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뭘 놀라고 그래. 네가 한 짓이잖아.”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럼 후작이 저 혼자 저지른 짓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니야! 내가 하지 않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네가 아니라면 마르스티엘을 죽이고 싶어 할 인간이 또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지금처럼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건 아만다리스답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변명을 그럴듯하게 늘어놓거나, 아니면 오히려 언제라도 마르스티엘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협박을 하는 게 아만다리스다웠다.
그리고 웨이모스 후작도 그랬다.
아만다리스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절대 하지 않은 짓이라고만 외쳐 댔다. 태평하게 잠들어 있던 후작에게 미리 마련해 둔 변명이나 증거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단지 독약이 들었던 포도주만 있을 뿐이었다.
“믿어다오……. 나는 절대…… 나는 절대 너를 잃을 짓은 하지 않아. 내게는 네가,”
“시끄러워.”
더 들었다가는 머리 한구석이 썩을 것 같아 말을 잘라 버렸다.
“너는 이미 나를 잃었다. 아니, 나를 가져 본 적도 없어. 네가 가진 건 썩어 빠진 망상이 전부야. 마차를 세워. 뛰어내리기 전에.”
“…….”
한 가지 다행인 건 페란스가 아만다리스를 아는 만큼, 아만다리스도 페란스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페란스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아만다리스는 알았다. 기껏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들어 해 준 얘기들을 조금도 믿고 있지 않았다.
증명을 해야 했다.
“사람을 보내마.”
“보내지 마.”
“놈이 위스타드 출신이었다는 증거를 보내마. 보고 판단하거라.”
“하지 마. 마차를 세워!”
페란스가 아예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자세를 취하자 아만다리스도 별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마차를 세우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페란스는 마차가 미처 다 멎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전하.”
아만다리스가 부리나케 뒤를 따라 내렸다. 재주도 좋게 그새 표정을 바꾸고 있었다. 공손해진 말투와 정중한 태도를 보면 납치가 아니라 함께 외유를 하던 중이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가 내릴 테니 마차를 쓰십시오. 벌써 키사드에서 꽤 멀어졌습니다. 말을 타고 가시려면 몸이 벅차실 것이옵니다.”
“집어 치워. 저것들은 어차피 다 네가 부리는 개들일 텐데 누굴 보라고 개수작이야. 거기 너, 말에서 내려.”
마차를 앞뒤로 에워싼 인간은 얼추 열 정도였다.
페란스는 그중 하나를 지목해 손짓을 했다.
“……합하?”
그자가 주저하며 아만다리스를 쳐다보았다. 아만다리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에서 내렸다.
“고삐를 내놔.”
페란스가 그의 손에서 고삐를 홱 낚아챘다.
하필이면 알파였다. 땀내와 페로몬이 뒤섞인 가죽 고삐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욱, 제길.”
페란스는 치솟는 구역질을 참고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아만다리스가 놓치지 않았다.
“잠깐.”
아만다리스의 저지에 말에서 내린 자가 재빨리 고삐 반대쪽을 잡았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 듯 보입니다, 전하.”
아만다리스가 앞으로 다가왔다.
방금 전만 해도 그는 이 납치극을 포기하려는 듯 보였다.
아만다리스가 저지른 짓은 중죄였지만 현 섭정인 이상 그를 왕족 납치로 처벌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귀족들이야 아만다리스의 편을 들 테고 성격상 증거도 남겨 놓지 않았을 것이다. 후작의 사병들은 입을 막으면 그만이었고 페란스의 증언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이 일을 문제 삼으려고 드는 대귀족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대로 페란스를 놓아주면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몸은 멀쩡하다. 비켜.”
“아니요. 방금 헛구역질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페란스가 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은 지금은. 각인이 깨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엿보인 지금이라면.
“네 눈이 침침해진 탓이겠지. 너도 많이 늙었으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로바니,”
아만다리스는 말고삐를 잡고 있는 알파에게 손가락을 퉁겨 보였다.
“페로몬을 풀어라.”
“……?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예, 합하.”
알파는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페로몬을 풀었다.
페란스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쳤다.
“당장 거둬! 왕족 앞에서 페로몬을 개방하겠다는 건가! 목이 잘리고 싶나!”
“…….”
알파는 페란스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페로몬을 풀어 댈 뿐이었다.
“빌어먹을!”
방법이 없었다.
페란스는 고삐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에 올라탔다. 발로 옆구리를 걷어차 그대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히이이잉!
말이 거칠게 울었다.
“엇!”
그러나 알파가 더 빨랐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삐를 확 당겼다. 달려 나가려던 말이 성질을 참지 못하고 앞발을 치켜들었다.
“윽!”
몸이 붕 떴다. 어떻게든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 너무 거셌다.
히이이잉!
퍽!
두 번째로 말 등에서 튀어 오른 몸은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진 몸을 재빨리 끌어당긴 것은 아만다리스였다.
“넌 내 것이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어서 죽을 때까지.”
“미친, ……흡!”
아만다리스는 이제 체면도 돌보지 않았다. 그는 페란스의 머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입 속으로 페로몬을 쏟아 붓는 것 같았다.
“하윽, 흣!”
페란스의 몸이 거칠게 떨려 왔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성기가 찢어질 것 같았던 통증도 결국은 페로몬이 지워 없앴다. 입 속으로 들어온 아만다리스의 혀를 물어뜯으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하는 사이 입구가 툭 열리며 오메가 애액이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페로몬도 번졌다. 페란스의 페로몬을 맡은 아만다리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와 돌아가는 거야. 네 자리로 되돌려 주마.”
그가 페란스를 안은 채 일어섰다.
“놔……. 놓으…… 안,”
아만다리스는 그 희미한 저항을 웃어넘겼다. 곧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으라는 듯 질척하게 엉덩이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꼭……,”
얼굴을 기억해야 해.
이 꼴을 본 인간들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눈을 뽑아야 했다. 페로몬이 의식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페란스는 억지로 눈을 치켜떴다.
예상치 못했던 일은 그때 벌어졌다.
휘익,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알파의 눈을 뚫었다. 마치 제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 *
꼭 그때 같았다.
마르스티엘이 심장이 느려지는 약을 마시게 했던 때와.
주변이 너무 빨랐다. 화살이 빠른 건가 했는데 다른 것들도 빨랐다.
화살이 눈을 꿰뚫는 것도 빨랐고, 눈에 화살이 꽂힌 인간들이 퍽퍽 쓰러지는 것도 빨랐다. 아직 화살을 맞지 않은 것들이 아만다리스를 챙겨 마차에 태우는 것도 빨랐다. 아만다리스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빨랐고, 그 말에 저를 붙잡으려 다가오던 인간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것도 빨랐다.
멀어지는 마차가 빨랐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빨간 머리가 빨랐다. 빨간 머리의 뒤에서 활을 등에 꽂는 덩치도 빨랐다.
아…….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불쑥, 눈앞에 마르스티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게 가장 빨랐다.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빠르고 자신은 너무 느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다른 마차 안이었다. 속이 몹시 불편했다. 물컹한 습지 냄새가 났다. 누군가가 제 몸을 엎어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욕조 안이었다. 뭔지 모를 이상한 냄새가 가득했다. 습지 냄새와 비슷했지만 조금 낫긴 했다. 그래도 메스꺼워서 여러 번 구토를 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는 침대였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을 테니 자신이 몹시 어지럽다는 뜻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사하십니까?”
시야에 마르스티엘이 들어왔다.
믿지 못할 정도로 안도가 밀려들었다. 지금 그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괜찮……. ……아, 안 괜찮은가. 내가 왜 이러지? 천장이 빙빙 돌아가.”
“페로몬 때문에 발작이 왔습니다.”
“아……. 개새끼가 무식하게 쏟아 내긴 했지.”
페란스는 입술을 비틀어 헛바람 같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웃는데 온몸의 내장이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개새끼는?”
“도망쳤습니다. 메넌이 뒤를 쫓았지만 목격자가 없을 상황은 벗어난 터라 일단은 놓아 보냈습니다.”
일인용 소파 두 개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마르스티엘이 말했다. 그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았다.
나는 네가 아프면 손 정도는 잡고 기다릴 것 같은데 말이야.
“너무 먼 거 아냐? 좀 가까이 와. 말이 잘 안 들려.”
“안 됩니다.”
“왜?”
“무서워서.”
조금 뜬금없는 대답이라 페란스는 눈을 둥글게 떴다.
“뭐가?”
“……각인 반응이 평소보다 빠르게 올 겁니다. 제가 가까이 있으면 전하께서 힘드실 겁니다.”
“각인 반응……. ……아, 개새끼가 그래 놔서?”
“네.”
페란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좀 나아졌다고 생각한 것도…… 설마 다 허사가 되고…… 그런 건가?”
“아마도.”
“…….”
빌어먹을.
페란스는 눈을 꽉 감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화가 났다. 기껏 달아났다고 생각했던 거리를 개새끼는 너무 빠르게 따라잡았다.
죽을힘을 다해 가까워졌던 거리를, 마르스티엘은 너무 쉽게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