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메넌이 그 이상을 알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수가 읽혔으니 메넌은 거기서 입을 딱 다물 것이다.
“내기할까?”
“……아니, 뭘요?”
“덩치가 마르스티엘을 형제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
“사람 마음을 두고 내기라니. 왕족인 걸 떠나서 너무 악취미 아닙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아니, 말도 안 된다니까요. 절대 그럴 리가……. ……하,”
메넌이 한숨을 뱉어 냈다.
“잘못 보신 겁니다. ……내기에는 뭘 거실 겁니까?”
“너는 뭘 걸 건데?”
“전하께서 이기시면 뭐든 하나 시키시는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단주님께는 비밀로.”
“나쁘지 않군. 너는 뭘 원하나?”
“무얼 말해도 되는 겁니까?”
“일단 말해 봐.”
“……그렇다면. 알레프의 목숨을 보장해 주십시오. 만일 전하께서 하신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 더럽게도 끈끈한 사이라 이거지. 불쾌해.”
“네, 전하?”
페란스가 격의 없는 말을 내뱉자 당황한 건 메넌이었다.
“알겠다. 그렇게 하자고.”
“네. 그런데 전하가 지실 겁니다.”
“웃기지 마라. 내가 질 게 뻔하면 왜 그런 바보 같은 대가를 요구하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랬겠지. 이미 내가 이겼어.”
“그건……. 만일을 위한 겁니다, 만일을요.”
“그렇게 우겨 보든가.”
“…….”
메넌은 말대꾸를 참는 대신 입술을 실룩였다.
이러나저러나 무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란스는 메넌에게 제단 가운데 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케이크는 저기에 올려놔.”
“……네, 전하. 두 분의 정식 약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아주 반듯하게 올려놓겠습니다.”
“망치면 죽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케이크를 마지막으로 준비가 모두 끝났다.
페란스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색 성장을 한 차림으로, 흰 망토에는 카벨리카의 상징인 붉은 백합 모양 펜던트를 달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아직 몸이 시원찮아 지팡이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이제 마르스티엘이 등장할 차례였다.
* * *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니, 당황하는 건가.
파티오를 둘러본 마르스티엘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니면 싫어하는 건가.
제단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심정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끓는 솥 앞에 손발이 묶인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올 장소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단 앞으로 다가온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페란스가 뒤뜰로 부른다는 얘기에 그대로 나온 마르스티엘은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건 알레프도 마찬가지였다. 알레프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건드리면 탁탁 소리가 날 것처럼 보였다.
“준비는 필요 없어. 가만히 서서 사제가 하는 말이나 좀 들으면 끝날 일이다.”
“그래도 제 약혼식 아닙니까.”
“도망칠 생각이 없으면 그걸로 됐어.”
페란스도 마르스티엘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해가 지고 파티오는 온통 등불로 가득했다. 색을 입힌 크리스털 장식 등은 안에 넣은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색색의 빛을 더해 이 밤은 몹시 아름다웠다.
“네가 내 것이라는 증거를 하루라도 빨리 남기고 싶었어. 진짜 약혼식은 수도에서 제대로 치러 줄게.”
“그런 거라면 성급하게 결정하시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나는 급했거든.”
아만다리스의 셋째 오메가 아들이 혼담과 함께 마주했던 마르스티엘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매혹적인 페로몬을 지닌, 눈이 마주치면 잠깐 심장이 굳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알파. 자신은 각인 반응이 느려지고 난 지금에서야 보게 된 마르스티엘을 다른 오메가들은 진작부터 보고 있었다.
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쉽군요.”
마르스티엘이 다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뭐가?”
“오늘이 약혼식이라는 게.”
“오늘이 어때서?”
“기념 섹스를 할 수가 없을 테니까요.”
“…….”
페란스의 뺨이 미미하게 붉어졌다.
방금 전부터 사제가 목이 터져라 약혼 축성을 읊고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마르스티엘이나 페란스나 둘 다 신경도 쓰지 않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가엾게도 사제는 계속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으로 신께 고하노니, 위스타드의 페란스 로사델 카벨리카. 그리고 블루와렌의 마르스티……. ……? 이, 이름이……?”
사제가 당황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름이 잘렸습니다만……?”
“그냥 해.”
“시, 신께 고하는 자리인데……? 이름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냥 하라니까.”
“어, 어찌……. ……아, 알겠나이다.”
마르스티엘의 이름이 하나인 것은 그가 노예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주인의 이름을 썼다. 노예로 살던 당시에 불린 이름이 있을 테지만 자유를 되찾은 노예는 그 시절의 이름을 결코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란스도 다른 이름을 묻지 않았다.
조만간 왕실의 일원으로 새로 작위와 성을 부여할 테니 그때 새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두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온전히 하나가 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약속받을지어다.”
길고 지루한 축성이 끝났다.
툭.
약혼식의 마지막 의례로, 페란스가 가슴에 단 펜던트를 떼어 냈다.
“이건 선왕께 물려받은 것이다. 오늘부터 네 것이다.”
붉은 백합 모양의 루비가 카벨리카의 상징이라는 건 마르스티엘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것이며, 나는 네 것이다.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왕실의 새 얼굴이 될 그대를 환영할 것을 약속한다.”
페란스는 펜던트를 마르스티엘의 목에 걸었다. 한쪽 무릎을 굽혀 펜던트를 받아 든 마르스티엘은 페란스가 펜던트에서 손을 떼자 그것을 들어 입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전하. 늘 몸에 지니고 제가 앞으로 카벨리카의 이름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붉은색은 마르스티엘에게 잘 어울렸다. 제 금발에는 쓸데없이 요란해 보이던 펜던트가 마르스티엘에게 걸리니 묵직하고 우아해 보였다.
“기념 섹스는 안 된다지만 키스는 가능할까?”
페란스가 귓불을 입술로 살짝 잡아당기면서 묻자 마르스티엘이 가볍게 웃었다.
“저도 같은 것을 묻고 싶었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해 보면 알겠지.”
입술을 겹치려는 페란스의 허리를 마르스티엘이 낚아챘다. 몸이 앞으로 숙여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기울어졌다. 그래서 잠깐 멀어지는 것 같은 입술이, 그가 고개를 숙이자 비로소 맞물렸다.
……하, 끝내주네.
페란스가 양손으로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벌리려던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큰 소리가 그들을 방해했다.
“……뭐지?”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허리를 놓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돌아섰다.
쿵!
두 번째로 들리는 소리는 좀 더 묵직하고 선명했다.
알레프가 긴장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대포…… 소리 같습니다.”
“대포?”
쿵!
마르스티엘의 표정이 돌변했다.
“메넌.”
“네, 단주님.”
“전하를 안으로 모셔. 안전을 빈틈없이 확보하고 나와라.”
“알겠습니다.”
페란스가 다급히 마르스티엘을 향해 외쳤다.
“무슨 소리야! 대포라면 누가 키사드를 공격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런 걸로 보입니다. 전하께서 안전해야 수성도 빨라집니다. 메넌을 따라가십시오.”
“너는?”
마르스티엘이 휙 몸을 돌려 페란스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양손으로 페란스의 얼굴을 붙들고 빠르고 짧은, 그러나 정신이 나갈 것처럼 진한 키스를 남겼다.
“번잡한 일은 제게 맡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고 기다리십시오.”
“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가만히 계십시오. 그게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팔을 잡고 떠맡기듯 메넌에게 넘겼다. 그 뒤부터 마르스티엘은 페란스가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알레프. 왕실 근위대가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파악해. 근위대 수석 기사를 내게 데려와. 나는 브레너와 있겠다.”
“알겠습니다.”
둘 다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시지요, 전하. 야외보다는 실내가 안전합니다.”
“…….”
쿵!
약혼식의 축포를 대신하듯, 다시 한번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 * *
대포까지 가져온 것치고 공격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인원 자체가 몇 되지 않았다.
파티오에서 그렇게나 긴장했던 게 허탈해질 정도였다.
대포는 성벽을 부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포를 쏘아 대는 것도 키사드 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편 호수를 향해서였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게 명확했다. 여기서 그를 적으로 간주한다면 페란스는 겁쟁이 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대포를 쏘아 대는 자가 원하는 것은 페란스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가 평범하게 알현을 요청하는 대신 대포를 쏘아 댄 이유는 그의 이름이 웨이모스이기 때문이었다.
후작저가 폐쇄되기 전 도망쳤다는 둘째 아들은 외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탄 게 아니라 몇 남지 않은 가신들과 함께 키사드 성으로 왔다.
“허락한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