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29)화 (29/122)

29.

거짓말이었잖아.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각인 상대는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될 수 없었다. 개새끼야 자의로 한 게 아니었으니 열외였다. 미친 듯이 자라난 울화가 다른 감정들을 전부 잡아먹어 버렸다.

대체 어떤 인간이야.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너를.

너는 대체 어떤 인간을.

지금 제 귀에 들려온 모든 말에 화가 났다.

마르스티엘에게 최음제가 해롭다는 것, 그 이유가 각인했던 과거 때문이라는 것, 각인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각인을 할 정도로 마음에 깊이 담아 둔 인간이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게.

저릿대는 손을 마구 움켜쥐던 페란스가 몸을 홱 돌렸다.

“그럼 제 말을 들어주실 겁니까?”

알레프라는 이름을 지닌 덩치가 다급히 물었다.

“봐서.”

쾅!

페란스가 욕실 문을 열었다.

마르스티엘을 붙들고 아무 데라도 한 대 치고 싶었다. 반대로 멱살을 끌어와 지칠 때까지 키스하고 싶었다. 머리가 뜨거웠는데 손끝은 차가웠다. 죽을 것처럼 화가 나는데 정작 화를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왜?

침실 문을 열려던 손이 주춤했다.

개새끼의 셋째 오메가 아들이나 예쁘장한 빨간 머리는 화를 낼 만했다. 그건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일도 화를 낼 수 있는 걸까.

각인은 이미 풀렸다. 마르스티엘이 제 앞에서 각인 상대에 대한 감정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그 탓에 문제가 있다는 최음제도 저에게는 별말 없이 받아 삼키고 성실히 거래에 임했다.

“…….”

화를 낼 게 아니었네.

손잡이를 잡은 손에 마디가 하얗게 일어났다.

과거를 문제 삼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속 좁은 연인이나 그럴 것이다.

나는 연인이 아니니까……. ……빌어먹을.

연인처럼 구는 것과 연인의 감정을 갖는 것은 달랐다. 선을 넘고 있는 것은 마르스티엘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후.”

페란스는 긴 숨을 내쉬었다.

선을 덧칠해야 했다. 더 깊고, 더 진하게. 거기 선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모를 수가 없도록.

끼릭.

머릿속에 그린 선이 충분히 진해졌다 싶을 무렵, 페란스가 손잡이를 돌렸다.

* * *

오늘은 그 불유쾌한 침대가 보이지 않았다.

메넌도 없었고 양동이도 없었다.

대신 마르스티엘이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나?”

페란스는 지금도 갈등 중이었다.

그에게 턱없는 위험을 무릅쓸 것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이런 언급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했고, 반대로 감정이 뭉클 끓어오르기도 했다.

장사꾼이면 장사꾼답게 굴라고.

너와 나의 거래에 터무니없는 에누리를 붙이지 마. 적당히 주고 적당히 받아 가.

더는 나를 미안하게 만들지 마…….

“약만 복용하면 됩니다. 받으십시오.”

마르스티엘이 두 잔의 유리잔 중 하나를 건넸다.

“오늘은 술이 약이라는 건가?”

“사실 맛이 썩 좋진 않아서 술에 섞었습니다. 목 넘김이 한결 낫습니다.”

“…….”

페란스는 말없이 잔을 받았다.

그때 약 맛을 두고 불평을 했던 것을 들어 두었던가 싶어서 입 안이 써졌다.

대체 어떤 인간이었던 거야.

순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졌다. 마르스티엘을 거부한 인간이 누굴지.

모르긴 해도 지독하게 멍청한 작자일 게 뻔했다. 마르스티엘은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큼,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상대를 위했을 것이다.

“알레프가 말하길 웨이모스 후작이 가장 아끼는 와인을 내어주었다 했습니다. 맛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결심이 섰다.

자신이 그의 몸을 걱정해 거래를 미루는 것은 선을 넘는 짓이었다. 마르스티엘이 하지 않은 말이니 저도 못 들은 척하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챙.

페란스는 유리잔 끝을 마르스티엘의 잔 끝에 가볍게 부딪쳤다.

붉은색 액체가 흔들리고, 그저 취하고 싶다는 생각에 페란스가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잔 더.”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다시 페란스의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준 다음, 마르스티엘도 잔을 들어 올렸다.

꿀꺽 꿀꺽…….

페란스가 두 번째 잔을 비웠을 때 마르스티엘도 제 잔을 다 비웠다.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 된 것 같아. 후작은 그새 병이라도 생긴 모양이야. 이런 걸 가장 좋은 술이라고 내오다니. 끝맛이 떫어.”

“약 맛이 혀에 남아 그럴지도 모릅니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에서 잔을 가져갔다.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은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

페란스는 그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섰다.

페란스를 마주 서게 만든 마르스티엘은 한 손으로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눈썹에 입술을 붙이며, 그가 다른 손으로 가운을 묶은 끈을 풀었다.

“오늘은 왜 다른 건데?”

페란스가 물었다. 마르스티엘은 입술을 조금 내려 눈꺼풀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싫으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르잖아.”

“그때는 섹스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 어?”

“둘만 하려던 게 아니었잖습니까.”

“그건 좀 이상한데. 벌려서 넣으면 섹스라고 하던 건 너였잖아.”

“겪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거지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거지같다는 말을 하기 전 약간의 틈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몹시 거친 단어를 내뱉기 전에 억지로 순화하려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아, 그렇다니 다행이네. 내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가 찼는지 너도 이제 알았을 테니.”

“네.”

스르륵, 가운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마르스티엘이 끌어 내린 탓이었다.

“전하께서 미리 아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네 입에서 반성한다는 말을…… 흣, 들으니 신선한……데.”

페란스의 말이 느려졌다. 벗은 어깨를 마르스티엘이 손등으로 느리게 쓸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반성입니까?”

“그게 그거……잖아. 아…….”

손등이 스쳐 간 살갗이 오르르 떨려 왔다. 페란스가 이를 악물자 마르스티엘은 늘 하던 대로 손가락 끝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벌써 각인 반응이 오는 중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좀…….”

“아니라면?”

너무 떨려서.

“……추운 것 같아서…….”

“그건 아닐 겁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심장이 시끄러울 정도로 부르르 떨리고 있는 이유를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한쪽 어깨에밖에 걸려 있지 않은 가운 속으로 손을 넣어 맨 허리에 팔을 감았다. 순식간에 와 닿는 체온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전하.”

마르스티엘이 다른 손으로 끝도 없이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 페란스는 사랑스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마르스티엘은 사랑스러운 존재를 대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 숙여 입술이 닿을 것처럼 붙여 오며 속삭였다.

“키스해 주십시오.”

“아…….”

제 입에서 말이 아닌, 다른 소리가 흘렀다.

다음 순간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목을 휘어 감고 입술을 겹치는 중이었다.

각인 반응이 곧 오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초조했다. 입술이 맞닿자마자 잇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혀끝이 입천장을 맛보는 것도 잠시, 그대로 혀를 빨렸다. 혀가 엉기며 들리는 타액 소리가 고막을 오싹 긁어 왔다.

“하, 흐…….”

숨이 가빠 왔다. 혀가 닿은 것은 일 초도 되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이건 너무하잖아.

페란스는 더 안타깝게 마르스티엘의 혀를 빨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흡!”

그러나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이 너무 가빴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홱 떠밀면서 울컥,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쏟아 냈다.

“쿨럭, 쿨럭! ……컥!”

뭐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그를 밀어내자마자 머리가 핑 돌면서 다리가 힘을 잃었다.

페란스는 더러워진 바닥 위로 주저앉았다. 더럽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흰 피부에 붉은 액체가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이게…… 뭐야?”

“……컥!”

그와 동시에 마르스티엘도 몸을 숙이고 구토를 했다.

아니, 구토가 아니었다. 그가 뱉어 낸 것은 피였다.

“무슨…….”

마르스티엘이 붉어진 입가를 닦으며 작게 말했다.

“독 같습니다.”

“독……?”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붙들었다. 사실 일으키려 한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일어설 만한 힘은 없는 듯했다.

“눈을 감지 마십시오.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그는 바닥을 더듬어 몸을 일으켰다. 페란스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비틀대는 등을 바라보았다.

……덜컥.

위태롭게 걸어간 마르스티엘이 문을 열기까지 영원이 걸린 듯했다.

……미안. 더는 눈을 못 뜨고 있겠어.

문이 열리고, 빨간 머리가 들어서며 쓰러지는 마르스티엘을 부축하는 것까지 본 페란스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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