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페란스는 그게 좀 궁금했다.
마르스티엘은 자신이 이런 동작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기분이 나빠지는 틈을 기가 막히게 노려 그때마다 턱을 붙들고 눈을 바라보게 만드는 걸까.
알고서 하는 짓이라면 마르스티엘은 천부적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빠지도록 만드는 법을 너무 명확히 알고 있었다.
“미뤘던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전하께서 제 수하에 관해 할 얘기가 있었다고 하신 것, 기억하십니까?”
“……그랬나?”
빌어먹을 두통이 아니라면 아래가 섰을지도 몰랐다.
“메넌에 관한 말이었습니까?”
“그게……. ……그랬던 것 같은데.”
“해 보십시오. 지금.”
턱을 붙든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마음껏 힘을 주지 못하는 손을 대신해 새파란 눈빛이 턱을 틀어쥐는 것도 같았다.
“이상형질이 아닌지 물으려고 했어.”
“그게 왜 궁금하셨습니까?”
“……너무 그럴싸해서.”
“뭐가?”
“얼굴이.”
“…….”
마르스티엘의 눈이 좀 더 파래졌다. 희한한 눈이었다. 색이 옅어 그런지 각도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다채로운 빛을 드러냈다.
“그래서, 알파라면?”
“알파?”
“달라고 하실 참이었습니까?”
“……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생각이었다.
“설마 그 얼굴이 알파라는 거야, 지금?”
“네. 그럼 뭐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이상형질이 맞는다면 당연히 오메가일 줄 알았어. 뭐야, 알파 주제에 뭐 그리 예쁘게 생겼는데.”
새파랗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메가라는 게 거슬렸던 겁니까?”
“너는 내 옆에 알파가 늘 어슬렁대면 기분이 괜찮을 것 같나? 나는 안 그럴 거라고 분명히 말했어.”
“네. 기억합니다. 전하께서는 질투가 많고 속이 좁다는 걸.”
“제기랄. 내 입으로 한 말이지만 그렇게 대놓고 다시 읊지 마.”
턱을 쥔 손이 느슨해지며 엄지가 입술을 눌렀다.
“왜 이렇게 귀엽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페란스는 억지로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 지금 뭐라고 했나?”
“곤란합니다. 각인 반응이 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귀엽게 구시면.”
“지금 그게 네가 내게 하는 말인가? 그새 신분 차이를 잊은 건 아닐 텐데.”
“안 잊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하는 무척 귀여우십니다.”
헛소리를 중얼댄 마르스티엘이 불쑥 몸을 들어 입술을 겹쳤다.
“……흣,”
두통이 엄습했고, 입술은 저릿했다.
페란스가 두통을 감추느라 시트를 움켜쥐는 사이 제 혀를 옭아매고 빨아들이던 마르스티엘의 혀가 빠져나갔다.
좀 전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키스를 마친 그가 언제나처럼 입가를 닦아 주었다.
“잘 참으셨습니다.”
“…….”
마르스티엘은 페란스가 무얼 참아 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키스를 했다. 쾌감도, 의무도 없는 키스였다면 무슨 의미였던 것인지 궁금했다.
어느 순간 약혼자가 귀엽게 느껴지면, 키스를 참을 수 없는 걸까. 그가 방금 한 키스는 그런 의미였을까.
“그리고 저는 메넌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걸 신경 쓰셨던 거라면.”
페란스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혀를 찼다.
“알파인 걸 알았으니 됐어.”
“혹시라도 계속 질투를 느끼실까 봐.”
“됐다니까. 젠장, 그만 놀려. 왕족 모욕죄가 되기 전에.”
마르스티엘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늘이며 붕대를 꺼내 들었다.
“손을 주십시오. 감아 드릴 테니.”
양팔을 내밀자 그가 약을 바른 팔에 꼼꼼하게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어쩐지 눈이 감겼다. 이대로 다시 잠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잠이 든 동안만이라도 각인 반응이 오지 않는다면 좋을 것 같았다. 달고 깊은 꿈처럼.
* * *
“……! 뭐 하는 건데!”
하지만 치료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붕대를 감고 난 마르스티엘이 파자마 바지에 손을 대는 순간 페란스가 반쯤 감겼던 눈을 퍼뜩 떴다.
황당하게 벌어진 눈으로 마르스티엘을 보는데 그는 오히려 왜 그러냐는 식이었다.
“아래도 상처가 남았을 겁니다.”
“아래에…… 뭐?”
“저와 하실 동안은 오메가 애액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 그래서?”
“안타깝게도 안쪽까지 다 살펴볼 수는 없으니 약을 발라 두는 게 좋습니다.”
페란스의 뺨이 벌게졌다.
“아니, 그건 됐어. 더는 하지 마라.”
“안 됩니다.”
마르스티엘은 단호했다. 페란스는 달아오른 뺨을 실룩거렸다.
“아까부터 네가 자꾸 선을 넘는 것 같은데. 하지 말라고 했다.”
“전하와 제 사이에 선이 필요합니까?”
“뭐라고?”
마르스티엘은 파자마 바지를 묶은 끈을 잡아당겼다.
“그런 건 이제 없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무슨……. 내가 언제.”
“저와 섹스하기 전. 어떤 경우에라도 거래를 무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르스티엘은 그의 손을 쥐고 억지로 떼어 내려는 페란스를 가볍게 뿌리치며 바지를 끌어 내렸다.
“저는 전하의 유일한 반려가 될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아니, 그게……. 그렇다고 해도 네가 이따위로 구는 건 용납 못,”
“이런 내밀한 일은 반려자의 몫입니다, 전하.”
“아니, 아니라고! 너는 안 돼!”
마르스티엘이 잠깐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다른 자에게 맡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해!”
계속해서 내려가는 바지를 애써 붙드는 페란스를 마르스티엘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쪽은 도무지 바지를 빼앗아 올 수가 없는데 그는 혼자 여유로워 보여 열이 받았다.
“그렇게 하라니까!”
“……안 되겠습니다.”
“왜 안 되는데?”
“제 성기가 들어가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섹스와 다름없는 행위 같아서 말입니다. 전하의 약속과 어긋납니다.”
“약을 바른다고 한 거 아니었어?”
스륵!
마르스티엘이 바지를 가볍게 벗겨 냈다. 맨다리가 노출되고, 살갗에 우스스 소름이 돋았다.
“네. 약을 바를 겁니다. 그런데 여기를 벌려서,”
쿡!
마르스티엘의 손가락이 고간 너머 어딘가를 찔렀다.
“흣!”
순간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두통이 머리를 조이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수치심과는 조금 다른 당혹감이 각인 반응으로 인한 통증을 둔화시켰다.
가슴에 약을 바르느라 상의는 양옆으로 활짝 벌어진 채였다. 하체는 아무것도 없어서 시야 한구석에 금색 음모가 보일 지경이었다. 해가 비쳐 흰 살결의 솜털이 반짝댈 지경이었는데 마르스티엘이 제 다리 사이로 손을 넣고 있었다.
한쪽 손이 엉덩이를 잡고, 다른 손이 그 사이를 간질이듯 두드렸다.
“부드럽게 만든 다음 제 손가락을 넣고 휘저어야 하는 일은 섹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아니 그걸……. ……흡,”
“그래서 다른 자에게는 맡길 수 없습니다. 메넌뿐만이 아니라 베타나 오메가라고 해도 안 됩니다.”
메슥거림이 언제 구토로 이어질지 몰라 페란스는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입을 막으니 저항해 봤자 칭얼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사이 마르스티엘은 제 손가락에 약을 듬뿍 칠했다.
약병을 내려놓은 그가 페란스의 한쪽 다리를 제 허벅지에 올려 엉덩이가 벌어지게 만들며 약을 바른 손가락으로 입구를 문질렀다.
허벅지를 누르는 힘은 강하고 단호했다. 마르스티엘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자신도 반쯤은 그가 하는 말에 수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벌려서 넣는다는 점은 섹스와 비슷했고, 그러니 다른 인간이 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말도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짧게 끝내겠습니다. 혹시 제 손가락이 닿은 부위가 아프다면 알려 주십시오. 거기 상처가 났다는 소리일 테니.”
“그냥……. 빨리 해…… 버려.”
모기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를 듣고 마르스티엘이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 잘 참으시면 다음에는 혀로 발라 드리겠습니다.”
“뭐…… 뭐?”
“너무 깊은 곳까지는 안 되겠지만.”
“…….”
얼굴로 화끈, 열이 올랐다. 입을 가린 손바닥이 뜨끈해질 지경이었다.
“전하께서는 아래도 보기 좋으시군요. 환한 시간이라 잘 보여서 좋습니다.”
페란스는 얼굴 전체를 가린 채 허리를 뒤틀었다.
“제발…… 엉뚱한 소리 좀 하지 마…….”
“각인이 풀리면 지금처럼 창으로 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침대에서 섹스하고 싶습니다. 전하의 몸에 난 솜털 하나하나 전부 보고 싶습니다.”
“…….”
페란스는 무슨 말을 하는 대신 뜨겁게 앓는 소리만 흘렸다.
뭔가가 제 안에서 툭, 부서진 기분이었다.
-전하와 제 사이에 선은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선일지도 몰랐다.
마르스티엘의 존재를 거래라는 영역 안에 가둬 두고 있었던, 제 손으로 지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이.
……젠장. 미치겠네.
하지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그 선은 스스로 알아서 계속 흐려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