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마르스티엘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코가 그렇게나 예민하신지 미처 몰랐군요. 의외의 재능을 겸비하셨습니다.”
“말 돌리는 건가? 너답지 않아.”
툭.
종아리를 건드리는 발끝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이번 것은 아팠을지도 몰랐다. 심술이 더해졌으니까.
“제대로 말을 해.”
“사실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러트가 오기 직전이었던 터라.”
페란스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래서? 설마 그새 뒹굴었다는 말이야? 내가 매일 얼굴을 보는 인간하고?”
“아닙니다.”
마르스티엘이 몸을 숙여 페란스의 머리를 쓸었다.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드는 감촉은 부드러운데도 소름이 끼쳤다. 페로몬 쇼크가 온몸의 감각점을 쓸데없이 예리하게 만들어 놓았다.
“억제제를 준비해 준 게 알레프입니다. 어쩌면 러트 페로몬에 자극을 받아 알레프가 페로몬을 방출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하고 알레프는 욕실을 떠났습니다. 그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그게 뭐야. 잘 모르겠다는 거잖아.”
마르스티엘이 짧게 웃었다.
“그래도 알레프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는데?”
“제 취향은 아니라서.”
“발정기가 왔는데 취향을 재고 따질 여유가 있다고?”
“발정기가 오기 직전이었고, 곧 억제제를 복용했습니다.”
“네 입으로 정신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러게 왜 욕실까지 들어오셨습니까.”
“……? 그건 날 두고 하는 말이야?”
“네.”
마르스티엘이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으로 페란스의 턱을 쥐었다.
“러트라고 일렀음에도.”
페란스의 초록색 눈이 이 순간 파도가 이는 바다처럼 흔들렸다.
“……네가 러트라서 곤란해지는 건 나인 줄 알았는데.”
“그건 전하께서 그런 얼굴을 하지 않으셨을 때의 얘깁니다.”
왜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 드는 걸까.
“이쯤에서 네 취향이 어떤지 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맞나?”
“어떨 것 같습니까?”
“네 취향?”
“네.”
“글쎄……. 그렇다고 남한테 각인당한 오메가는 아닐 것 같고.”
“그건 아닙니다.”
페란스가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쓸었다.
“빨간 머리나 회색 머리라고는 하지 마.”
“금발입니다.”
“아……. 그래, 금발. 눈동자 색은?”
“초록색.”
“키는?”
“제 턱에 이마가 닿을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오메가인가?”
“굳이 고르자면 오메가가 낫습니다. 그러나 형질보다는 외모를 따지는 편인 것 같습니다.”
“아하. 눈에 차기만 하면 베타든 알파든 상관없다? 굉장히 문란하게 들리는데.”
“이상형도 문란한 쪽입니다. 갑자기 빨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바지를 벗기려고 드는 걸 좋아합니다.”
“그건 나도 좀 취향이야. 그리고?”
“독점욕이 있는 편입니다.”
“그래? 너는 구속하는 게 좋은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상형이 하는 거라면.”
“나이는? 연하가 좋아? 아니면 연상?”
마르스티엘이 피식 웃었다.
“연하가 좋습니다.”
페란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이상형을 묻는 중이지 않습니까. 제 취향은 저보다 어린 쪽입니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취향이고, 보살피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연상이 철이 없으면 되겠군.”
“그게 좋겠군요.”
마르스티엘의 엄지가 입술을 닦다 입 안으로 들어왔다.
역하지 않았다. 메스껍지도 않았다. 페란스는 아랫니를 누르는 손가락을 혀끝으로 감았다. 그 감촉을 음미하려는 것처럼, 마르스티엘이 살짝 눈을 감았다.
페란스는 검은 속눈썹이 만들어 내는 작은 그림자를 훑다가 물었다. 입 속에 손가락이 들어가 있어서 발음이 뭉개졌다.
“네 각인 상대도 이상형에 가까웠나?”
“……. ……그때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답은 한 박자 느리게 들려왔다.
어쩌면 당황한 것인지도 몰랐다. 마르스티엘은 제 입으로 각인했었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어떤 인간이었는지 말해 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이상형에 가까울 만큼.”
“…….”
그렇다니 울컥 열이 솟구쳤다.
각오는 했지만 첫사랑의 흔적은 깊었다. 어쩌면 자신은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마르스티엘의 각인 상대를 곱씹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제기랄. 목을 잘라 혼인 선물로 주는 건 못 하겠네.
“인성은 쓰레기였겠는데. 네가 각인하도록 내버려 둔 걸 보면.”
“그럴지도.”
마르스티엘이 느리게 손가락을 빼냈다.
침이 묻은 손가락 끝을, 그가 제 입술에 대고 한번 핥았다.
“전하의 이상형은 어떻습니까?”
말을 돌리려는 것 같았다. 각인 상대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유쾌한 대화거리가 아닌 듯했다.
“잘생긴 알파여야 해.”
“그리고?”
“여기서 잘생겼다는 건 대충 보기 좋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야. 정말로 잘생겨야 해. 내가 이제껏 위스타드에서 본 적이 없다고 느낄 만큼.”
“까다로운 분이시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 괜찮습니다. 다른 건 어떻습니까?”
“돈이 많으면 좋겠어. 그리고 말해 두는데, 나는 연하가 취향이야.”
“그러셨군요.”
“나보다 세 살쯤 어려서 내가 다 늙어 빠졌을 때라도 상대는 아랫도리가 건실했으면 좋겠어. 빨고 싶으면 아무 때나 빨게.”
“그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목에 느슨하게 걸려 있던 스카프 끝을 홱 잡아당겼다. 마르스티엘의 고개가 앞으로 다가왔다.
“네 이상형은 이제 하나인 걸로 해. 다른 사람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미 그렇습니다.”
“……제기랄. 말은 잘하지.”
페란스는 가까이 자리한 입술을 빨고 싶어 미치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간신히 스카프를 놓아주었다.
지금은 제 몸 상태를 과신할 수가 없었다. 키스를 하다 말고 토하는 꼴은 죽어도 보이기 싫었다.
이상형이라잖아.
계속 역한 꼴을 보이게 되면 그 마음이 변질되는 게 아닐까. 마르스티엘은 각인 상대를 아름다웠다고 표현했다. 자신도 그렇게 있고 싶었다.
“각인을 푸는 건 언제 또 할 수 있는 거야?”
“일단 전하께서 두 발로 걸으실 수 있게 될 때까지……,”
페란스가 재빨리 마르스티엘의 말을 가로챘다.
“그건 내일이면 되겠는데.”
“……기다렸다가 회복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새 페란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결국 기약이 없다는 말이잖아.”
“그럴 만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마르스티엘은 턱을 놓고 그를 카우치 등받이에 푹 기대게 만들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전하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각인을 빨리 푸는 게 더 안전할지도 몰라. 일단 아만다리스는 내가 각인이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아만다리스 공은 제 몫으로 두십시오. 전하께서는 회복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네게 맡겨 놓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네가 내 약혼자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 땅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전하께서 허락하신 권한들이라면 충분합니다.”
마르스티엘에게는 왕실 근위대를 부릴 수 있는 권한은 없었지만 군대 주둔권이 주어졌다. 그가 고용해 데려오는 용병들은 규모의 제한 없이 마르스티엘군의 형태로 위스타드에 주둔할 수 있었다. 타국의 재산을 세금 없이 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자신이 고용한 자들에게 임시 거주권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블루와렌의 자금이 융통되는 곳에서는 죄인을 조사할 수 있고 신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형은 불가능했다.
그 정도가 페란스의 서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선이었다. 그 이상은 왕의 인가가 필요했고, 지금 왕의 인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만다리스였다.
“섭정의 권한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
“주실 수 있는 것을 전부 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충분합니다.”
“…….”
제 몸이 터무니없이 약해져 있다는 게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이러다 발정기가 오게 될까 봐 무서워.”
“잘 넘기실 겁니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군.”
페란스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 등받이가 마르스티엘의 어깨였으면 했다.
각인을 풀기까지, 시간이 너무 더뎠다.
* * *
말이 씨가 되었다.
이번 주기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에 다량으로 노출된 일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후, 후우…….”
페란스는 숨을 몰아쉬다 눈을 떴다.
제 페로몬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때는 새벽이었고, 주위는 고요했다. 고요하지 않은 것은 제 몸 하나였다.
“하아, 흐…….”
매번 겪는 발정기는 도무지 익숙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끓는 것처럼 혼미해지면 그때부터 본능이 혼자 움직였다. 발정기의 본능은 인간의 손으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짐승 같았다.
페란스는 다리를 꼬고 신음하다 가운 밑으로 손을 움직였다. 성욕은 불같이 달아오르는데 이상하게도 성기를 만지는 게 두려웠다. 주저주저하던 손이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성기를 쥐었다.
“흣! 아!”
성기를 쥐자 손안에서 빳빳하게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찌릿한 통증이 전해져 페란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 한구석은 분명히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본능은 손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슷슷, 탁! 탁탁!
손짓이 빨라지며 성기 끝에서 선액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아파서 그런지 꼭 성기가 우는 것 같았다. 아래가 움찔대며 벌어지는 감각도 느껴졌다. 몸 안이 흠뻑 젖는 기분이었다.
“바, 발정…… 하, 하필 지금…….”
한 줄기 남은 이성을 붙들고, 페란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