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대외적으로 페란스는 발정기를 맞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페란스와 마르스티엘이 묵는 동쪽 탑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무도 얼씬대지 않았다. 목욕물을 들여오는 것은 마르스티엘의 수하들이 했고, 식사는 요구가 있을 때에만 궁인들이 성 지하의 부엌에서 동쪽 탑에 가장 가까운 다이닝룸으로 가져왔다.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좋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발정기가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알릴 수 있을 때까지는 꼼짝없이 침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가 마르스티엘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마르스티엘은 위스타드 밖의 세상에 관해 경험이 풍부했고, 박식했다. 어쩌다 대화가 시작되면 자신이 이제껏 있는 줄도 몰랐던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나직하고 깊은 목소리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대화가 끊길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실 그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페란스는 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느꼈다.
“이제 괜찮다니까.”
페란스는 제 팔뚝과 부러진 손톱에 치덕치덕할 정도로 약을 펴 바르는 마르스티엘을 노려보았다.
“아직 멀었습니다.”
“피도 멎었고 딱지도 앉았잖아. 이제 좀 가렵기만 할 뿐이야. 할 수 있어.”
“그게 다가 아니잖습니까.”
달칵.
약병을 내려놓은 마르스티엘은 그다지 곱지 못한 페란스의 시선을 마주했다.
페란스는 다시 한번 각인을 푸는 시도를 하자고 우기는 중이었고, 마르스티엘은 아직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아래도 아직 덜 아물었을 겁니다.”
“아픈 데 없다니까.”
“만에 하나 다 나았다고 해도 다시 다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너도 이게 얌전한 섹스가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잖아.”
아만다리스와 할 때에도 다치는 일은 예사였다. 아래에서 피를 본 적도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안전한 삽입은 오메가 애액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때는 상처를 감추기에만 급급해서 약을 바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제 몸의 상처는 다 자신이 만든 것이고, 그런 상처를 일일이 보살피는 마르스티엘 덕에 호사스럽다고 느껴질 판이었다.
“생각과 직접 보는 것은 다릅니다.”
“언제까지 발정기 핑계를 댈 수도 없잖아. 발정기는 길어도 나흘 정도야. 그 이상이 되면 웨이모스 후작이 냄새를 맡을지도 몰라.”
“각인을 푸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몸을 혹사해 가며 강행해도 전하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빠르게 각인이 풀리진 않을 겁니다.”
“각인 반응은 줄었잖아.”
오늘 당장 각인을 풀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각인 반응이 오는 시간이 조금만 더 늦춰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효과가 있다는 소리잖아. 나는 그거면 돼. 일단은.”
“각인 반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조금 늦춰진다고 해도 불완전한 건 여전합니다.”
그 조금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일 것이다.
페란스는 조금만 더 길게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길게 그의 체향을 맡고 조금만 더 길게 그를 안고 싶었다.
……이러니까 내가 너를 연모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데.
페란스는 눈매를 찡그렸다.
아니……. 그게 맞나.
이런 마음을 부르는 다른 말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단둘이 보내는 이틀이 너무 길었다. 매 순간이 전부 괜찮은 기억들로 채워진 이틀은 마르스티엘을 가둬 놓은 선을 옅어지게 하다 못 해 녹이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내가 너를 연모하고 있다면 그건 너무 속 편한 짓이지.
그건 내 이름이 카벨리카가 아닌 세상에서나 할 수 있는 짓이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나는 하겠어.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
“제가 안 괜찮습니다.”
마르스티엘은 그런 말로 페란스를 괴롭게 만들었다.
“내가 괜찮다잖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고집을 피우시는군요.”
마르스티엘은 어쩐지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붕대를 마저 감았다.
“그럼 오늘은 손발을 전부 묶겠습니다.”
“알겠다. 시간은 언제?”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한 시간쯤 걸릴 겁니다.”
“그럼 한 시간 뒤에 해.”
이렇게까지 조급하게 구는 이유를 페란스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있다 보면 원래의 목적을 아주 쉽게 잃어버릴 것 같다는 막연한 공포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몸이 괴롭기라도 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뜻대로.”
탁.
마르스티엘은 붕대와 약병을 한쪽으로 치운 뒤 침실을 나섰다.
고작 이틀을 같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침실의 온도가 내려갔다.
피부에 와 닿는 온도가 괴로웠다.
* * *
나머지는 이틀 전과 같았다.
마르스티엘이 돌아올 때까지 구석구석, 껍질이 까질 정도로 씻어 댄 페란스는 가운만 걸친 차림새로 욕실을 나왔다.
욕실에서 침실로 이어지는, 거울과 화장대가 놓인 공간에 멈춰 선 페란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할 수 있겠지.
각인 반응을 동반할 섹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 수 있어.
마르스티엘에게 지금 이상의 감정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 못할 것도 없잖아.
어차피 그자도 제 역할을 하는 걸 텐데. 나는 내 역할을 하면 돼.
각인이 풀릴 때까지는 애정에 눈이 멀어 뭐라도 빼 줄 것 같은 연인 노릇을 하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헤어지는 게 제 역할이었다. 마르스티엘에게는 그때 가서 충분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그럼 되는 일이었다.
“……!”
거기까지 생각하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중이었다.
페란스는 갑자기 거울에 나타난 인형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이 나오기 전, 갑자기 나타난 그가 재빨리 다가와 페란스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할 얘기가 있을 뿐입니다. 단주님이 모르시게.”
“…….”
회색 머리의 덩치였다.
페란스는 덩어리진 것 같은 호흡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머리는 침실 쪽으로 향한 문을 힐끗 보더니 그를 욕실로 끌고 갔다.
탁.
문이 닫혔다.
덩치가 막았던 입을 놓아주었다. 힐긋 고개를 돌리니 분명히 닫혀 있었던 욕실 창문이 열린 채였다. 덩치는 벽을 기어올라 저 창문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저 덩치로 그렇게나 날렵한 행동이 가능하다는 게.
“재주가 많은 자였군.”
페란스가 툭 던지는 말을 덩치는 듣지 않는 척했다.
“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오늘은.”
“칭찬을 하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라. 그게 왕족을 대할 때의 예의다.”
“단주님 몸에는 최음제가 해롭습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지 못하실 정도로.”
“…….”
페란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덩치는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가 왕족의 눈치를 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고, 무례를 저지를 각오를 할 만큼의 얘기를 해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짜증나.”
덩치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그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최음제가 해롭다는 말을 무시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해롭다면 얼마나?”
“아주 많이.”
덩치가 입술을 우물대다 침을 삼켰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그가 이를 갈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각인 반응보다 심한가? 내가 볼 땐 그런 것 같지 않았는데.”
“……부작용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그게 뭔데?”
덩치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제가 말씀을 드리면, 하지 않으실 겁니까?”
“일단 들어 보고 나서.”
마르스티엘에게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히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겁을 집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마르스티엘의 충성스러운 수하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단주님이 드시는 최음제는…… 페로몬에 무뎌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건 알 것 같았다.
그에게 제 페로몬은 불쾌할 테니까. 성기를 내내 세우고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페로몬에 노출되어도 그게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집니다.”
그건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마르스티엘에게 페로몬에 노출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 ……네.”
“그게 뭔데?”
덩치는 한참을 더 갈등했다.
그런 걸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각인을 풀게 되면 아시게 될 겁니다. 한 가지 페로몬에 장시간 노출되는 게 위험합니다. 그 최음제를 복용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차피 각인을 풀면 알게 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페란스의 얼굴이 더 구겨질 수 없도록 구겨졌다.
“나는 아직 각인을 풀지 못했……. ……잠깐, 그건 설마 마르스티엘의 얘긴가?”
덩치가 대답에 앞서 입술을 꽉 물었다.
“……예.”
“그가…… 각인한 적이 있었다고? 그럼 그게……,”
발정기 때 각인한 몸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안다고 했다.
그런 인간들을 보아 왔다는 말이 아니라 직접 겪었다는 의미였다.
“그게……,”
너무 많은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연민과 안타까움, 애정과 분노가 뒤섞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라는 존재가 가깝게 다가오기도 했고, 반면에 섬뜩한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누구와? 언제?”
덩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단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럼……. ……빌어먹을, 비슷하다는 페로몬이라는 그거겠군.”
처음 맡은 페로몬과 자신의 페로몬이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역하지 않다고 했다. 그런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머릿속이 확 끓어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고 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