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젠장.”
다시 하루가 지났다.
마르스티엘이 말한 대로 성기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페란스는 낮에도 속옷을 벗은 채 나이트가운을 입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침실에 처박히는 시간이 이어졌다.
키사드의 궁인들에게도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시종장 웨이모스 후작의 몰락으로 인해 그들은 다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이라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궁인들과 후작의 사병으로 대체했던 경비병의 숫자가 수도에서 동행한 왕실 근위대와 마르스티엘의 수하들을 합친 숫자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근위대조차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블루와렌에서 상단의 호위병으로 고용한 용병들을 부르기로 했다.
페란스는 기꺼운 마음으로 입국 허가서에 서명을 했다.
늘 마르스티엘의 안위를 걱정하던 참이라 타국의 용병을 부르는 일에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였다.
하여간 아프면서도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마이카오 백작을 끄집어 낼 계획을 세우는 것이나 블루와렌과 관련한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건 괜찮았다. 마르스티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지루할 틈이 없었으니까. 성기가 찢긴 것처럼 아프다고 해도, 그게 각인을 풀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고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억지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 아만다리스를 맞이하기 위해서.
“전하. 편찮아 보이십니다. 괜찮으십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지금은 마르스티엘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빨간 머리와 덩치도 함께였다. 키사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그도 더는 상단의 일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블루와렌 쪽을 등한시하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겉으로는 너그러운 척하면서 보내 주었지만 내심 서운하긴 했다.
어쨌거나 그런 시간에, 기회를 노렸다는 듯 아만다리스가 찾아왔다. 개같은 일이었다.
“아……. 괜찮아.”
제 손으로 바지를 끌어 올리며 오만상을 쓰는 페란스를 키사드의 궁인이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았다.
그들은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게 천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블루와렌에서 왔다는 약혼자가 정말 죽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궁인들은 다들 어깨가 굳도록 고개를 낮추고 다녔다. 어차피 웨이모스 후작이 교수형을 당하고 나면 다들 쫓겨날 처지였지만 그전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손을 떠는 궁인을 힐긋 곁눈질하며 페란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픈 게 아니라 아래가 좀 쓸렸다. 너무 심하게 했나.”
“예, 전……. 예? 아니, 그……. ……예, 전하.”
가엾게도 후작을 대신해 옷시중을 들게 된 궁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데 너도 알잖아. 거기가 원래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더럽게 아프다는 거.”
“그, 그렇……. 그렇습니다, 전하…….”
쥐어짜듯 나오는 대답도 한참이나 걸렸다. 그래도 겁은 덜해졌는지 손 떨림이 잦아들었다.
“이제 됐다. 나머지를 해.”
“예, 전하.”
그럭저럭 바지를 입고 난 페란스가 시중을 허락했다. 궁인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재킷을 입히고 스카프의 모양을 잡은 다음 스카프 핀을 꽂았다.
“다, 다 됐습니다, 전하. 이제 알현실로 가시면 됩니다.”
“아, 귀찮아.”
페란스가 툭 내뱉으며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시킨 대로 근위대는 다 데려다 놓았지?”
“예, 전하.”
아만다리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보는 눈들이 많아야 했다.
궁인 중에서 이상형질을 골라 일부러 알현실에 배치시켰다. 물론 블루와렌에서 온 자들도 몇 명 알현실 옆방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예정이었다.
이건 뭐, 전쟁이 따로 없네.
페란스는 알현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짜증을 삼켰다.
뭐, 좋아.
언젠가 벌어졌어야 할 전쟁이니 일찍 드러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지 않다면 나쁘지 않게 만들기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은 이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문을 열어.”
탁.
어느샌가 알현실 문이 나타났다.
페란스가 발을 멈추고 말을 하자 근위대가 양쪽에서 하나씩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페란스 로사델 카벨리카 전하 드십니다!”
* * *
페란스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뭣도 모르고 각인을 했을 때만 예외였다. 그때는 발현열로 엉망진창이었던 데다가 실제로도 등신이긴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정말로 등신 천치 같다고 느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덫에 걸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는 걸.
그리고 아만다리스는 엄청나게 큰 쥐였다.
“앞으로 가십시오, 전하. 소리는 지르지 마시고.”
“너희들…… 제정신인가?”
페란스가 나직하게 이를 갈았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근위대는 한 명도 없었다. 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블루와렌에서 온 자들도 없었다. 알현실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페란스의 등 뒤에서 칼끝을 들이대는 자들은 근위대로 위장한 웨이모스 후작의 사병이었다.
지금쯤 후작저가 정리되며 함께 정리가 되었어야 할 사병들이 어째서 이 자리에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만다리스일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후작저에서 먼저 수작을 부렸다. 그게 아니라면 섭정의 방문과 때를 맞춰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아만다리스는 어디에 있지?”
“다른 곳에 계십니다. 외부 알현실에.”
“……그렇게 된 거로군.”
키사드에는 알현실이 두 개였다. 내부 알현실과 외부 알현실.
외부 알현실은 말이 좋아 알현실이지 사실상 없는 곳과 다름없었다. 하위 성직자처럼 신분이 없지만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자들을 대면하는 곳이라 마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만다리스가 먼저 외부 알현실로 향했을 것이다. 그와 만나는 알현실에 사람을 배치하라는 명에 따라 근위대와 궁인들이 외부 알현실로 가고, 블루와렌에서 온 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자신을 미끼로 던져 놓는 동안 후작의 사병들이 움직였다.
근위대 정복 몇 벌 따위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을 입고 들어오는 일도 별것 아니었다. 아만다리스는 현재 왕권을 대행하고 있는 섭정이었으니까.
“시차 한번 기가 막히는군. 아만다리스가 무얼 약속했나?”
잠시 움찔하던 후작의 사병이 입을 열었다.
“섭정께서는 후작님의 목숨을 보장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머저리들은 주군을 위해 이런 짓도 불사하는 중이었다.
“너희들, 반역이 무슨 죄인지는 알고 있나?”
페란스가 이 가는 소리를 감추지 않고 말을 하자 후작의 사병이 칼끝으로 등을 쿡 눌렀다.
“반역은 아닙니다. 저희들은 왕권을 대행 중인 섭정의 명으로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왕족의 몸에 칼을 대고 있잖아.”
“……섭정의 명이었습니다. 말씀은 그만하고 걸으십시오.”
“너희들, 이 죄가 저절로 씻겨 나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아만다리스야 너희들을 한 번 쓰고 버릴 생각이겠지만,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그 어떤 곳에 버려지더라도 기어이 파헤쳐 죗값을 치르게 만들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래도 저희는…… 후작님을 살려야 합니다.”
넌더리가 나지만 한편으로 페란스는 그 맹목적인 충성이 부러웠다. 자신의 주위에는 저런 인간들이 없었다. 아만다리스가 밤마다 제 침실에 들락댈 수 있는 것은 저런 인간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머리를 한번 굴리고서 이토록 쉽게 제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것도, 진심으로 왕가에 충성하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페란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후작의 죄는 너희들의 죄를 더해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이젠 교수형으로 안 끝내. 더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후작의 무덤은 그 어떤 대지 밑에도, 그 어떤 바닷속에도 없을 것이다. 내가 갈기갈기 찢어 바람에 날려 보내라고 명할 테니.”
“…….”
“…….”
등 뒤로 사병들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이 머저리들은 후작을 살리고 싶을 뿐이었다.
틈을 노린 페란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잘 들어. 너희들은,”
그때였다.
“더 들을 것 없어. 후작님의 목숨이 우선이다.”
퍽!
근위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칼등으로 페란스의 머리통을 쳤다.
……쿵!
페란스가 소리 없이 쓰러졌다.
사병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페란스를 붙잡아 어딘가로 옮겼다.
때마침 복도는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 * *
페란스가 눈을 뜬 곳은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어디……. ……흣!”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개새끼였다. 살갗을 통해 느껴지는 개새끼의 페로몬이었다.
아만다리스가 맞은편에 앉아 발정기마냥 페로몬을 줄줄줄 흘려 대고 있었다.
“미친……. 무슨 짓이야!”
“…….”
개새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페로몬만 흘려 댈 뿐이었다.
“멈춰!”
퍽!
몸을 일으킨 페란스는 팔꿈치로 아만다리스의 면상을 후려쳤다.
고개가 홱 돌아간 아만다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는 꼴을 보니 속이 좀 시원했다.
“어, 어떻게?”
“뭐가 어떻게야. 마차 세워.”
“페로몬을 그렇게 흘렸는데…….”
아만다리스는 불신이 가득 찬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