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38)화 (38/122)

38.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농담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덩치의 유머 감각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제 앞에서 그런 말을 하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정은 단주님의 성격과 맞지 않습니다만, 만일 그러신다 하더라도 저는 단주님의 사람입니다.”

“……젠장.”

할 말이 없어진 페란스는 공연히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하는 중이라고?”

주어가 없어도 페란스가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뻔했다.

“이것저것.”

“마이카오 백작을 끌어내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왜 거기에 대해서는 말이 없어?”

“제가 알기로는 순조롭습니다. 며칠 내로 결과가 전해질 겁니다.”

“젠장.”

덩치는 마르스티엘보다 더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을 말했다. 덩치와 며칠 붙어 있었다고 젠장이 입버릇이 되었다.

“너는 봤었나?”

페란스가 또 맥락 없는 질문을 던지자 알레프가 눈을 매섭게 떴다.

“그렇게 물으시면 모른다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시키실 일이 없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이 각인을 풀었을 때 말이야.”

“……네.”

알레프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땠어?”

“……바라 마지않으시던 일이라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기뻐했다고……. 그랬다면 혹시 상대가 죽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일방 각인이었나?”

“네.”

“젠장.”

그 성격에 기뻐한다고 해도 한두 번 웃고 마는 정도였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지금보다 어렸을 마르스티엘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보다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좀 더 약하고 여윈 모습을 한 채 환희가 울컥 차오르는 눈으로 무표정을 하고 있는.

……빌어먹을. 나는 왜 이런 것까지 상상하는 건데.

빠져도 너무 빠져 있었다. 요즘 제 일과는 하루 종일 마르스티엘을 생각하는 것밖에 없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피하는 시간 동안 감정이 잦아드는 게 아니라 더 끓어올랐다.

“너는 각인 상대에 대한 건 전혀 모른다고 했나?”

“……들은 바가 없습니다.”

“누군지 궁금한 적은 없었고?”

“……. ……없었습니다.”

“나만 궁금한 건가.”

페란스는 짜증을 섞어 자조했다.

이건 전부 마르스티엘이 자신을 이 침실에 처박아 둔 탓이었다. 할 일이라고는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밖에 없는 이 한가함이 문제였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있는 건가?”

“꼭 그러셔야 합니까? 단주님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일입니다.”

“혼인 선물로 주게.”

“……네?”

알레프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서. 머리통을 잘라다 주면 좋아하지 않으려나?”

“……. ……어쩌면. 그러나 필요 없는 짓입니다.”

“왜? 좋아할지도 모른다면서.”

“원하신다면 스스로 하실 분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 줘도 좋아하겠지. 일단 누군지 알아 와. 선물을 어떻게 할지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

“싫습니다.”

“뭐라고?”

살면서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던 페란스는 좀 당황했다.

“명령을 따르기가 싫다고?”

“제 손으로 단주님의 뒤를 캘 수는 없습니다. 원하시면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이건 뭐……,”

페란스는 떨떠름해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있었다.

이걸…… 용납해야 하나?

그런데 용납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르스티엘이 가장 아끼는 수하를 제 선에서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너, 네 주인에게 감사해라. 내가 널 봐줄 이유는 단 하나니까.”

“그러겠습니다.”

“나 참.”

갑자기 입맛이 몹시 써졌다.

페란스는 투덜대며 이불을 걷었다.

“지팡이를 가져와. 짜증나서 좀 걸어야겠어.”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낫습니다.”

“시끄러워. 지팡이를 가져오는 것도 싫어서 그래?”

“……아닙니다.”

알레프는 얌전히 지팡이를 가져다주었다.

지팡이를 짚고 체중을 싣는데, 제 다리에는 그만큼의 힘이 없었다.

“읏!”

페란스가 우당탕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알레프가 주춤하며 다가왔다.

“일으켜 드리길 바라십니까?”

페란스가 혀를 찼다.

“예의가 형편없군. 몸에 손을 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물어야지.”

“…….”

알레프는 입을 다물었다. 또 그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분노하듯, 혹은 경멸하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게 참 희한하단 말이야.

요 며칠간 얼굴을 대할 일이 늘며 그나마 서로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덩치가 자신에 대해 품은 근본적인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왜 저렇게 나를 싫어하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뭐, 허락하겠다. 일으켜.”

페란스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레프는 혀 차는 소리를 삼키며 페란스의 어깨 아래로 목을 집어넣었다. 잡아서 붙드는 게 아니라 제 몸으로 떠받쳐 일으키려는 행동이었다.

“……뭐야.”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덩치의 뒷목이 얼굴에 닿을 듯 가까워지는 순간에 페란스는 왠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냄새가 아니라 페로몬 향이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듯한 페로몬이었다.

“너…… 오메가였나?”

그때였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마르스티엘이 들어오고 있었다.

알레프가 재빨리 페란스를 놓고 멀어졌다. 마르스티엘은 자연스럽게 그를 대신해 페란스의 몸을 받아 들었다.

“환자이신 걸 잊었습니까?”

“그러는 넌.”

그를 보자마자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움은 벅찼고 애정은 뜨거웠다. 그에게서 나는 깨끗한 이끼 향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이제는 그게 그의 페로몬 향이라는 것을 알았다. 각인 반응이 오면 무겁고 습한, 괴이쩍은 냄새로 변하지만 이젠 그것도 싫지 않았다.

“이제는 전염병 환자 취급하는 걸 관두기로 했나?”

“그건 아닙니다. 단지 다른 인간 품에 있는 걸 두고 보기가 싫어서.”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은 낯간지럽지 않나? 그리고 덩치가…… 알레프가 오메가라는 걸 너는 알고 있을 거 아냐.”

“베타나 오메가도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아침보다 나아.”

“그렇다면 좀 더 곁에 머무를 수 있겠군요.”

그사이 알레프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침대 말고 의자에 앉고 싶어. 침대는 이제 지겹다.”

“뜻대로.”

마르스티엘은 그를 카우치에 내려놓았다. 이대로 그를 붙들어서 제 몸 위에 올리고 심장을 누르는 무게를 느끼고 싶었다.

“볼일은 잘 보고 온 건가?”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벗기고 발 받침대에 올려놓은 뒤 카우치 맞은편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네. 판은 다 짰습니다. 이중장부를 종류별로 만들어 놓고 있던 자라 일이 쉬웠습니다.”

마르스티엘이 언급하는 것은 왕실 공식 길드의 마스터인 마이카오 백작의 일이었다.

왕실 공식 상인 길드가 정석대로 굴러가리라는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마이카오는 그 생각보다 더 썩어빠진 작자였다.

“조만간 길드 내부에서 정식 고발하는 모양새가 나올 겁니다. 아만다리스 공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볼 수 있겠군요.”

“길드 내부에서? 그쪽은 다 한패일 텐데.”

“개중 불만이 있을 법한 자들을 추려냈습니다.”

왕실 길드 내부에 접근하는 일은 쉬웠다. 이미 소금 유통으로 물꼬를 터놓았기에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쉬웠다. 소금 유통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마이카오의 처사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운을 띄우는 것도 쉬웠다.

게다가 수도에는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페란스 왕자에게 얼마나 큰 총애를 받고 있는지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키사드 성의 포도주 사건으로 명망 깊은 후작 가문 하나가 끝장이 난 것도 소문에 한몫을 더했다.

후작의 처형은 대귀족회의 반대에 부딪혀 표류 상태였지만, 수도의 여론은 사랑에 눈이 먼 왕자의 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돈 냄새를 빠르게 맡는 상인 길드에 균열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이참에 왕실의 이름을 허락받은 단체의 수장을 임용하는 일은 임명식으로 바꾸십시오. 당분간은 처리하실 일이 많아 귀찮으시겠지만 효과는 빠르게 나타날 겁니다.”

“귀찮아도 할 건 해야지. 알겠다. 임명장을 만들게 해야겠군. 당장은 상인 길드부터.”

“네.”

마이카오를 쳐내면 그다음 길드장은 페란스의 서명이 들어간 임명장을 쥐고 있어야 했다.

아만다리스가 그 꼴을 얌전히 두고 보진 않겠지만 일단은 이쪽이 이길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마이카오를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만다리스였다. 대귀족들이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이 명확한 잘못을 감싸 줄 정도로 혀가 길진 못했다.

“전하께는,”

마르스티엘은 스카프 핀을 뽑아 목을 느슨하게 흩트리다 불쑥 눈을 맞췄다.

“나는?”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습니다.”

“그건 칭찬 같은데. 맞아?”

“네.”

“나는 반대야.”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콧등을 찡그려 보였다.

“너한테는 같은 얘기를 계속 해야 해서 싫어.”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너무 멀다고.”

마르스티엘은 보이지 않게 슬쩍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지금도 가깝습니다.”

“멀어.”

“우기지 마십시오. 그게 귀엽긴 해도 전하를 혹사시킬 마음은 없습니다.”

“좀 해야 할걸.”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짧게 하십시오. 가능한 한.”

마르스티엘은 몸을 일으켜 카우치와 일인용 소파 사이에 놓인 티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맞지 않는 눈높이가 거슬렸지만 그가 보기 좋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마르스티엘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잘생겼지만 지금처럼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가장 짜릿했다.

“덩치가 오메가인 사실을 숨긴 데는 이유가 있었나?”

“없었습니다. 말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못 믿겠는데.”

“왜 그러십니까?”

툭.

페란스가 슬리퍼를 벗은 맨발로 마르스티엘의 종아리를 건드렸다.

“기억하나? 여기로 오는 길에 들렀던 여관에서.”

“네.”

“네가 러트가 왔다며 욕실에 틀어박힌 적이 있었는데.”

“압니다.”

“그때 너한테서 페로몬이 맡아졌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

“그게 덩치의 페로몬과 같았다. 설명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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