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페란스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마르스티엘의 얼굴을 마구 쓸어 댔다.
“이게 괜찮다면…… 그러면…… 정말로……?”
“각인이 풀리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진전이 있었습니다.”
“다시 해.”
페란스가 허겁지겁 입술을 겹쳤다. 마르스티엘이 곤란하다는 듯 콧등을 찡그리더니 정중하게 페란스를 말렸다.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페란스가 계속 입술을 비벼 대는 바람에 둘 다 발음이 조금씩 뭉개졌다.
“저와 처음으로 나눈 키스의 기억이 전하께 괜찮았다고 기억되길 바라니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괜찮지 않으면 더 하자고 하겠어?”
“더 하면 괜찮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기랄.”
페란스가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대신 아쉬움을 가득 담아 이마를 기댔다.
“네 말이 맞아. 더 하다 보면 결국 못난 꼴을 보이겠지.”
“그것도 사랑스러우실 테지만.”
마르스티엘이 그렇게 중얼대며 얼굴을 살짝 떼어 페란스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건 또 뭐야.
몸속이 저르르 울리는 기분이었다. 페란스는 붉어진 얼굴로 마르스티엘을 바라보다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는…… 대체 뭘 사랑스럽다고 하는 거야?”
“모르십니까?”
몰랐다. 정말이지 몰랐다.
그건 거래의 대가로 약혼을 사들인 장사꾼이 할 법한 말이 결코 아니었으므로.
“그래. 모르겠어.”
마르스티엘은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페란스의 뺨을 쓸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페란스가 그 손에 뺨을 눌렀다. 각인 반응이 사라지자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마르스티엘과 닿아 있는 게 좋았다. 따듯한 손바닥의 온도와 살갗의 감촉, 은은하게 느껴지는 체향 모든 게 좋았다. 그저 좋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 몸에 붙여 놓고 싶었다.
“각인 상대에 대한 전하의 애착을 확인하고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런 거 없다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기는 했다. 아만다리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기억이.
마르스티엘이 그걸 두고 애착이라 일컫는다면 페란스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지껄였든 그건 각인 반응 탓이다. 네 멋대로 의미를 두지 마.”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두 귀로 직접 들으니……,”
마르스티엘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생각보다 괴롭더군요.”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야.”
“압니다. 그런데 그럴 때조차 듣기 싫었나 봅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턱을 들어 올렸다.
처음에는 무례하게 느껴지던 행동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개새끼가 이런 짓을 했다면 손가락을 전부 짓이겨 놓고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래서 마주 보이는 마르스티엘의 시선이 좋았다.
“애착이 깊을수록 각인을 푸는 일은 어려워질 테고, 전하께서는 지치셨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 그래서 내가 거래를 깨자고 할까 봐?”
“네. 제게는 그 외에 전하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너는……,”
각인 반응이 둔화된 탓일까.
당연히 있어야 할 거지 같은 통증들이 없어서인 걸까.
그래서 마르스티엘이 하는 모든 말들이 이상할 정도로 달콤하게 들리는 걸까. 그저 이 순간의 기분 탓인 걸까. 그런 걸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건 마치……,”
페란스는 말을 끊고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르스티엘이 남겨 놓은 상처가 찌릿했다. 그는 페란스의 입술 사이로 제 엄지를 밀어 넣었다.
“깨물지 마십시오.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네가 날……,”
갖고 싶어 한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왕실의 이름과 권력이 아닌 나를.
내가 네게 준다고 약속했던 것이 아닌 나라는 인간을. 나라는 오메가를.
페란스는 끝내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불신은 그가 가진 최후의 방어 수단이었다. 페란스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제 곁에 있는 누구라도 개새끼의 꼬리일지 몰랐다. 겉으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개새끼가 제 몸을 유린할 때는 누구 하나 얼씬대지 않았다.
마르스티엘도 마찬가지였다.
노예 출신의 상단주가 야심이 없을 리 없었다. 그 야심이 개새끼의 야심보다 작을 수도 없었다.
바라는 게 있을 뿐이었다. 다른 인간들처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언제라도 배신을 대비해야 했다. 선친이 떠난 이 세상에서 아만다리스가 끝까지 자신을 지켜 줄 거라는 개같은 믿음을 처음부터 갖지 말았어야 했다.
믿음의 대가는 늘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절대로 마르스티엘에게 배반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지 말아야 했다. 믿음이 없으면 배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인 상대에게 애착을 드러낸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신 전하가 사랑스럽습니다.”
초옥, 마르스티엘의 입술이 부드럽게 코끝을 덮었다.
코끝에 하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점막이 코끝에 닿는 느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생소했다.
……그게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약…… 아, 그래. 바르는 게 좋겠군.”
살갗이 쓰라린 것을 잊고 있었다. 각인 반응과는 조금 다른 얘기였지만 발정기를 참아 보려 애를 썼던 적이 있는 입장에서는 제 몸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다행히 손등은 멀쩡했지만 팔뚝이나 가슴이 너덜너덜 찢겨 있을 것이다.
“소매를 걷겠습니다. 혹시라도 각인 반응이 올 것 같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미약한 반응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곧장 몸을 뒤집으며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괜찮아.”
“좋군요.”
마르스티엘은 잠옷을 벌리고 상처가 가장 심한 가슴팍부터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상처를 다루는 손짓은 간질댈 정도였다. 희미하게 두통이 올라오고 있지 않았다면 이 순간이 무척 즐거웠을 것이다.
“내 옷은 누가 입힌 거야?”
페란스는 손을 뻗어 마르스티엘의 귓가로 내려온 머리칼 끝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서 손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제가 입혀 드렸습니다.”
“아……. 빨간 머리가 거들지는 않았어?”
“옷을 가져다주긴 했습니다. 그가 싫으십니까?”
“좋을 것도 없지.”
“이유가 궁금하군요. 눈치가 빠른 인물입니다. 딱히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 손을 할 차례입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손을 끌어다 눈앞에 놓았다. 일부러 보지 않고 있던 상처가 적나라하게 시야에 드러나니 새삼 아파졌다.
“쓸 만한 인물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마음에는 안 들어.”
“……그렇다니 앞으로는 가급적 다른 인물로 대체하겠습니다.”
“그 덩치?”
마르스티엘이 짧게 웃었다.
“그자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쪽도 좀……. ……아냐, 됐어. 덩치보다는 빨간 머리가 나아.”
머리가 잽싸게 한 바퀴 굴렀다. 마르스티엘이 신뢰하는 자가 그 둘이라고 한다면 덩치가 제 옆에 붙어 있는 시간 동안 마르스티엘의 곁에는 빨간 머리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차라리 그 반대가 나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레프는 고지식한 면이 있는 편이라, 시종으로 부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덩치의 이름이 알레프인 모양이었다.
시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말에는 페란스도 동감이었다. 그가 자신을 노려보던 섬뜩한 눈빛은 아무래도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빨간 머리는 이름이 뭐야?”
“메넌입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왜긴 왜야. 앞으로 볼 거라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매번 빨간 머리라고 할 수도 없……. ……읏, 아파.”
팔뚝에 약을 바르던 손가락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통증이 느껴졌다. 마침 두통도 거세지는 터라 엄살을 좀 피웠는데, 정작 마르스티엘은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대신 새파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데?”
“하던 대로 하셔도 됩니다. 제가 데려온 자라 해서 다정해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페란스가 입을 약간 벌렸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름 하나 묻는 게 다정한 거라고?”
“전하께는 그런 일이잖습니까.”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부리는 자들 이름 정도는 나도 외우고 다녀.”
“제가 부리는 자입니다. 전하가 아니라.”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빨간 머리라 부르십시오.”
딱 자르는 대답은 선을 긋는 모양새였다.
빨간 머리와 자신이 일말의 유대감이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뭐야, 그게.
왜 그렇게 싸고도는 건데. 내가 빨간 머리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아서?
페란스가 입매를 비틀었다. 마르스티엘이 빨간 머리를 저렇게 제 등 뒤에 숨겨 놓으려는 이유가 짜증났다.
“메넌은 어디 출신이지? 그자도 블루와렌의 노예 신분이었나?”
“…….”
탁.
마르스티엘은 대답 대신 약병을 내려놓았다.
“팔에는 붕대를 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약 냄새가 묻은 손이 페란스의 턱을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