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그래도 지금은 너무 멀어.”
페란스가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괜찮은 곳까지는 와 있어. 반응이 올 것 같으면 말을 할 테니까.”
“위험합니다.”
“뭐가 얼마나 위험하다는 건데. 내가 여기서 더 망가지기라도 해?”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많이 지치고 약해지신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괜찮다잖아!”
마르스티엘에게 화를 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사실은 고마웠다. 그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게 기적 같았다.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더라도 상황은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다.
페로몬에 굴복해 개새끼에게 다리를 벌려 주기라도 했다면, 그 꼴을 마르스티엘이 봤다면 자신은 지금 이곳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마르스티엘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시늉이라도 해.”
한 겹 낮아진 페란스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네가 멀어지는 게 싫어.”
“…….”
입술을 꾹 물고 있던 마르스티엘은 마지못한 듯 다가왔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결코 서로 닿지 않을 거리였다.
“이 정도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한 숨이 지나가고, 페란스는 제 의지로 몸을 틀었다. 마르스티엘을 쳐다보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나를 찾아냈던 거야? 며칠은 걸릴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운이 좋았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 예정보다 빨리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네가 남겨 놓았던 수하들은? 해를 입은 자는 없나?”
“……그런 것도 신경 쓰십니까?”
잠깐 멈칫댄 마르스티엘은 희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알현실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 자리에 없었어. 물론 개새끼가 수작을 부려서 외부 알현실로 착각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거야.”
“다들 무사합니다. 그래서 화가 날 정도로.”
겉으로는 차분한 말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아닌 것처럼 들렸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 화가 났어?”
“그보다는 좀 더 격한 표현을 써야 맞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랬군.”
그래, 그랬을 것이다.
격렬히 분노하고 자신을 뒤쫓아 달려왔을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했던 헛소리는 믿을 게 아니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자신이 그를 바라보듯, 그도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게 없었다.
“그래…….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
“두통이나 구토는?”
“아직은 괜찮아. 시작하지 않았어.”
“그럼 만져도 되겠습니까?”
그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실은 페란스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디를?”
“어디든.”
“그럼 해. 어디든 허락하겠다.”
“…….”
다시는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리가 선뜻 좁혀졌다. 보폭을 늘여 한 번에 거리를 좁혀 온 마르스티엘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그가 고개를 내려 아주 짧게 이마에 입술을 댔다.
“군대를 마련하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미 허락했다.”
“처음 생각했던 건 기사단 수준이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군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얼굴을 감싸 안은 손이 제 힘을 이기지 못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내 땅에서 전쟁을 벌일 작정인가?”
“그게 전하를 지키는 길이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
군대라는 말이 아만다리스가 언급했던 폐허가 된 영지를 연상시키는 건 제 머리가 지금 좀 이상해서일 것이다.
페로몬으로 인해 발작이 왔다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만도 했다.
“그래서 빈 땅을 산 건가?”
마르스티엘이 제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해 주길 바라며 물었다.
“……제가 땅을 샀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만다리스가 알고 있었다.”
아닌가. 이상한 게 아니었나.
개새끼가 왜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
“할 얘기가 있다면서 해 주던데. 네가 대리인을 내세워 땅을 산 게 수상하다면서.”
“…….”
대답 없이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이 멀어졌다. 마르스티엘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들었다.
“가지 마.”
페란스는 그를 붙잡았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으니까 있어. 어디든 만져.”
마르스티엘은 아주 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다는 말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알잖아. 내가 참고 있어도 잘만 알아차리면서.”
“가끔 제 눈이 보는 것을 무시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해. 하여간 지금은 괜찮아.”
아직은 두통 정도였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럼 손을 잡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은 희미한 두통을 알아차린 사람 같은 말을 했다.
침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온 그는 거기에 앉아 페란스의 손을 끌어왔다. 손을 잡을 거라고 했으면서 정작 손은 손톱 끝이 살짝 닿는 거리에 놓이기만 했다.
“대리인을 내세운 것은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용이 없었군요.”
“왜 샀는데?”
제 머리가 이상한 것도, 아만다리스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군대를 사게 된다면 감춰 둘 곳도 필요할 테니까.”
“…….”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마르스티엘의 계산이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자신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너는 내가 내 땅에서 왕관을 놓고 전쟁을 벌일 왕이라 여겼나?”
“전하께서 어디까지 각오하셨는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어디까지 각오했는지 이제 아시는 것과 달리.”
“내가 전쟁은 원치 않는다고 하면?”
“그렇다면 전쟁은 없습니다.”
“…….”
대답은 명쾌했다. 증거가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시간을 끌던 아만다리스에 비하면 이쪽은 믿기 쉬웠다.
자신을 위해 거리를 벌리면서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만지겠다는 모순 또한 마찬가지였다.
페란스는 그 모순을 온전하게 이해했다. 거기에 거짓이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있잖아.”
“네, 전하.”
페란스는 몸을 움직여 마르스티엘에게 다가갔다. 순간 인상을 썼지만 마르스티엘은 그를 말리진 않았다.
페란스는 억지로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만다리스는 혼인을 반대할 생각이다. 네가 블루와렌 출신이라는 것을 문제 삼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둘러.”
“…….”
“아만다리스의 편을 들어줄 꼬리들을 그 전에 전부 잘라 놓아야 해.”
마르스티엘은 손을 들어 페란스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게 지금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까, 전하?”
“전쟁보다 빠르고 효과적이지. 야비하긴 해도.”
“야비하다는 말이 마음에 드는군요.”
마르스티엘이 손짓을 멈췄다. 페란스를 다시 침대에 눕힌 그는 손을 쥐어 손등에 입을 댄 채 속삭였다.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페란스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야비하게,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 목적이 있다 해도 괜찮았다.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달리 있었다 해도 감당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원하고 있었다. 각인 반응으로 인해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오는 게 상관없을 만큼.
* * *
수도로 가는 일은 며칠 더 미뤄졌다.
페로몬 쇼크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해서 페란스는 며칠을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밀월여행이 됐어야 할 여정이 요양이 되었다.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으면서도 페란스는 그게 내내 불만이었다.
“마르스티엘이 날 전염병 환자 취급하는 게 싫어.”
페란스는 침대에 기대앉은 자세로 문서에 서명을 하며 투덜거렸다.
소용은 없겠지만 대의회에 섭정 아만다리스의 왕족 인거를 고발하는 문서였다. 페란스의 편을 들어줄 인간은 한 명도 없겠지만 이 고발서는 야비하고 빠른 전쟁의 선전포고가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대귀족들은 페란스가 본격적으로 왕관을 되찾기 위한 행보에 나섰음을 인지하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게다가 페란스는 대중에게 호감도가 높은 계승권자였다. 아만다리스가 그를 궁에 고립시켜 놓은 뒤 사치를 일삼는 멍청하고 나태한 왕자라는 그림을 만들어 놓았지만, 애석하게도 대중은 페란스의 눈부신 외모를 사랑했다.
대귀족들이 아무리 아만다리스의 편을 들어도 결과적으로 페란스가 왕이 되는 일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걸 얼마나 길게 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만다리스는 대관식을 최대한 늦춰 왔던 것이었고, 페란스는 지금 그 시간을 앞당기겠다고 공언하는 셈이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서명을 마친 문서를 알레프가 받아 갔다.
침실 수발을 들 인간으로 덩치를 데려다 놓은 게 의외였다. 그리고 덩치가 의외로 할 줄 아는 게 많다는 점도 의외였다.
고발 문서를 작성한 것은 덩치였는데, 필체가 왕실 비서관보다 깔끔해서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위스타드식 궁중 용어를 사용하는데도 거의 오류가 없었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자기가 할 일을 매번 너를 시키고 있잖아. 이게 전염병 환자 취급이 아니고 뭐야.”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페로몬 노출도를 최소화하려는 겁니다.”
저 딱딱한 말투도 듣다 보니 이젠 정중하게 느껴졌다.
“말은 누가 못 해. 그 핑계로 침실에 가둬 두고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