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마이카오 백작.”
“마이카오.”
그렇다고 그 나흘이 요양이라도 하듯 느슨한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과 더불어 몹시 분주했다. 침실과 침실 사잇문이 활짝 벌어진 채, 그 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였고 뭔지 모를 종이 뭉치와 책들이 잔뜩 쌓였다.
두 사람은 한참 훑던 종이들을 엎고 동시에 이름을 내뱉었다. 같은 이름이었다.
“역시 그렇지?”
“네. 왕실 공식 길드가 재산을 불리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한배를 탄 것을 알게 된 이상 더는 숨길 게 없었다.
어차피 페란스가 말하지 않아도 마르스티엘이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둘은 함께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대귀족들을 추려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스티엘은 아만다리스 가문의 돈이 오가는 흐름을 알고 있었고, 페란스는 오메가 계승권자는 알파와 정식 혼인 전까지는 대관식을 치를 수 없다는 개같은 법에 찬성한 귀족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인간으로 고른 게 마이카오 백작이었다.
마이카오 백작은 조금 특이한 인물이었다.
선대의 스캔들로 인해 백작이긴 해도 대귀족의 지위를 잃었다. 위스타드처럼 고루한 곳에서 지위를 잃었다는 것은 귀족으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누구도 마이카오를 같은 무리로 대접해 주지 않았다.
아만다리스는 유령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그를 골라 제 심부름꾼으로 삼았다.
백작이 길드 같은 곳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위스타드에서는 희한한 일이었다. 그래도 마이카오는 꿋꿋이 길드를 들락거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마이카오 가문이 다시 대귀족의 일원이 되는 방법은 아만다리스를 향해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일뿐이었을 테니.
“전하께서 약간의 권한을 위임해 주시면 왕실 길드의 자금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 쉬워질 겁니다.”
“마이카오 같은 작자가 길드 운영을 투명하게 했을 리 없지. 뒤져 보면 분명 뭔가 나올 거야.”
“제 생각도 같습니다.”
“마이카오를 건드리는 걸 아만다리스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대비를 충분히 해야 합니다.”
“알기야 알지. 그게 그렇게 쉽겠어? 네가 벌써 두 번씩이나……,”
페란스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씹었다.
다시 생각해도 섬뜩했다. 마르스티엘이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떠올리는 것도 두려웠다. 자신은 무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평생을 난해한 상실감에 허덕이며 살았을 것이다. 발정기 때는 여전히 개새끼의 성기를 빌리면서.
마르스티엘은 탁자 위로 손을 뻗어 페란스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말했듯이, 제 불찰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
잠시 그를 바라보던 페란스는 의자를 끼이익 끌어 그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이제 이 정도는 괜찮아. 그렇지 않나?”
“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래서 말인데,”
페란스가 입술을 핥았다. 갑자기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한번 빨아 보면 안 될까?”
그 말에 마르스티엘은 잠깐 눈썹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었다.
“각인 반응이 약간 둔화됐다고 해서 전하께서 제게 성욕을 느끼실 정도는 아닐 텐데요. 호기심이라면 됐습니다. 죄책감이라면 더더욱 사양이고.”
“뭘 그렇게 따지는데. 그냥 잠깐 확인 좀 하자는 건데.”
“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냥 잠깐 확인 좀 하자고 환한 대낮에 바지를 벗기는 싫고, 무엇보다 전하의 생각이 괘씸합니다.”
“뭐?”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괘씸하다고? 그건 내가 너보다 신분이 낮더라도 할 말이 아닐 것 같은데. 빨아 주겠다는 연인을 괘씸하게 여기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마르스티엘이 그 손을 홱 낚아챘다. 그가 몸을 일으킨다 싶자 자신은 손이 붙들린 채 탁자 위에 상반신을 눕힌 자세가 되어 있었다.
새파란 눈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덜미가 오싹해졌다.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마르스티엘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잠깐 빨아 보면 그만이라지만, 그다음 저는 어떡합니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마르스티엘의 허벅지가 제 다리를 벌리며 들어오는 중이었다. 소름이 돋고, 아찔했다.
발현 때부터 각인한 페란스는 페로몬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아만다리스가 그를 흥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페로몬을 풀면 그만이었다.
지금처럼 말로, 은근한 숨결로, 미세한 접촉으로 시작하는 유혹은 처음이었다.
그게 이렇게 숨 막히고 간질대는 일인지 페란스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너도…… 내가 좀 빨아 본다고 자극을 받는 건…… 아니잖아.”
입이 마르자 말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어쩌면 지금 말을 더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스티엘은 그가 했듯이 턱 아래에 대고 입김을 훅 불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뭐? 그야…… 나는 각인을 했으니까…….”
“그게 면죄부가 되어 줄 것 같습니까?”
“면죄부라니.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죄가 맞을 텐데요. 한번 빨아만 보고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건.”
“내가 꼭 그러겠다는 건 아니……,”
페란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 ……어?”
페란스는 웅얼대다 말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너 지금…….”
다리 사이로 들어온 허벅지 안쪽에 뭔가 딱딱한 게 느껴지고 있었다.
“서, 선 거야?”
말이 너무 빨리 튀어 나가는 바람에 혀를 씹을 뻔했다.
마르스티엘은 표정 변화 없이 페란스를 바라보며 하체를 더 강하게 밀착시켰다.
“보시는 대로. 그러니 궁금해서 한번 빨아 보겠다는 괘씸한 얘기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어,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데?”
“설 만하니까 섰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고! 말이 안 되잖아!”
페란스가 몸을 일으키려 팔을 허우적대다 마르스티엘의 멱살을 잡았다.
서로 코끝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내 페로몬은 너한테 전혀,”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말을 끊었다.
“계속 그렇게 계십시오.”
“뭐? 왜?”
“키스하기 좋은 자세라.”
평소보다 조금 작게 들리는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마르스티엘이 입술을 벌려 왔다.
아니, 사실 벌릴 필요도 없었다. 늘 그의 입술에 굶주려 있는 쪽은 페란스였다. 입술이 닿자마자 페란스가 배고픈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그가 혀를 얽기 전 제 혀를 그에게 밀어 넣었다.
죽을 것처럼 좋은 키스가 시작되었다. 타액은 달고, 거칠어지는 숨소리도 달고, 체온도 달고 체향도 달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키스는 늘 그렇듯 너무 빠르게 끝이 났다.
야속하게도 몸을 떼는 마르스티엘을 페란스가 확 붙들었다.
“지금, 하자.”
“무슨 말씀입니까?”
“섹스.”
몸이 달았다. 그보다 더 급하게 마음이 달았다.
페란스가 그간 섹스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최음제가 마르스티엘의 몸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던 그때도 마르스티엘의 몸을 상하게 만든다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지금은 더했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 귀하게 다루고 싶었다.
“네가 섰잖아. 나는 각인 반응이 없고. 지금 해야 해.”
마르스티엘이 눈매를 찡그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입니까?”
“섰잖아.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데.”
페란스가 그의 허리춤을 붙잡아 단추를 풀려고 했다. 막무가내로 성기 근처를 더듬는 행동에 마르스티엘은 소리 없이 혀를 차며 페란스의 손목을 잡아 말렸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전하의 몸에는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각인 반응이 없으면 그걸로 된 거 아냐? 약은 필요 없잖아.”
“젖지도 않은 곳에 억지로 넣으면 안이 찢어집니다.”
“그거야 대충 뭐라도……,”
“전하.”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각인 반응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늘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게 각인 반응입니다.”
“그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
각인 반응이라면 겪을 만큼 겪어 봤다. 적어도 페란스는 그렇다고 믿었다.
마르스티엘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그게 아니라고 했다.
“각인을 풀려고 들 때 겪는 각인 반응은 이전까지와 다를 겁니다. 각인이 풀릴 때까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알아. 각오했어. 어차피 해야 할 과정 아냐?”
“그러니까 준비를……. ……아니,”
설득이 의미가 없다고 느꼈던지 마르스티엘이 말을 끊었다.
“그럼 겪어 보십시오.”
“어차피 그럴 거면서.”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에게서 손목을 잡아 빼며 그의 바지 단추를 풀려고 했다.
그러자 마르스티엘이 몸을 슬쩍 뒤로 뺐다.
“제 건 안 됩니다.”
“뭐? 왜?”
“잘리고 싶진 않아서.”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말씀드린 대로, 겪어 보십시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허리를 붙들어 그를 책상에 앉혔다.
“읏, 뭐 하려고.”
대답은 없었다. 대신 행동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