맞았다. 페란스는 그 터무니없이 노골적인 방식이 아만다리스가 마르스티엘의 목숨 따위 제 수중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과시하려는 이유였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후작은 아만다리스의 편을 들었다.
페란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콱 움켜쥐었다.
“내 약혼자는 카벨리카가 아니니 상관없다는 말을 하려 함인가? 너는 고작 그따위 변명을 주워 삼키려고 네 목숨을 걸었나?”
“독은 포도주에 담겨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저는 아니라고만 하던 후작을 대신해서 정황을 곱씹은 이는 카이넨이었다.
“연인에게 보내는 포도주를 둘 중 하나만 마시리라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전하.”
“그래서 둘 다 독을 먹었지. 후작이 무얼 의도했든, 내가 독을 먹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압니다. 그래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죄를 벗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죽겠습니다. 하지만 만일, 아주 먼 훗날에라도…… 이 일이 누명이었음이 드러난다면, 부디 키사드 궁의 루테이아 꽃을 기억해 주십시오.”
퍽!
말을 마친 카이넨은 알현실 바닥에 제 이마를 찧었다.
그 어떤 저항의 의지도 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카이넨은 고개를 들 생각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해 주시면 죽어서도 카벨리카의 이름 앞에 충성할 것입니다.”
“…….”
분노를 대신해 움켜잡은 팔걸이에서 위태로운 소리가 울렸다.
알 수가 없었다.
저게 정말 독을 탄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인지.
내가 한 짓이 아니라던 아만다리스의 절박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이 후작과 비슷해 보였다는 것도.
어째서 후작은 좀 더 그럴싸한 변명을 준비해 두지 않았던 걸까. 그 독을 먹은 이상 깔끔하게 죽으리라 계산을 해 두었던 걸까. 설마 해약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걸까.
후작은 잠을 자다 말고 불려 왔다. 해약을 먹고 깨어난 페란스가 하얗게 질려 손끝을 떠는 것을 보고 도리어 식은땀을 빗물처럼 흘려 댔다.
마침 딱 일 인분의 해약이 있었다. 마르스티엘은 그것을 자신에게 양보했다. 덕분에 페란스는 혼자 멀쩡한 정신으로 그가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해약은…….”
페란스는 느닷없이 몸을 돌려 메넌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전하?”
“해약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거지? 무슨 독인 줄 알고?”
“……독에 관해서는 알 만큼 압니다. 블루와렌보다 다양한 독을 취급하는 곳은 없으니까요. 단주님을 모시려면 독에 무지할 수 없습니다.”
독에 익숙하다는 말은 마르스티엘도 했다.
포도주가 많이 남아 있었으니 독의 종류를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후작이 독을 보낸 게 아니라면. 후작은 자신이 보낸 포도주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면.
만일 독을 탄 사람이 따로 있는 거라면.
다들 거기에 속고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불길한 예감처럼 누군가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독을 먹일 만큼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마침 있었다. 늘 제 곁에 있으며, 자신이 먹고 입는 모든 것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알레프라면 할 수 있었다.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포도주에 독을 섞을 수 있었다. 일 인분의 해약은 마르스티엘의 몫이 아니었을까. 설마 마르스티엘이 해약을 자신에게 양보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카이넨 웨이모스를 가둬 둬라. 수도로 압송한다.”
“예, 전하.”
근위대가 허리를 숙여 보이자 페란스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메넌이 소리 없이 몸을 움직여 그가 맡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
순간 이가 갈렸다. 지팡이를 짚는 손에 힘이 울컥 들어갔다.
손잡이에 보석이 줄줄이 박힌, 끔찍하게 화려한 지팡이가 딱 지금 제 처지였다.
제 몸을 치장하는 것들은 이렇게나 화려하지만 정작 그는 혼자서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제 몸의 절반은 아만다리스가 쥐고 있었다. 제 왕관의 절반과 함께.
더는 안 돼.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해서 계속 의자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나설 일이 없다고 해서 이 한적하고 풍경 좋은 시골 성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가서 마르스티엘에게 전해.”
쿵!
페란스는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오늘, 귀성한다고.”
“……갑자기요?”
“전해. 네 역할은 내 뜻을 묻는 게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전하.”
주제 파악을 했는지 메넌이 입을 다물고 사라졌다.
밀월이 끝났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