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35)화 (35/122)

35.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아아, 빌어먹을 페로몬.”

속이 시원하다 못해 유쾌했다.

뒤통수가 깨지는 것처럼 아팠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걱정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쾌했다.

“늙더니 귓구멍도 막혔나 본데. 마르스티엘이 각인을 풀 줄 안다는 소문을 아직 못 들었나?”

“……. ……그런 일은 없어!”

아만다리스가 와락 달려들어 페란스의 몸에 제 무게를 실었다.

“저리 비켜!”

“그런 일은 없다고! 각인은 절대 깨어지지 않아! 알겠느냐? 어떤 인간도 이제껏 각인을 깨지 못했다!”

“그러니까 귓구멍을 잘 뚫고 다녀야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너는 내 것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누구 마음대로? 한 대 더 맞으면 정신을 차릴……,”

숨이 막혀 왔다.

아만다리스가 미친 듯이 페로몬을 뿌려 댔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덩어리진 페로몬이 목구멍을 타고 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말을 끝맺지 못하는 페란스를 바라보며 아만다리스가 비로소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렇게 얌전해져야지.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놈이 네게 무슨 사탕발림을 했어도, 그건 다 거짓이다. 각인을 푸는 방법 같은 건 세상에 없어! 너는 여전히 내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퉤! 개소리는 좀 작작 하고.”

페란스는 아만다리스의 얼굴을 향해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방금 전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깨물면서 나온 피였다.

“각인은 벌써 깨졌어. 지금은 네 페로몬이 역해서 숨을 참았을 뿐이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갈수록 더 시큼해지는 것 같은데, 관리라도 좀 해.”

“무슨 그런……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

피가 점점이 튄 얼굴로 아만다리스는 경악을 그려 냈다.

이렇게 페로몬을 쏟아 내는데 페란스가 제정신일 수는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벌써 헉헉대며 제 손으로 바지 단추를 풀고 있었을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건 지금 네가 하는 짓이다. 왕족을 납치해서 뭘 어쩌려고?”

그러나 페란스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을 뿐이었다.

각인은 인간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깊었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을 맡기 시작한 순간 있는 줄도 몰랐던 맹렬한 회귀 본능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온몸이, 온 신경이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을 갈구했다.

그간의 노력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성감을 끈질기게 방해하는, 아랫도리의 통증이 아니었다면.

강제로 사정한 뒤 아래가 갈가리 찢긴 것 같았던 통증은 페로몬으로 넋이 나가는 것을 말려 주었다.

바지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흘러야 했을 애액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오메가 애액을 분비하는 기관 어딘가가 상해서 그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평생 불능이 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아만다리스의 저 넋 나간 표정은 지켜볼 가치가 충분했다.

“너는 내 것이니…… 당연히 찾아와야…….”

아만다리스는 할 말을 잃고 더듬거렸다.

너무도 당연히 페란스가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아래가 찢길 것처럼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보다 더 크게 웃고 싶었다.

살다 보니 이런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새 치매라도 온 모양이군. 예전에는 그래도 더러운 짓을 할 때 머리를 제법 굴렸던 것 같은데.”

“네가 이럴 수는……,”

“마차를 세워.”

페란스는 매섭게 눈을 빛냈다.

“그게 네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여기서 뭘 더 해 볼 생각이라면 네 목숨을 걸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만다리스가 한 짓을 이대로 넘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한 방편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면 큰일이었다. 최악은 각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계속 페로몬으로 제압하려 드는 것이었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마차를 세울 수 없다면 달리는 와중이라도 그냥 뛰어내려야 할 것 같았다.

각인이 풀렸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눈치챈 아만다리스가 무슨 짓을 할지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놈은 결코 네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넋 나간 듯 있던 아만다리스가 이런 말을 했다.

처음 들을 때는 그저 웃겼다.

“개소리 말고 마차를 세워. ……어이! 마차를 세워! 명령이다!”

페란스가 제 손으로 마차 벽을 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아만다리스가 갑자기 그 손을 홱 낚아채 꺾었다.

“흣,”

힘에 저항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페로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페란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을 참으며 버티는 것뿐이었다.

“내 말을 잘 들어. 놈이 그저 하늘에서 굴러떨어진 행운이라고 생각하면 네가 너무 멍청한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아.”

“아아, 페로몬이 안 통하니 이제는 이간질인가. 그런 유치한 수작을 내가 들어 줘야 해? 그것도 섭정에 대한 예의인가?”

“놈이 영지를 샀다더군. 위스타드에.”

기가 찰 뿐이었다. 그게 문제가 되리라 여긴다는 게.

“안됐네. 진작 말을 했으면 내가 사 줬을 텐데.”

“제 이름을 숨기고 대리인을 통해 샀다. 물론 너도 몰랐을 테지. 당연히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

“……내가 돈 쓰는 게 싫었던 모양이지.”

영지를 사들인 건 별일 아니었다. 마르스티엘은 장사꾼이었으니까. 그가 위스타드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대리인을 통한 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별일 아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일을 아만다리스가 지금 제 앞에서 늘어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건 놈이 그 땅을 왜 샀느냐는 게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버려진 땅을. 진작 폐허가 된 곳이다. 그렇다고 돈이 될 만한 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니지. 이 얘기를 하려고 했다. 그래서 너를 찾은 게야.”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페란스는 됐다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닥치고 마차나 세워. 내 화가 더 커지기 전에. 위스타드의 왕위 계승권자가 섭정과 나란히 앉아서 담소나 나누던 시절은 끝났어. 나는 곧 대관식을 치를 것이다. 네가 묻힐 자리나 미리 봐 두도록.”

아만다리스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놈이 네 혼인 상대라면 대관식은 없어! 어떤 대귀족도 노예 출신의 외국인을 왕으로 맞이할 생각이 없다는 걸 계산했어야지!”

“네가 믿는 건 그거 하난가? 그래, 계속 그렇게 있으라고. 대귀족들이 평생 네 발을 핥아 줄 거라 믿고 살아. 그자들이 살아남는다면 말이겠지만.”

빈정대는 페란스를 아만다리스가 물어뜯고 싶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잘 들어. 놈은 위스타드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뭐?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억양만 들어도 마르스티엘이 위스타드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봐.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폐허가 된 영지를 사들였을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위스타드에 정착할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돈이 될 만한 땅을 샀어야지. 놈은 장사꾼이 아니더냐. 게다가 그 땅과 놈을 연관 지을 만한 게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어.”

……거기서부터 웃음이 멎었다.

마르스티엘이 위스타드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그저 출신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위스타드에서 태어난 자가 이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건 추방령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추방령을 내리는 건 왕실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마르스티엘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고. 목적을 가지고 나타났을 것이라고.

“안 믿어.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성의 있는 걸 들고 와.”

아만다리스가 진실을 얘기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첫 번째 암살 실패 이후 아만다리스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과 마르스티엘을 떼어 놓을 방법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절박함은 어떤 거짓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 믿을 게 못 되었다. 믿지 않을 것이다.

“증거가 있다지 않느냐. 내 집으로 오거라. 그럼 보여 주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내 발로 죽으러 가란 말을 그렇게 뻔뻔하게 내뱉지 마.”

“내 말을 들어! 오늘 일이 이렇게 험악해진 건 내 뜻이 아니었다. 후작의 사병들이 멋대로 손을 쓴 게야. 놈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만다리스는 제법 애잔한 얼굴을 하며 아직 부어 있는 페란스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닥쳐!”

손이 닿자 미칠 것 같았다.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더 풀었다간 영혼을 내려놓고 안겨들 것 같았다. 페로몬 종속은 단순히 성욕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았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영역도 포함이었다.

마르스티엘이 애착이니 뭐니 했을 때는 닥치라는 말로 일축했지만 사실은 페란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거짓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각인이 깨어지기 전까지 아만다리스를 향한 감정은 실재한다는 것을.

지금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만다리스의 말을 믿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욕구가 올라오는 탓이었다.

“너는 내게 가장 중요한 존재다. 내 자식들과도 비교할 수 없어.”

퍽!

페란스는 이를 꽉 물고 아만다리스의 손을 쳐 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 내가 먹을 포도주에 독을 타서 보낸 네가. 어디서 감히.”

“……뭐라고?”

환장하게도, 아만다리스가 그 말을 처음 듣는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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