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는 해도 마르스티엘의 몸에 안 좋은 일이 생긴 이유는 자신이었다.
제기랄.
페란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 속 좁은 건 나지.
페란스는 오한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침대 시트를 걷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은 멀쩡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옷을 입고 있는 걸 보면 잠이 든 사이 누가 씻기고 뒷정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설마 그게 저 빨간 머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래서, 지금도 그래?”
“다행히 우려한 만큼의 부작용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한결 나아지셨습니다.”
제기랄.
“내가 얼마나 잤나?”
“만으로 하루 정도?”
“뭐?”
하루를 꼬박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게 말이 되나? 하루 종일 잤다고 하면 궁인들이 수상하게 여겼을 텐데.”
“단주님께서 잘 둘러대신 모양입니다. 아직도 이 근처에는 얼씬 안 하는 걸 보면.”
“하…….”
그렇다니 다행이었다.
새삼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마르스티엘이 저를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건가?”
빨간 머리가 이불을 가지러 침실을 떠나기 전, 시트 자락을 만지작대던 페란스가 작게 물었다. 입 밖에 내뱉기가 무서웠지만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한 번에 각인이 풀리는 경우는 원래 없습니다. 실패라 여기지 마십시오. 아직 이릅니다.”
“너 말이야.”
“네.”
페란스는 시트를 끌어 내리고 빨간 머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 말고도 다른 인간을 본 적 있나?”
“각인을 풀려는 사람 말씀입니까?”
“그래.”
“제법 봤습니다.”
“그럼 그중에서……,”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실패했는지 물을 때보다 신경이 더 곤두섰다.
“실패한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마르스티엘과 거래한 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빨간 머리가 산뜻하게 제법 있었습니다, 라고 하면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됐어. 이불이나 가져와. 추우니까 불도 피우고. 마르스티엘은…… 편하게 볼일 마저 보라고 해.”
빨간 머리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더니 곧 허리를 숙였다.
“뜻대로.”
탁.
빨간 머리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간신히 참고 있었던 떨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페란스는 시트 밑을 파고들며 딱딱,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제기랄.”
온몸이 다 아팠다.
기분이 아플 수 있다면 지금 제 기분도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눈 뜨자마자 보는 게 저 얼굴이라니.
기분 나쁘게 예쁘다고.
눈 뜨자마자 보이는 게 마르스티엘이 아니었다.
그게 조금 아픈 듯했다.
* * *
“……어, 떻게 된 거야?”
당연히 빨간 머리가 돌아올 줄 알았지만 의외로 두툼한 담요를 들고 나타난 것은 마르스티엘이었다.
“가만히 계십시오.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담요만 가져온 게 아니었다. 다른 손에는 뭔지 모를 병들이 담긴 바구니도 들고 있었다.
“기억은 나십니까?”
마르스티엘이 시트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거기서 나오라는 뜻 같았다.
페란스는 가뜩이나 부서질 것 같은 몸을 크게 흔들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시트 밑을 반 바퀴 굴렀다.
곧 몸 위에 포근한 담요가 덮였다. 마르스티엘은 헝클어진 시트를 다시 정리했다.
“……반 정도만.”
그새 몸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마르스티엘이 나타나 아픈 게 좀 사라진 탓일지도 몰랐다.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네가 날 묶던 것하고…… 뭐, 그냥 그런 것들.”
“그리고?”
별로 좋은 기억들은 아니었다. 엎드려서 묶이고, 죽을 정도로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양동이가 넘쳐흐르도록 구토를 했다. 자신이 구토하는 동안 마르스티엘은 기름칠을 한 모형 성기로 뒤를 벌렸다.
……젠장.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겠네.
“뭘 자꾸 물어.”
뒤늦은 수치심이 마르스티엘을 쳐다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제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게 왜?”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턱을 쥐었다. 그저 쥐는 게 아니라 양쪽으로 힘을 주어 입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알지 못할 이유로 뺨이 훅 달아올랐다. 페란스는 턱을 비틀며 마르스티엘을 벗어나려고 했다.
“무슨 짓이야.”
“제게 구음을 해 주셨던 것은 기억합니까?”
“뭐?”
“그리고 그때 제게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합니까?”
페란스는 어이없다는 듯 마르스티엘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등을 쳐 냈다.
“기억 안 나. ……그리고 그게 가능하기나 해? 네 성기는 멀쩡히 달려 있나?”
“표정을 보니 정말인가 보군요.”
마르스티엘이 손을 놓았다. 페란스는 얼얼해진 턱을 문지르며 그를 노려보았다.
턱이 몹시 아팠다. 사실 지금 그렇게 세게 쥔 것 같지도 않았는데 턱뼈가 빠질 것처럼 뻐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기억이 없다는 건 각인 반응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는 의미였는데 다른 알파의 성기를 멀쩡히 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뭐가 정말이라는 건지 말을 해.”
“제가 싫다고 하셨습니다.”
“……뭐?”
이번에는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났다.
대체 누가.
너를 싫어할 수만 있어도 내 고민이 팔 할은 줄어들 텐데.
“믿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내가 그랬다면 네 성기가 너무 커서 목구멍이라도 찔렀나 보지. 그러게 애초에 작작,”
“저에 대한 반감은 각인 상대에 대한 애착과 같습니다.”
페란스의 안색이 훅 바랬다.
“애착? 진심인가?”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아만다리스 공에게 애정을 느끼십니까?”
“뭐라는 거야, 대체!”
퍽!
페란스가 거칠게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팔꿈치가 침대 머리에 부딪쳤다. 마르스티엘이 재빨리 페란스의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이미 늦었다. 페란스는 그를 밀치며 말했다.
“그게 네가 할 소린가? 그 인간에게 애정이 있느냐고? 네가 말하는 애정이라는 게 대체 뭔데! 난도질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애정이라고 하나?”
“감정이 강렬해지면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퍽!
이번에는 진짜였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뺨을 후려갈겼다.
턱이 휙 돌아간 마르스티엘을 보며 페란스가 빈정거렸다.
“아아, 그런가 보네. 나는 네가 좋아 죽겠는데 지금은 죽이고 싶어지는 걸 보면.”
“진심입니까?”
“그럼 아닐 것 같아?”
한 대 더 때려도 좋을 것 같았다.
“궁금하면 가서 칼이라도 가져와.”
페란스가 다시 주먹을 움켜쥐는데 마르스티엘이 양쪽 손목을 잡았다.
“전부 다 진심입니까?”
그러다 보니 자세가 이상해졌다. 마르스티엘이 체중을 실으면 그의 몸 아래에 깔리는 자세가 될 것 같았다.
“같은 말을 또 묻지 마. 그리고 손 놔. 얼굴이 너무 가까워.”
그 말에 마르스티엘은 아예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입술에 자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근질대는 감각은 어서 가서 들러붙으려는 성질이 아닐까.
“제가 좋으십니까?”
“……빌어먹을. 네 얼굴에 대고 토하는 꼴을 안 보려거든 그만 비켜.”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뭘? 토하는 걸?”
“네.”
마르스티엘은 손목을 붙든 채 엄지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가볍게, 간질이는 것 같은 감각은 말이 안 될 만큼 좋았다.
그리고 성욕을 자극했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페란스는 몸을 내밀어 마르스티엘의 입술을 물었다.
“……흡!”
언제 손목이 풀렸는지 알 수 없었다. 마르스티엘은 제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빨아 대는 중이었다. 페란스는 정신없이 입 안으로 넘어오는 혀와 타액을 삼키며 마르스티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인간의 타액이 이렇게 맛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 맛이 없는데, 맛있었다. 말캉한 혀도, 손바닥에 들러붙는 머리칼도 마찬가지였다. 맛있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미친,”
어느 순간 마르스티엘이 갑자기 혀를 뺐다.
딱!
정신없이 그의 혀를 받아 삼키던 페란스는 혀를 헛놀리다 허공을 물었다. 제 치아 사이에서 꽤나 아픈 소리가 번졌다.
“다행입니다.”
멍한 얼굴로 마르스티엘을 보고 있자 그가 영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 주었다.
“뭐가?”
“어젯밤이 헛되지는 않아서. 이제 이 정도 접촉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아……? 아, 잠깐……. 잠깐만. 그럼……,”
이 키스가 죽을 만큼 황홀했던 이유가 있었다.
각인 반응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