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페란스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블루와렌에서는 약혼자의 벗은 몸을 보는 게 문제가 되나?”
“뭐, 쌍방의 의사에 달린 일 아니겠습니까?”
“마르스티엘도 내가 벗은 걸 봤으니 됐어. ……그런데 내가 왜 호위라는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물러서라. 너희들의 존재가 무례가 되기 전에.”
빨간 머리와 덩치가 재빠르게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페란스는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는 거로군.
“비켜나라고 했다.”
“……들어오십시오.”
덩치는 짧게 한숨을 쉬는 듯하더니 결국 뒤로 물러났다.
덩치가 내어준 틈을 페란스가 재빨리 파고들었다. 빨간 머리도 양손을 들어 보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방 안의 구조도 똑같았다.
침대를 지나쳐 방을 가로질러 간 페란스는 직접 욕실 문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에 문을 열었다.
“나야. 들어가겠다.”
탁!
문을 당기고 그 안으로 들어간 페란스는 순간 치솟는 욕지기를 느꼈다.
“……욱!”
* * *
욕실은 수증기가 뿌옇게 차 있었다.
욕실 가운데 있는 욕조에 마르스티엘이 있었다. 물속에 몸을 깊이 담근 자세라 코 위까지만 보였다.
“전하?”
차르륵!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돌리자 욕조 밖으로 물이 넘쳤다.
페란스는 솟구쳐 오른 구토감을 한번 씹어 삼킨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야?”
코와 입을 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욕실에 차 있는 것은 수증기뿐만이 아니었다. 짙은 페로몬 향이 섞여 있었다.
수증기 탓에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페란스는 그게 마르스티엘의 알파 페로몬 하나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르스티엘의 페로몬이라면 이전에도 겪었다. 즉각적인 각인 반응을 유도할 정도로 강렬하긴 하지만 단숨에 욕지기가 치솟지는 않았다. 향도 약간 달랐다.
이 정도면 오메가 페로몬도 섞였을 것이다.
……설마 그사이 다른 인간과 뒹굴기라도 했나?
페란스의 눈매가 단박에 험악해졌다.
“왜 이렇게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데?”
“나가십시오, 전하. 각인 반응이 올 겁니다.”
“닥치고 대답이나 해. 무슨 일인데?”
페란스는 일단 제 안의 의혹을 부정하기로 했다. 다른 오메가와 몸을 섞기에 촉박한 시간이긴 했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랬다면 뭔가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러트라도 온 거야?”
“……이틀 안으로 시작될 것 같습니다.”
첨벙.
마르스티엘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나가십시오, 전하. 지금은 페로몬 조절이 어렵습니다.”
“염려 마. 못 참을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나갈 테니.”
페란스는 이를 물고 마르스티엘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아직 이 낯선 향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가 다른 오메가와 뒹굴고 있을 장면을 연상하자 각인 반응과 다른 이유로 속이 뒤집혔다.
……미치겠군. 의처증 환자처럼 굴고 있잖아, 내가.
뜨거운 물 때문인지 마르스티엘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였다.
페란스는 충동적으로 젖은 뺨에 손을 댔다.
발정기를 앞두고 페로몬을 흘리는 알파의 달아오른 살갗이 눈앞에 있었고, 그 알파가 마르스티엘이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뿐이었다.
……탓!
그런데 그가 제 손을 쳐 낼 줄은 몰랐다.
“……왜,”
“건드리지 마십시오.”
이마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페란스는 얼얼해진 손등을 다른 손으로 쥐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좀…… 힘듭니다.”
발정기가 오고 있다는 건 알겠다. 제 몸도 발정기를 앞두고 급격히 예민해지니까 알파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페로몬도 흘리지 않는 자신이 그를 자극하고 있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페로몬을 흘린다 해도 다른 알파에게 종속된 제 페로몬은 어차피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네 말은 내가 오메가처럼 굴고 있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내 페로몬이 너를 자극할 것도 아니고. 새삼 내가 만지는 게 싫다는 말인가? 각인 반응이 오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인데도?”
“……러트 때는 좀 예민합니다. 억제제를 먹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페란스는 그쯤에서 물러서기로 했다.
제 입으로 힘들다는 마르스티엘을 끝까지 추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라고 했으니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억제제는 언제 먹는데?”
“완성이 되면 곧.”
“그게 언제냐고.”
“출발 전까지는 어떻게든 될 겁니다.”
“알겠다.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하면 얘기하도록. 손이 닿는 것도 괴롭다는 사람을 억지로 부려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
이번에는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런 게 조금 이상했다. 갑자기 좀 달라진 것 같은 페로몬 향처럼.
페란스가 아는 한 개새끼의 페로몬이 러트가 왔다고 달라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마르스티엘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욕조에서 몸을 떼려던 페란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할 말이라도 있나?”
“전하께서는,”
“나는 뭐?”
“……무슨 일로 욕실까지 오신 겁니까?”
아무래도 중간에 그가 말을 바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지 못할 데를 왔나?”
“보통은 씻고 있는 사람을 굳이 욕실 안까지 들어와 보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네가 말도 없이 사라졌잖아. 그사이 다른 오메가라도 붙들고 있나 싶어서였어.”
일부러 다른 오메가라는 말을 언급하며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전하께서는 상대를 구속하는 편입니까?”
“어쩌면.”
마르스티엘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더럽게도 표정이 없는 인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먹기가 어려웠다.
“너 때문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질투도 많은 것 같고. 그러니 부탁하는데…….”
다음 말은 진심이었다.
“……날 불안하게 만들지 마라. 다른 오메가의 흔적 같은 건 묻히고 다니지 마.”
“그렇다니, 뜻대로.”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속내야 어떻든 제 뜻을 따르겠다는 동작은 정중할 뿐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헌신적이고 성실한 약혼자였다.
……그래. 네게 거래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더는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다 쓰고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었다.
“음식을 가져왔으니 먹도록 해. 생각이 없으면 네 수하들에게 베풀어도 된다. 아, 그리고.”
대충 말을 마무리 짓고 욕실을 나서려던 페란스가 한마디 보탰다.
“네 수하에 관해서 조만간 얘기를 하자고. 거슬리는 게 하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갈게.”
“알몸이라 예를 갖추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하나만 더.”
막 등을 돌리려던 페란스는 갑자기 몸을 돌려 마르스티엘의 귀를 잡아당겼다.
“왜,”
왜 이러시는지 물으려던 마르스티엘의 고개가 손짓을 따라 들렸다. 페란스는 그가 말을 하기 전에 덥석 입술을 삼켜 버렸다.
키스는 짧았다. 마르스티엘이 마차 안에서 했던 것처럼.
“이대로 쫓겨나는 건 자존심 상하니까.”
“…….”
페란스는 씩 웃으며 마르스티엘의 입술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마르스티엘은 키스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을 했다.
“잊지 마. 네 손에 반지를 끼운 건 나라는 걸. 거래가 전부 끝날 때까지 넌 내 것이다.”
페란스는 휙 몸을 돌려 욕실을 떠났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빨간 머리와 덩치를 지나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각인 반응을 너무 오래 참은 탓에 두통이 몰려왔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거래를 한 이상 그에게 아무 때나 키스할 수 있는 것은 약혼자로서 제가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그걸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 * *
출발은 예정 시간보다 삼십 분가량 늦었다.
삼십 분 늦게 1층으로 내려온 마르스티엘은 멀쩡해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 마차를 따로 타고 갈 것을 요청했다.
몹시 짜증이 났지만 페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나절만 더 가면 되는 일이었고, 그에게 이 이상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덕분에 각인 반응을 염려할 일이 없는 순탄한 여정이 이어졌지만 기분은 진창에 바퀴 하나가 빠진 마차처럼 곤두박질쳤다.
꼭 얘기를 해 봐야겠어.
페란스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빨간 머리가 혹시 오메가냐고.
오메가라고 하면 호위를 바꾸라고 할 것이다. 욕실에서 맡은 기묘한 페로몬 향이 혹시라도 빨간 머리의 페로몬이 섞인 것일까 봐 아직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각다각…… 다각.
모르는 새에 마차가 멎었다.
“전하. 키사드 성에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까요?”
“벌써?”
서둘러 창밖을 쳐다보니 정말로 키사드 성이었다.
무사히 도착했다.
제 인생을 뒤바꿀 장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