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 않습니까?”
“……한 건 아니었어. ……해서 ……한 거야.”
“그래도……. ……는 ……지 않으시는 게…….”
“……는 괜찮아. 그보다는…….”
“…….”
꽃밭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등은 푹신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사람 음성은 벌이 윙윙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자신은 흠씬 두들겨 맞고 꽃밭에 쓰러진 시체였다.
죽을 맛이네, 진짜.
눈이 떠지려는 듯, 눈꺼풀이 꿈틀거렸지만 페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지금은 눈꺼풀을 뜨는 것조차 아플 것 같았다.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군. 그건 좀 억울한데.
……그런데 왜 억울하지?
……아, 그럼 마르스티엘이 더 오래오래 살 테니까.
그는 자신이 죽었다고 하면 일 년만 딱 채우고 곧장 재혼할 것 같았다.
재혼하고 나면 내 무덤에도 안 오겠지. 재혼 상대에게 성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와, 기분 나빠.
기필코 오래 살아야겠어.
“그건 좋은 생각이지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상황이라 벌써부터 재혼할 마음은 없습니다.”
마르스티엘의 대답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조금 민망해졌다.
재주도 좋네. 죽은 사람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 거야.
“죽지 않으셨습니다. 더 주무실 겁니까?”
아……. 꼭 죽은 것 같았는데.
“더 누워 계셔도 됩니다만 금방 시장해지실 겁니다. 이틀 가까이 주무셨습니다.”
어……?
이틀이나 잤다는 말에 눈이 떠졌다. 이대로 더 자다간 진짜 시체가 될 것 같았다.
“…….”
페란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마르스티엘의 얼굴이었다.
“일어나시겠습니까?”
“……이상해.”
“뭐가 이상하십니까?”
마르스티엘이 제 허리 밑으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와 베개를 두 개나 받친 다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게 했다.
페란스는 아직도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마르스티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제가 이상하다는 말씀입니까?”
“응.”
“어디가 어떻게 이상합니까?”
“그냥 좀……. ……긴장이 돼.”
처음에는 불편하다고 하려 했던 페란스는 말을 고쳐 긴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네가 나를 보는 거나 만지는 거나 좀…….”
편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긴장은 되지만 기대감도 있었다.
“혹시 제 페로몬이 느껴지십니까?”
마르스티엘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물었다.
“음? 그거야 네가 페로몬을 흘릴 때면……. ……아,”
갑자기 페란스의 눈이 훅 벌어졌다.
“이게 네……. ……네 페로몬이야?”
“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목을 쥐었다. 짜릿한 긴장이 두 배가 되었다. 살갗이 닿는 순간 피부를 떨리게 만드는 약한 전율이 생겨났다.
“이끼 냄새가…… 아닌…… 좀 다르……,”
이제껏 각인 반응이 없을 때 느껴지는 페로몬은 이끼 냄새와 비슷했다. 깨끗하고 조용한 숲을 연상시켜서 그 냄새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끼 냄새보다 훨씬 더 좋은 냄새였다. 신선한 초록 허브와 들꽃 냄새 같기도 했고 비가 세차게 내린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직전 바람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각인 반응이 더 약해진 모양입니다.”
“아…….”
그러자 난데없던 불편함이 이해되었다.
자신이 그를 알파로 인지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 불편함은 성적 긴장감이었다.
“전하의 페로몬도 확인하고 싶습니다.”
“단주님.”
너무 조용히 있는 탓에 있는 줄도 몰랐던 알레프가 뜻밖에도 마르스티엘을 가로막고 나섰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어. 그래도 지금은 나서지 마라.”
“단주님. ……위험합니다. 정말로.”
“비켜.”
명령조가 아니었다. 마르스티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게 말했을 뿐이었다. 알레프가 괴로운 듯 눈을 꽉 감더니 겨우 옆으로 비켜섰다.
페란스는 손을 뻗어 마르스티엘의 소매를 잡았다.
“뭐가 위험하다는 건데? 내 페로몬이?”
“잠깐이면 괜찮습니다. 그리고 확인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댔다. 그 순간에도 심장이 짜릿하게 박동했다.
“전하.”
“페, 페로몬을 풀……라고?”
“네.”
“……. 정말 괜찮은 건가?”
“약간이라면.”
그 말에 어쩐지 갈증이 느껴졌다.
페란스는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페로몬을 흘렸다. 목덜미에 닿은 코가 숨을 들이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코가 느끼는 제 페로몬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래서 그가 다르게 느낄지 궁금했다.
“어……때?”
마르스티엘이 몸을 떼어 냈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은 어쩐지 조금 색이 짙어진 것도 같았다.
“제게도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각인이 풀린 건 아니었으니까.
“썩은 생선 같던 게 상한 치즈가 되었나?”
“처음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 참 위안이 되는데.”
페란스는 평소 기분이 가라앉을 때 하던 대로 빈정거렸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 평소와는 달랐다. 마르스티엘의 작은 표정이나 사소한 눈짓까지 전부 다 피부가 따끔댈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래.”
믿으라고 했지만 믿기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었던지, 스스로 기가 찼다.
“씻고 싶어. 씻겠다.”
어쨌거나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 것이다.
어젯밤, 아니 이틀 전 마르스티엘은 최음제를 복용하지도 않았고 자신 또한 심장 박동을 늦추는 약 같은 걸 먹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섹스를 했고 결과는 꽤 괜찮았다.
“욕실을 준비해.”
마르스티엘이 알레프에게 말했다. 알레프가 소리 없이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마르스티엘을 만난 뒤 두 번째 발정기였다.
고작 두 번의 발정기를 겪었을 뿐인데 자신은 벌써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건 위스타드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민감한 대귀족들은 벌써 빠르게 변화의 냄새를 맡고 있는 중이었다.
그 증거로 위스타드에서 첫 번째로, 대귀족 중 하나인 웨이모스 후작의 교수형이 결정되었다.
* * *
“기쁜 소식이로군.”
목욕을 하는 동안 웨이모스 후작의 교수형을 대귀족들이 과반수로 찬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페란스가 수도로 돌아가 날짜를 공언하면 후작은 그날 중앙 광장에서 목이 매달릴 것이다.
페란스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던 아만다리스의 모습이 후작과 겹쳐 떠올랐지만 곧장 지워 버렸다.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없었다. 제 입으로 말한 대로 야비하고 빠른 전쟁을 최대한 신속하게 끝내는 길밖에 없었다.
“마이카오 백작의 공백이 한몫했을 겁니다. 물 온도는 괜찮으십니까?”
“그랬겠지. 왕실 길드의 고발장 뒤에 누가 손을 썼는지 짐작들 하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온도는 괜찮아. 목욕물은 뜨거운 편이 좋아.”
“너무 뜨거우면 기운이 빠지기 쉽습니다.”
마르스티엘이 욕조 안으로 손을 넣어 물을 한번 휘저었다. 온도를 확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물을 식히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세심히 돌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
그런 다정함은 어디서 배웠나.
발정기 전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크흠, 흠.”
페란스는 헛기침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마실 것이 필요하십니까?”
“아, 아니. 괜찮아. 그런 건 아니야.”
각인 반응은 정말로 약해져 있었다. 십 분이 넘게 욕실처럼 좁은 공간에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마르스티엘의 페로몬 향이 그대로였다.
미치도록 좋았다. 너무 좋아서 곤란할 정도였다.
마르스티엘의 향에 비하면 아만다리스는 먹다 남은 소시지 냄새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건 정말 좋은 것 같아. 너와 더 오래도록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게.
그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을 아예 쪼개서 보여 주는 것 같아 어색했고, 마르스티엘이 덤덤하게 예의 바른 대꾸를 하면 기분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음? 아, 조금 그런 것도 같고.”
“목욕을 그만하시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그건……. 조금만 더. 기껏 푼 향유가 아깝잖아.”
이렇게 냄새가 짙은 향유라면 제 페로몬 향도 감춰 주지 않을까.
페란스는 몸을 코 바로 밑까지 물에 푹 담갔다.
마르스티엘은 그가 물장난을 치는 중이라고 생각했던지 피식 웃으며 머리칼을 건져 올려 주었다.
“물을 좋아하셨군요.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
꼭 그런 건 아니야.
지금 내게 좋은 건 네 향이야.
심장이 너무 뛰어서 얼굴이 붉게 익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말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르스티엘은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페란스의 코끝을 툭 두들겼다.
그 작은 동작에 갓 잡힌 생선처럼 튀어오를 뻔했다.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마르스티엘은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생각할 게 많다니 천천히 하라는 듯 몸을 물렸다. 그래도 할 말을 마쳤으니 나가 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뜨거운 물에 페란스가 너무 오래 있지 않도록 지켜볼 생각인 듯했다.
그런 다정함은 대체 어디서 배웠냐고.
그런 궁금증이 머리를 터질 듯 어지럽게 만들었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 아니면 몸에 익은 습관인지, 이전의 상대들에게 해 오던 매너인지, 아니면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는 행동인지 궁금했다. 미치도록 알고 싶었고, 반대로 사실을 알기가 두려웠다.
내가 이렇게나 겁이 많았었나.
두 번째 발정기 이후로, 그러니까 마르스티엘의 페로몬이 달라진 뒤로 그가 아니라 자신이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 번 좋다는 것을 인지하자 모든 게 신경 쓰였다. 모든 게 거슬렸고 모든 게 겁이 났다.
……미치겠네.
페란스는 코밑까지 담근 얼굴을 아예 물속에 푹 처박았다.
이걸 어쩌면 좋지.
똑똑.
“단주님.”
그때였다.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