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23)화 (23/122)

23.

“이 위에…… 엎드리라고?”

모든 문은 굳게 닫혔다. 창문은 커튼을 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무판을 덧대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불빛은 최소한만 있었다. 대신 기이한 향을 피워 두었다. 얼핏 페로몬으로 느껴질 만한, 하지만 맡아 본 적은 없는 아주 독특한 향이었다.

마르스티엘은 욕실에서 나온 페란스에게 물약이 담긴 유리병을 건넸다. 맛이 괴상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권한 대로 코를 막고 단숨에 들이켰는데도 입 안 가득 쓴 맛이 남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것은 여관에서 얼굴을 봤던 마르스티엘의 호위 둘이 모두 제 침실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꼽자면 자신에게 엎드리라고 하는 길쭉한 탁자였다.

사실 탁자라고 하기엔 너무 침대 같았다. 그러나 침대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했다.

대충 사람 키만 한 탁자에는 머리가 닿는 부분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었다.

빨간 머리가 그 구멍 아래 커다란 양동이를 가져다 놓았다.

“네.”

페란스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 광경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듯했다. 페란스는 그게 가장 이상했다.

“지금 옷을 벗는 게 싫으시다면 그냥 누우십시오. 제가 벗겨 드리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당연히 그 역시 저와 비슷한 차림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림새를 보면 도무지 섹스를 눈앞에 둔 사람 같지 않았다.

“네 옷은?”

페란스는 빈 유리병을 빨간 머리에게 던지듯 넘겨주며 물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은 눈짓으로 그를 채근했다.

페란스는 인상을 쓴 채 그 괴상한 탁자로 걸어갔다. 마르스티엘이 내미는 손을 잡고 탁자에 엎드리자 얼굴이 쏙 들어가는 구멍 밑으로 빈 양동이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건 젠장, 아무리 봐도 여기다 토하라는 것 같은데.

“가운을 벗기겠습니다.”

마르스티엘이 손을 아래로 넣어 가운의 끈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자, 잠깐!”

페란스는 홱 몸을 돌려 마르스티엘을 마주했다. 두 손이 허겁지겁 가운의 끈을 꽉 여몄다.

“저들은?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거야?”

“……원치 않으시면 입은 채로 해도 됩니다.”

어이가 없었다.

“뭘? 섹스를? 빌어먹을, 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 섹스마저도 네 수하들이 보는 데서 하겠다는 거야?”

들려오는 대답은 제 어딘가를 후려치는 듯했다.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뭘 더 하는데!”

“…….”

침묵은 그대로 답이 되었다. 페란스의 안색이 단숨에 바랬다.

“뭐, 그럼…… 그럼 설마…… 저들하고…… 하라는 거였어?”

“믿을 만한 자들입니다.”

“미친!”

퍽!

페란스는 주먹으로 마르스티엘의 뺨을 후려쳤다. 마르스티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네가 그런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건데! 네가 보는 앞에서 다른 것들과 몸을 섞으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마르스티엘은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아는 방법은 그렇습니다.”

“시끄러워! 그딴 걸 방법이라고 부르지 마!”

“거래 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인을 푸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섹스가 될 거라고.”

“섹스가 필요하다면 네가 하는 게 맞잖아! 갑자기 이름도 모르는 것들을 들이대는 이유가 뭐야!”

“여러 개의 페로몬이 뒤섞일수록 안전합니다. 페로몬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페란스는 고함을 질렀다.

무질서하게 뒤섞인 감정들이 몸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저마다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마르스티엘이 일부러 제 몸을 수하들에게 던져 주고 굴욕감을 안기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터무니없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쉬운데.

다른 것들이 나를 만지는 게 상관없나? 네가 보는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집어넣는 게 괜찮다는 건가?

그게 모욕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모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없었다.

개새끼도 하지 않을 짓을, 네가 왜. 어떻게 나한테.

왜 하필 네가.

“비켜!”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떠밀었다. 이 방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럭저럭 참을 만했던 저 괴상한 향이 지금은 역겨워 신물이 올라왔다.

“비키라고!”

그러나 마르스티엘은 제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원하시면 기억을 지우는 약을 쓰겠습니다. 억제제를 드셨을 때처럼 오늘 밤 벌어진 일은 잊게 되실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개처럼 이 인간 저 인간 붙어먹었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그렇게 해서라도 각인을 풀고 싶으셨던 게 아닙니까?”

“너라서 괜찮았던 거야! 네가 하는 줄 알았으니까!”

소리를 지르고 보니 그게 본심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인간과의 거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몰랐으면 모를까, 마르스티엘을 알게 된 이후로 다른 인간이 그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너니까 받아들였던 거라고! ……이거 놔! 거래는 없던 일로 하겠다!”

이를 악물고 저를 뿌리치려는 페란스를 마르스티엘이 체중을 실어 내리눌렀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없긴 뭐가 없는데! 손 치워! 놓으라고 했다!”

“이 거래를 위해 저 역시 많은 것을 감내했습니다. 전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고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너는 이게 고작 마음을 바꾼 일 같나?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해?”

“그럼 제가 하면 되겠습니까?”

페란스를 그 괴상한 침대에 대고 온몸으로 누른 자세에서 마르스티엘이 속삭였다.

“저 혼자 할 때 효과를 십 할 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밖에 제가 미처 알지 못한 부작용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페란스는 칭칭 묶인 것 같은 몸을 버둥거렸다.

“너는…… 이런 거였다면 처음부터 내게 말을 했어야 해. 내가,”

“위험 부담을 각오하시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 이 거래는 어떤 경우라도 무를 수 없습니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턱을 붙들었다. 시선이 도망갈 틈 없이 그에게 묶여 버렸다.

힘이 너무 셌다. 아무리 밀어내도 밀리지 않았다.

“전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와 혼인하실 겁니다. 우리의 거래대로.”

“…….”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은 제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이었다.

짐작하고 있었나.

내가 파혼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웃……기지 마. 멋대로 거래 내용을 바꾼 건 너……잖아. 나는 분명히 너와 하겠다고……,”

“네. 그러니 저와 하실 겁니다. 그 대가로 혼인까지.”

마르스티엘은 턱을 놓는 대신 페란스의 아랫입술을 으적 깨물었다.

비린 피 맛 뒤에 얼얼한 통증이 번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잊지 마시라는 뜻이었습니다. 각인이 풀린 뒤에도.”

“…….”

……역시 내가 혼인까지 갈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질리도록 철두철미한 작자였다.

행여나 거래가 틀어지는 일이 없도록 직전까지 확답을 얻으려고 들었다.

어쩌면 그저 제 말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파혼을 겪지 않을 방법을 마련해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인정해야 했다. 그를 상대로 제 이득만 챙기는 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갈 데까지 가 보자고. 결국 누가 이기는지.

“거래는 공정해야지.”

페란스는 억지로 상반신을 들어 마르스티엘이 했던 것처럼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입술이 뜯겼다.

“너 역시 잊지 마라. 거래든 뭐든 내가 네게 청혼했으니 너는 내 약혼자다. 약혼자면 약혼자답게 굴어. 너와 나 사이에 다른 것들을 끼워 넣을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마르스티엘은 피 흐르는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는 페란스를 붙든 채 고개를 돌려 수하들에게 말했다.

“내 약을 가져와.”

그러자 회색 머리를 한 덩치가 곁으로 다가왔다.

“단주님, 위험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정확한 건 아니잖아.”

“만일 잘못되면,”

“그만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

덩치가 입술을 질근 물었다. 망설이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대던 그가 다시 물었다.

“그만한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습니까?”

“있어.”

마르스티엘의 답은 빨랐다. 그만큼 단호하고 단단했다.

덩치가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그가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페란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이 잘 갈린 칼 같았다. 덩치는 목을 그대로 갈라 버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페란스를 쳐다보았다.

“…….”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 눈빛만으로도 마르스티엘이 이 거래를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덩치와 빨간 머리가 조용히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제 소매를 놓으라는 뜻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하의 몸이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저 덩치가 말하는 위험은 네 몸이 짊어진다는 뜻인가?”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군요. 하지만 전하께 걱정을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째서?”

마르스티엘이 짧게 웃었다. 희한하게도 전혀 웃음처럼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몸을 걱정하기도 바쁘실 테니.”

“……?”

“다른 생각은 하실 여유가 없게 되실 겁니다.”

마르스티엘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페란스는 곧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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