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9)화 (19/122)

19.

“이 정도는 괜찮군요.”

하지만 그 전에 마르스티엘이 목을 놓아주었다.

“뭐, 가…….”

“각인 반응.”

갑작스런 입맞춤 덕에 멈췄던 호흡을 이제야 내뱉으며 페란스가 투덜거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숨이 멎는 줄 알았는데.”

“놀라서 그런 건 아닙니까?”

아마도……. 어쩌면.

“어느 쪽이든 내 몸에 무리가 가는 건 마찬가지 아냐?”

“그렇다니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로 페란스의 얼굴을 잠시 더 쳐다보던 마르스티엘이 몸을 일으켰다.

“뭐야. 벌써?”

“각인 반응이 걱정되긴 하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맞물렸던 입술이 한순간에 떨어졌던 것처럼, 서로 닿아 있던 몸도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약한 두통이 일었다. 각인 반응이었지만 페란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랫입술에는 아직도 마르스티엘의 윗입술이 남긴 감촉이 느껴졌다. 이걸 두고 그럴 가치가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잠이 오면 자도록 해. 괜히 내 눈치 본다고 깨어 있지 말고.”

“그러겠습니다.”

“그래.”

페란스는 머리를 기대는 척,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창문에 댔다. 달만큼 차가워진 유리의 온도가 두통을 식혀 주었다.

먼저 잠이 든 쪽은 페란스였다.

* * *

“…….”

가슴이 답답했다. 자꾸만 심장이 쥐여 짜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반면에 잠은 무겁고 혼곤해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흐……,”

페란스는 몸을 비틀었다. 진땀으로 젖은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젯밤의 두통이 몸집을 키워 머릿속을 짓찧고 있었다. 괴로워서 몸을 뒤집고 머리를 비벼 댔다. 옷감이 머리칼에 마찰되어 들리는 바스락 소리가 꼭 벌레 같았다.

“전하.”

귓가에 알파의 목소리가 닿았다.

“……우욱!”

페란스는 견디지 못하고 신물을 게워 올렸다.

“전하. 눈을 뜨십시오.”

몸이 강제로 들렸다.

뒤통수에 등받이가 닿았다. 마차 좌석에 앉게 된 페란스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마르스티엘이 손수건을 꺼내 페란스의 입가를 닦았다.

“아……. 나도 잘…… 각인 반응인가.”

“그렇군요.”

마르스티엘의 옷은 또다시 얼룩이 져 있었다. 방금 토한 데가 그의 바지였던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키사드는 아직 멀었나?”

“아직 멀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여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들러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아……. 아직 카네시까지밖에 못 온 모양이군.”

“네. 아직도 한나절은 더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얼굴을 살피듯 쳐다보고 난 뒤 마르스티엘이 몸을 굽혀 마차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주웠다. 그가 입고 있던 겉옷이었다.

별말 없이 겉옷을 입은 그가 말했다.

“저는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뭐? 왜?”

“전하께서 주무실 동안 제 일행이 합류했습니다. 베르호예트에 관해 들을 얘기도 있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니 시간을 절약할 겸 제 마차를 타고 가겠습니다.”

“아……. 그래야겠군.”

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일 테니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말릴 수도 없었다.

“알았다.”

페란스는 마차 벽을 탕탕 두드렸다. 신호를 알아들은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여관에 도착해서 보겠군.”

“네, 전하.”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마르스티엘이 마차에서 내렸다.

페란스는 일부러 시선을 돌려 그가 내리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뭐지, 이건.

마르스티엘이 마차를 갈아타야 할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남의 토사물이 묻은 옷을 갈아입는 것은 당연했다. 마르스티엘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자신이 나서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는 건데.

자다가 각인 반응이 온 것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키스를 할 때도 참을 만했는데.

페란스는 창문을 이마로 툭툭 쳤다.

매번 토사물을 제 옷으로 받아 내는 것도 지겹겠지.

그러고 보니 왕실 재단사에게 맡겨 놓았던 옷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잠이 들지 않았으면 어떻게든 참아 봤을 텐데…….

짜증을 질겅질겅 씹던 페란스는 자신이 마르스티엘의 부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각인 반응이 일어나건 말건 붙어 있고 싶다는 건가. ……어이가 없네.

정은 주지 않겠다고 해 놓고 이러는 꼴이 우스웠다.

마음을 잘 단속해야겠어.

페란스는 눈을 질끈 감고는 마르스티엘이 사라진 덕에 넉넉해진 마차에 길게 누웠다.

“……아?”

그러다 알게 되었다. 마르스티엘의 겉옷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이유를.

제 재킷 단추가 열려 있었다. 셔츠도 단추가 두 개 풀려 있었다. 스카프는 느슨해져 있었고 구두와 스타킹도 벗은 채였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내려 마차 바닥을 훑으니 좌석 아래 얌전히 놓인 제 구두가 보였다. 벗은 스타킹은 잘 접혀 구두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자는 동안 마르스티엘이 한 짓이었다.

단추를 풀고 신발을 벗겨 몸을 편하게 만들어 놓은 뒤 제 허벅지를 베고 눕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겉옷을 벗어 제 몸 위에 이불처럼 덮어 놓았을 것이다.

“각인 반응이 올 만도 하잖아.”

토하기 전까지 자신은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비벼 댔다는 얘기였다.

“……대체 누가 다정하다는 건데.”

다시 벌렁 드러누운 페란스는 천장을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마르스티엘이 마차를 옮겨 탄 진짜 이유가 뭔지.

어쩐지 일행이 합류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가 잠든 자신을 허벅지 위에 얌전히 눕혀 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식사를 전부 마칠 때까지 마르스티엘은 보이지 않았다.

근위대가 전하길 그는 목욕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토사물을 묻힌 게 자신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식사는 방으로 가져갔나?”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전하. 블루와렌 측에서 알아서 하겠다 했습니다.”

“흠…….”

페란스는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관의 1층 식당은 텅 비었고, 그 혼자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근위대가 시종을 대신해 시중을 들었다.

궁에서라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텅 빈 식당도, 혼자 먹는 음식도 먹구름 아래서 하는 소풍처럼 때가 맞지 않는 일 같았다.

“손을 안 댄 음식을 챙겨서 따라와.”

“어디로 가십니까?”

“내 약혼자에게.”

훌쩍 몸을 돌린 페란스가 계단을 올라갔다.

키사드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여관들이 여럿 있었지만 왕실에서 이 여관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여관들을 전부 통틀어 규모가 가장 컸다. 작은 여관은 방에 목욕탕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곳에는 가장 큰 방 두 개 모두 욕실이 딸려 있었다.

제 방이 2층이었고, 마르스티엘의 방이 3층이었다. 욕실이 딸린 방이 한 층에 하나밖에 없기에 생긴 일이었다.

하여간 3층으로 올라가자 어디가 마르스티엘의 방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층만 다를 뿐, 구조는 2층과 똑같았다.

페란스는 덜컥 문을 열었다.

탓!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뭔가 싸늘한 기운이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읏!”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히고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서 양손에 접시를 들고 따라오던 근위대가 소리쳤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마르스티엘의 방 안에는 그 말고도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아, 그 전하시로군요.”

싸늘한 기운을 느끼게 했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란스 로사델 카벨리카 전하.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수호하는 몸입니다.”

“…….”

페란스는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자를 응시했다.

한 손은 가슴에, 한 손은 아래로 늘어트린 인사는 위스타드식도, 블루와렌식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도는 명확했다. 양손이 비어 있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방금 전엔 네가 한 짓이었나?”

블루와렌에서 온 자가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무슨 짓 말입니까, 전하?”

“칼을 봤는데.”

“저런. 잘못 보셨을 겁니다.”

그가 양손을 들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어디에도 칼은 없었다.

붉은 기가 느껴지는 금발을 지닌 미인이었다. 제 금발보다 더 촘촘한 컬을 지닌 머리칼을 땋아 목덜미에 드리웠다. 너무 두툼하지 않은 길쭉한 몸이 보기 좋았고 입가에 가볍게 걸린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뻔뻔하게 제 얼굴에 대고 거짓말을 하는 배짱도 마찬가지였다.

우습게도 페란스는 그 사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위를 왜 저딴 걸 쓰는데. 제 몸을 지키기도 바쁘게 생겼잖아.

방금 전 칼을 쓰려다 거둔 동작을 보면 재주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외모가 아니면서도 실력이 있는 호위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위스타드의 땅에서 내 말을 거짓이라 하는 건가?”

빨간 머리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흠…….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 전하. 저는 단지 사람 눈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인,”

“그만둬.”

마르스티엘의 방에 있던 사람은 빨간 머리 하나뿐이 아니었다.

어깨가 딱 벌어진 덩치도 하나 있었다. 이자는 색이 바랜 듯한 잿빛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마 끝에서 왼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었다.

덩치는 빨간 머리의 어깨를 짚어 그를 뒤로 잡아끌었다.

“들어오십시오.”

“너도 내 약혼자를 지키는 몸인가?”

“……그렇습니다.”

페란스는 덩치를 빠르게 훑었다. 속눈썹이 촘촘한 것을 빼면 딱히 미형이라고 부를 구석은 없었다.

그래. 호위는 이런 걸 부리라고.

“그는 지금 무얼 하나? 식사를 거를 것 같기에 가져왔다.”

“욕실을 쓰고 계십니다.”

“잘됐군.”

페란스는 빨간 머리와 덩치를 향해 손목을 까닥 흔들어 보였다.

“안내해. 얼굴을 보겠다.”

“…….”

“…….”

그러자 빨간 머리가 눈을 한 바퀴 굴렸고 덩치의 눈가가 약간 경직되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벗고 계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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