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범인은 개새끼였다.
하긴,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쓸 인간이었다.
“마이카오? 그라면……. ……맞아. 아만다리스의 사람일 거야.”
“장소를 그런 곳으로 잡고 시간을 끌며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계산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제가 전하와 여행을 가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누가 싫어하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개새끼라는 건 뻔했다.
페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내려간 게 잘못을 저지른 뒤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나는…….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만다리스가 그런……,”
“처음 겪는 일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미처 경계를 하지 않은 제 탓입니다.”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야. 이 일로 네 수하들이 목숨을 잃는다면 네가 곤란해지잖아.”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자들이라 자기 몫을 잘 해냈을 겁니다.”
마르스티엘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잘못했다. 얘기도 듣지 않고 의심부터 했어.”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뺨을 만질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가 이렇게나 급한 성질이 있는지도 몰랐다. 부끄럽군.”
“저는 싫지 않았습니다.”
“뭐가?”
마르스티엘이 손을 뻗었다. 뺨을 스치듯 가까워졌지만 건드리는 일 없이 다가온 손은 조금 전 헝클어진 금발의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전하께서 오해를 하신 게.”
“……아무래도 너는 머리를 다친 것 같은데. 그게 싫지 않았다고?”
“제가 다른 오메가와 있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셨으니.”
페란스가 콧등을 찌푸렸다.
“당연하잖아. 부정을 저지르는 약혼자를 두고 화가 나지 않는 인간도 있나?”
“네. 그게 좋습니다. 그런 일로 당연히 화를 내는 사이라는 게.”
“너는……,”
그런 말은 쓸데없는 게 아닐까.
마르스티엘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쓸데없이 친밀하고, 쓸데없이 감정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너는 가장 비싼 값을 준다는 구매자를 골랐을 뿐인데. 내가 거절했다면 아만다리스의 셋째 아들을 받아 냈을 테지. 너와 나 사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키사드로 가는 길에도 너무 마음을 놓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도 마르스티엘이 먼저 말을 돌렸다.
“너만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함께 있으니 얘기가 달라진다. 문제가 너무 커져. 왕족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아만다리스는 전하를 구속할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결국은 받아들일 만한 인물입니까?”
페란스가 잠깐 생각을 해 보다 답했다.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전까지 가능한 패를 전부 쓰려고 들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니, 네 말이 맞아. 네가 이제 곧 왕실의 일원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대려 했으니. 아만다리스는 이미 선을 넘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전하의 안위에 이롭습니다.”
페란스가 무거워진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에게는 아만다리스가 빼앗아 갔던 왕권을 되찾는 일이었지만, 아만다리스는 이걸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마르스티엘이 터무니없이 과한 가격을 부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과 거래를 한다는 건, 두 사람의 싸움 한복판에 끼어든다는 뜻이 된다는 걸.
아만다리스의 셋째 아들을 택했다면 그의 새로운 사업은 평화롭고 순탄했을 것이다.
“너는…… 후회하지 않나?”
페란스가 물었다.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도.”
그런 것치고 마르스티엘의 답은 빠르고 명쾌했다. 다른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듯이 들렸다.
“다행이군.”
그래서 그를 대신하듯 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럼 나는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쩐지 그를 다 쓰고 난 폰처럼 가볍게 체스판 위에서 치우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너무 무거운 예감이 들었다.
* * *
키사드 성은 하루가 넘는 거리였다.
중간에 밤을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마차는 마부를 교체해 가며 계속 달렸다.
가는 길은 밤처럼 길게 이어졌고, 달빛 외에는 아무런 불빛도 없는 까만 풍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졸음을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좋아. 허락하겠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이 지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긴 시간을 달려오며 마르스티엘은 그 이후로 딱히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지루함과 긴장감을 견디다 못한 페란스가 시시껄렁한 얘기를 꺼내면 짧게 답을 하는 정도였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일을 겪고 왔으니 육체나 정신이나 피로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 뒤로 페란스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저녁 내내 침묵을 지키다 불쑥 말을 건네는 페란스를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돌려 응시했다.
보통 마차는 양쪽으로 마주 보게끔 좌석을 놓지만 왕실의 마차는 한쪽 방향에만 있었다. 좌석 반대편에는 편히 다리를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되는 발판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는 주무시지 않을 겁니까?”
“잠은 나보다 네게 더 필요하겠지. 신발을 벗고 편히 있어도 돼.”
“……의외로군요.”
“뭐가?”
“생각보다 다정하신 분이라는 게.”
페란스는 피식 입술을 비틀었다.
“너는 나를 뭐라고 여기는 거야. 왕족이란 다 새파란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나?”
“전하께서 그런 분인 줄 알았습니다.”
“저런.”
페란스가 찡그리는 것 같은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너무 솔직하지 않나? 네가 내게 가까운 사람이 되긴 했다지만 서로 간에 지킬 예의는 남겨 둬야지.”
“대륙에서 전하만큼 많은 관심을 받는 자도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떠도는 말이 많습니다.”
“안 들어도 알 것 같군. 스물아홉이나 되도록 왕관을 못 쓴 오메가 왕자라니 바보천치이거나 손쓸 도리 없는 망나니라고 했겠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신과 인간 모두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애정의 값어치를 모른다고.”
마르스티엘이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창문을 비껴 들어오는 달빛이 푸른 눈을 한 쌍의 달처럼 보이게 했다.
밝고 환하지만 닿으면 손이 시릴 것 같은 달을.
“전하를 직접 눈으로 뵀을 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왠지 그게 더 나쁜 말로 들리는데. 아닌가?”
“어쩌면.”
애정이 넘쳐나 그 값어치를 모른다는 오메가 왕자는 자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타인의 얘기 같았다.
내가 넘치도록 받은 건 개새끼의 변태 성욕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다정하십니다.”
한 번 더 덧붙이는 말은 낮아진 목소리 때문인지 왠지 다른 의미를 더한 것처럼 들렸다.
다정하다는 말이 수상했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닐 테고. 내가 다정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다는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싫은지 좋은지.”
“무슨 말이 그래. 그럼 어쩌라는 거야. 다정하게 굴지 말아 줄까?”
마르스티엘이 느리게 입술 끝을 움직였다. 너무 느린 탓에 미소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게 다정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는데. 네가 잠이 오는 나머지 헛소리를 하는 걸지도.”
마르스티엘이 잠깐 소리 없이 입을 벌렸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전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그냥 자.”
“무릎을 베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무릎을 베고 싶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그게……. ……무리일 것 같지 않아?”
각인 반응이 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게 몹시 이상했다.
“내가 화를 낼 때도 각인 반응이 오기 전에 손부터 떼라던 인간은 어디로 사라진 모양이지. 너는 누구야, 대체?”
“잠깐이라도 좋습니다.”
“…….”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진심인가.
페란스는 어이가 없어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잠투정이 굉장히 고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 ……그럼 잠시만이다.”
페란스는 제 허벅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정말 잠깐만이야.”
“……. ……감사합니다, 전하.”
머뭇대는 것 같던 마르스티엘은 몸을 기울여 페란스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자신보다 훨씬 길쭉한 몸이 어정쩡하게 접혔다. 그래도 근사해 보인다는 게 문제긴 했다.
“다리를 더 뻗어. 불편해 보인다.”
“정말이지 왜…….”
흐려지는 끝말을 듣지 못했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뭐?”
“왜 다정한 겁니까.”
마르스티엘은 누워 있는 상태로 느닷없이 손을 뻗어 페란스의 목을 휘감았다. 뭘 어쩔 새도 없이 입술이 맞부딪쳤다. 누워 있는 자세 덕에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맞물리는, 조금 색다른 키스가 되었다.
입술이 겹치는 게 아니라 맞물렸다. 윗입술이 마르스티엘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신 제 아랫입술은 그의 윗입술을 덮을 수 있었다. 혀를 넣으면 그대로 들러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