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알레프였다.
“들어와.”
“왜?”
너무 빠른 승낙에 페란스는 눈가를 구겼다.
“불편하십니까?”
마르스티엘이 묻는 순간 문이 철컥 열렸다.
덩치가 은쟁반에 물과 과일 따위를 올려서 들고 왔다.
“어디에 놓을까요?”
“……가져오란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알몸인 것은 상관없었다. 별로 부끄럽진 않았으니까. 페란스가 싫다고 느끼는 것은 이 순간을 방해받는 느낌이었다.
“목욕이 길어질까 봐 제가 미리 지시했습니다. 저기에 둬.”
“…….”
거짓말이면서.
페란스가 알기로 마르스티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침실에서 욕실로 들어오는 내내 붙어 있었지만 덩치에게 따로 말을 거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마르스티엘의 눈짓을 따라 알레프는 옷을 벗어서 놓아두는 욕실 서랍장 위에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뻔뻔한 무표정이 조금 열받았다. 덩치는 자신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단주님. 따로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저것 봐. 방해할 작정으로 온 거라고.
첨벙!
페란스는 공연히 발을 크게 움직여 물을 튀게 했다.
마르스티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에 튄 물방울을 털어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 전이라도 물이 식을 것 같으면 나오십시오.”
“네가 빨리 다녀와.”
“애쓰겠습니다. 그럼.”
“잠깐만.”
몸을 돌리는 마르스티엘의 팔을 페란스가 붙들었다. 그대로 확 잡아당겨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를 하며 곁눈질로 마르스티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덩치를 살폈다. 자신이 그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덩치는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
잠깐 당황하는 듯하던 마르스티엘은 한 손으로 페란스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입 속에 들어온 혀를 그가 부드럽게, 이어서 강렬하게 빨아들였다. 페로몬을 가두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페란스는 달아오른 신음과 함께 페로몬을 흘렸다.
“이 이상은 안 됩니다.”
발정기 때처럼 정신이 나갈 것 같다고 느껴질 무렵, 마르스티엘이 입술을 뗐다.
“……왜?”
불만족을 섞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페란스의 귓가에 마르스티엘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은 뒤가 다 아물지 않았을 거라서요.”
“…….”
“다녀오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은 귓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몸을 돌렸다. 키스하는 동안 물 밖으로 나와 있던 손이 그를 대신해 욕조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탁.
마르스티엘이 욕실을 나서자 그 뒤를 따라가던 덩치가 거침없이 문을 닫았다.
“……뭔가 있군.”
혼자 남은 페란스가 중얼거렸다.
방금 전 덩치는 그때와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뼛속 깊이 증오하고 경멸하는 그 시선으로.
“그래서 계속 페로몬을 묻혀 두는 건가.”
덩치는, 마르스티엘을 마음에 담고 있는 걸까.
이상형질에게 페로몬은 영역표시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가 자신에게 속한 인물이라는 것을 내게 알리려 드는 의도였을까.
“……젠장. 누구 마음대로.”
덩치는 각인을 한 상태의 마르스티엘을 알았다. 그가 각인을 풀기 위해 애를 쓰던 시간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유대감을 자신은 조금도 공유하지 못했다.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도 딱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누가 뺏길 줄 알고.”
촤르륵!
페란스는 욕조에서 일어섰다. 따끈하게 젖은 살갗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짙은 향유 냄새가 먼저 났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제 손으로 목욕 가운을 걸친 페란스는 젖은 발로 슬리퍼를 신으며 손을 꾹 움켜쥐었다.
“반지가 아직 멀었다는 게 아쉽군.”
약혼식을 해야겠다. 가능한 한 빠르게.
욕실을 나온 페란스는 근위대를 시켜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원의 사제를 데려오게 했다.
* * *
마침 날이 좋았다.
위스타드의 신년은 봄과 함께 시작했다. 마르스티엘을 처음 만났던 신년 연회 때만 해도 저녁 바람은 서늘했는데 요즈음은 해가 져도 따듯했다.
오후 3시쯤 도착한 사제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눠 본 페란스는 즉석에서 약혼식을 결정했다.
물론 임시였다. 진짜 약혼식은 수도로 돌아가 제대로 준비를 해서 치러야 했다.
괜히 애가 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관계에 매듭을 묶어 놓고 싶었다.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수도원의 중간급 인사긴 해도 정식 사제였으니 그가 증인이 된 약혼은 신과 법 앞에 유효했다.
“……렇게나 번쩍번쩍하는 반지를 끼고 있는데 말이야.”
페란스가 흰 꽃을 꽂아 놓은 화병을 들어 괜히 이리저리 위치를 잡아 보며 중얼대자 사제가 흠칫 눈치를 보았다.
“마, 말씀을 하셨습니까, 전하?”
“아, 네게 한 말은 아니었다.”
“네, 네…….”
이제껏 왕족을 대해 본 적이 없는 사제는 머리칼부터 발가락까지 바짝 얼어 있었다.
일부 대귀족들을 제외하면 사실 페란스는 저런 반응에 더 익숙했다. 처음부터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고 드는 마르스티엘의 수하들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걸 이제껏 오냐오냐 봐줬으니…… 나도 물러 터졌지.”
“네, 네……? 전하?”
다시 깜짝 놀라는 사제에게 페란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짓을 보냈다.
“아니라니까. 하던 일 마저 해.”
“네, 전하…….”
사제는 연신 침을 삼키며 가슴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아마도 약혼식 도중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정원에 핀 꽃을 적당히 잘라 꾸민 제단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키사드의 정원지기가 제법 쓸 만한 안목을 가진 모양이었다.
흰색 꽃을 바탕으로 드문드문 초록색 나뭇가지와 붉은 열매를 섞은 장식은 화사하면서도 우아했다.
분수를 가운데 둔 파티오는 계절 탓에 그럴싸한 약혼식 장소로 보였다. 위스타드의 봄을 상징하는 흰 꽃은 사랑의 시작이라는 꽃말을 지니기도 했다.
정말 괜찮았다.
여기에 마르스티엘이 서면 더할 나위 없는 광경이 그려질 것이다.
“전하. 저어…… 외람되옵니다만 제단에 놓을 성상이 없사옵니다.”
한참 기도문을 중얼거리던 사제가 쭈뼛대다 말을 꺼냈다.
“성상을 놓는다고? 어디에?”
페란스의 대답에 사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제단 가운데에 성상을 놓으실 게 아니었습니까?”
그 말대로 제단 가운데를 비워 놓긴 했다.
“약혼식에 성상은 무슨. 케이크를 놓을 자리다.”
“그, 그…… 그렇습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 마침 저기 오는군.”
커다란 5단 케이크를 든 부엌 궁인들과 빨간 머리 메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메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파티오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아니, 케이크를 요구하셨다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맞을걸.”
“오늘, 이 자리에서요? 단주님과는 얘기가 되신 겁니까?”
“아니.”
“흠.”
저런 반응은 좀 짜증스러웠다.
자신보다 마르스티엘을 훨씬 더 잘 안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건 무슨 뜻인데.”
“아,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단주님의 반응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이게 싫다고 한다면 나도 그 이유는 좀 궁금해해야 될 것 같은데. 마르스티엘에게 당장 약혼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글쎄요. 저는 단주님이 아닙니다.”
“아닌 건 알고 있어. 내가 빨간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할 리는 없으니까. 네가 아는 선에서 입을 열라는 뜻이다.”
“빨간 머리가 무슨 잘못이라고 그러십니까.”
메넌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여간 고용주나 수하들이나 예의하고 거리가 먼 점은 똑같았다.
“대답이나 해. 말 돌릴 생각 말고.”
“……제가 알기에도 그런 건 없을 겁니다.”
“그럼 좋아하겠지. 됐어.”
“……? 그렇게 쉽게 믿으셔도 되는 겁니까?”
“안 믿으면 어쩔 거야. 이제 와서.”
“아……. 그건 그렇겠군요.”
메넌이 어깨를 으쓱했다. 예쁘장하게 땋은 빨간 머리가 어깨에서 흔들렸다.
……알파라는 건 거짓말 아닐까. 어쩌면 이 자식도 오메가고 그래서……. ……참, 페로몬 향은 확인했지. 그건 확실히 덩치한테서 나는 향이었어.
“덩치는…… 아니, 알레프는 마르스티엘을 좋아하나?”
“……뭐?”
불쑥 내뱉은 말에 메넌이 질색을 하며 페란스를 노려보았다. 알레프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경멸 어린 시선과 비슷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아, 실례. 송구합니다, 전하. 그런데 그 말씀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매일 제 페로몬을 발라 놓기에 묻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오늘 약혼식에는 부르지 않는 편이 낫잖아. 안 그래?”
“그건 빌어먹을, ……음? 아니아니, 결례를 범했습니다, 전하. 하여간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혀를 간수할 자신이 없으면 잘라. 목이 잘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하지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측이십니다. 알레프가 단주님을……, ……하다니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 확신하나?”
“물론입니다. 두 사람 사이를 알면 절대 하지 못할 생각입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데?”
“그건……. ……하, 진짜 잘라야겠네.”
메넌이 혀를 콱 씹었다.
페란스의 질문에 말려들어 마르스티엘의 과거를 꺼내 드는 실수를 깨달은 얼굴이 다채롭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