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30)화 (30/122)

30.

“……쿨럭!”

입 속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왔다.

“뱉지 마십시오.”

모르는 새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을 뱉으려는 본능을 말린 것은 알레프의 차가운 음성이었다.

“……?”

목소리만큼 차가운 손이 페란스의 입을 막았다.

“해독제입니다. 삼키십시오. 전부.”

“…….”

페란스는 기를 쓰고 입에 들어 있는 것을 삼켰다.

목구멍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목울대가 꿀렁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알레프가 손을 치워 주었다.

“마르스티엘은?”

온몸이 물에 젖었다 쥐어 짜인 종잇장이 된 기분이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머릿속에 박힌 기억은 통증보다 선명했다.

제 소맷자락을 다급히 붙드는 페란스의 얼굴에 대고 알레프가 한숨을 뱉어 냈다.

“……버티고 계십니다.”

“해독제는? 먹였는데 소용이 없는 건가? 그런 거야?”

“아니요.”

알레프가 페란스의 손을 뿌리쳤다. 닿는 것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식이었다.

“메넌이 해독제를 구해 올 겁니다.”

“빌어먹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먹은 건 뭔데?”

“한 사람 몫밖에 없었습니다. 단주님께서 그걸,”

“날 먹이게 시켰다고?”

“그렇습니다.”

“…….”

퍽!

페란스는 양손으로 알레프를 떠밀었다. 감정이 격해져 제멋대로 나온 행동이었다. 알레프는 어이없다는 듯 페란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는데! 나눠 먹이지 그랬어!”

“……효과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페란스는 알레프를 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부르르 떨리는 손은 몸이 비틀대는 바람에 사람을 치는 게 아니라 붙잡아야 했다.

“그래도……, 그래도…….”

“단주님이 말씀하시면, 저는 듣습니다. 지금은 전하를 돌보라 하셨습니다.”

“닥치고 마르스티엘에게 데려가.”

페란스는 기듯이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지금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마르스티엘은 옆방에 있을 것이다. 고작 문 하나를 밀면 되는 곳에 지금 제 발로 걸어갈 힘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데려가.”

가슴이 섬뜩했다.

그는 오늘 마르스티엘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돼.

알레프의 팔을 매달리듯 붙든 페란스는 말을 듣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었다.

너는 죽어선 안 돼. 나는 너를 잃을 수 없어.

한밤중에 조용히 침실 문이 열릴 때보다 몇 배나 더 끔찍한 공포가 페란스를 사로잡았다.

절대로 그를 잃을 수 없었다.

비로소 페란스는 카벨리카라는 이름이 그려 놓은 선이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페란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마르스티엘이 데려온 자들이 전부였다. 페란스는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을 동쪽 탑에 들여 침실을 지키게 했다.

다행히도 해독제는 효과가 빨랐다. 마르스티엘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페란스는 그 곁에서 차츰 기력을 회복했다.

세 시간쯤 지나자 손발을 떨지 않고 얘기할 수가 있었다.

그때가 밤 10시가 막 넘어가는 무렵이었다.

페란스는 옷을 갈아입고 근위대를 불러들였다. 그가 근위대에게 내린 명령은 웨이모스 후작을 끌고 오라는 것이었다.

“저, 전하…….”

웨이모스 후작은 의자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날 때부터 대귀족으로 태어나 온갖 영화 속에서 살아왔을 후작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후작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다. 페란스가 급하게 찾는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달려왔다. 독을 탄 포도주를 보낸 인간치고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 신은 통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른다고?”

의자에 앉아 후작을 맞이한 페란스가 꼬았던 다리의 방향을 바꾸었다.

오늘따라 얼굴이 희었다. 대리석상 같았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는 그가 숨을 쉬는 사람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눈이 부신 외모였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성장을 한 페란스 왕자는 그 자체로 권력처럼 보였다.

“뭐, 나도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공은 모를 수도 있겠지. 공의 아랫것들 중 누군가가 다른 데서 사주를 받고 독을 섞을 수도 있었겠지. 나는 무조건 공을 의심하진 않겠다.”

“도…… 독이라고 하셨습니까?”

웨이모스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온지요! 대체 어느 누가 감히 키사드에 그런 물건을 들여왔단 말입니까! 저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나이다.”

“내 약혼자가 독을 먹었다. 아니라면 그가 왜 여기 누워 있다고 생각하나.”

일부러 후작을 침실로 불렀다. 그를 끌고 온 근위대까지 전부 왕실의 증인이 될 것이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덮은 이불을 약간 끌어 내렸다. 안타까운 손이 진땀이 배어나는 뺨을 어루만졌다.

“내 자비는 거기까지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시선 없이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이 분위기를 더 경직시켰다.

“만에 하나 내 약혼자가 눈을 뜨지 못한다면, 나는 그 책임을 이 성에 있는 이 전부에게 묻겠다. 그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전부 목이 잘릴 것이다.”

후작은 당황해 양손을 의미 없이 버둥댔다.

“저, 전하! 시, 시간을…… 시간을 주십시오! 어떻게 된 일인지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그러든가. 시간은 내 약혼자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이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누워 있던 마르스티엘이 갑자기 몸을 뒤틀더니 피를 토했다. 곁에서 그를 매만지던 페란스에게 핏물이 고스란히 튀었다.

페란스는 피하는 대신 벌떡 몸을 일으켜 마르스티엘을 받아 들었다.

“정신이 들어? 몸은 어때? 많이 괴로운가?”

“잘 모르……. 전하, 피가 묻……, …….”

몇 번 더 붉은 피를 뱉어 낸 마르스티엘은 그대로 혼절했다.

“…….”

잠시 그대로 서 있던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반듯하게 침대에 눕혔다. 페란스가 고른 흰 옷은 마르스티엘이 뱉어 낸 피로 젖어 김이 올랐다.

페란스는 천천히 뺨에 묻은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늘 지나칠 정도로 영롱하다는 말을 들어 온 초록색 눈이 지금은 감정 없는 보석처럼 차가웠다.

“웨이모스 공.”

“……? ……저, 전하!”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에게서 시선을 떼어 후작을 응시했다.

“왜 아직도 거기에 엉덩짝을 붙이고 있나. 어서 꺼지지 않고.”

“저, 전…….”

퍽!

페란스가 의자를 걷어찼다.

목에 핏대가 오를 정도로 힘을 주고 거친 말을 쏟아 냈다.

“귓구멍이 막혔나! 당장 가서 뭐든 하라고! 독을 쓴 쥐새끼를 잡아 오든지! 아니면 내 약혼자를 살릴 방법을 마련해 오든지! 뭐라도 하란 말이다!”

“아. 알겠나이다!”

넋이 나간 후작은 벌떡 일어서서 인사도 없이 침실을 뛰쳐나갔다.

“전하…… 앉으십시오.”

근위대가 눈치를 보다 쓰러진 의자를 일으켰다. 페란스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손짓을 했다.

“너희들도 나가. 가서 후작이 하는 짓을 거들어라. 혹시나 증거를 빼돌리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해.”

“명을 받듭니다.”

근위대가 우르르 침실을 빠져나갔다.

침실 안은 페란스와 마르스티엘, 그리고 알레프만이 남았다.

이제껏 묵묵히, 유령처럼 존재감 없이 서 있던 알레프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다 목을 자르실 겁니까?”

“……그래.”

“그럼 진짜 증거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그게 중요한가?”

페란스는 피곤한 얼굴로 팔걸이에 올린 팔에 몸을 기댔다.

“후작은 모르고 있었어. 누가 시켰겠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후작이 한 짓이라면 그렇게 태평하게 제 집에 있을 리가 없지. 진작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범인이야 뻔하지.”

아만다리스일 것이다.

키사드 궁에 사람 하나 심는 건 개새끼에게 일도 아니었다. 웨이모스 후작과 아만다리스는 딱히 소문난 우호 관계는 아니라지만 사이가 나쁠 이유도 없었다.

자신이 발정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후작이 아만다리스에게 알렸고, 아만다리스가 손을 쓴 거라면 아귀가 맞았다.

발정기일 테니 포도주를 마실 정신이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독은 마르스티엘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

팔걸이를 붙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안일했다. 개새끼가 얌전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심했다.

마르스티엘은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습격을 당했다. 개새끼가 제 인맥을 동원해 판을 깔았다. 마르스티엘은 자신이 방심한 탓이고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겼지만 동조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것을 알면 더 날뛰겠지.

대비를 해야 했다.

이제 더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각인이 풀릴 때까지만 마르스티엘을 이용한다는 나약한 생각도 그만둬야 했다. 저는 은연중에 마르스티엘과의 혼인을 귀족들이 반대할 것이고, 자신은 그에 맞서지 못하리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개새끼의 반발을 당연한 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마르스티엘이 왕실 공식 길드장을 방문하고 습격을 받았다고 했을 때 관련자들을 다 끌어와 목을 잘랐어야 했다. 개새끼니까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애초에 하질 말았어야 했다.

“……잘된 일이야.”

페란스가 혼자 나지막하게 중얼대는 소리를 알레프가 들었다.

“뭐가 잘됐다는 겁니까?”

“이번 일.”

“단주님께서 독을 드신 일 말입니까?”

“무사히 깨어나기만 하면.”

개새끼가 부리는 것들이 결국은 마르스티엘과의 혼인을 반대할 것들이었다.

이참에 싹 다 걸러 내어 목을 자르면 그와 혼인할 수 없는 이유도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굳었다.

저는 카벨리카 왕실 최초로 노예 출신과 혼인하는 왕이 될 것이다. 그게 어떤 기록으로 남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개새끼는 죽어야 했다. 그가 죽지 않는다면 마르스티엘이 죽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마르스티엘과 혼인하는 것, 그게 개새끼를 죽이고 원래 제 몫이었던 권력을 되찾아 오는 일이었다.

페란스는 시선을 돌려 죽은 듯 잠에 빠진 마르스티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네가 무사하기만 하면.”

무사하기만 해라.

그럼 나는 그 누구라도 죽여 없앨 테니.

대답처럼 마르스티엘의 검은색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메넌이 돌아온 것은 그가 두어 번쯤 더 각혈을 하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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