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궁 안에서 난데없이 저런 소리가 들릴 리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페란스는 몸을 벌떡 일으켜 마차 문을 쾅 열었다.
왕실 마차를 세워 두고 근위대가 열을 지어 있는 정문 앞으로 말 한 마리가 달려오는 중이었다.
“누구냐!”
근위대장의 수신호에 근위대가 빠르게 움직여 길을 막았다.
“멈춰라! 신분을 밝혀!”
그러나 필요 없는 질문이 되었다.
섬뜩한 속도로 달려오는 말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곧 말고삐를 쥔 사람이 누군지 드러났다.
마르스티엘이었다.
“……칼을 내려! 내 약혼자다!”
근위대를 향해 외친 페란스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달려갔다. 근위대 앞에서 말을 세운 마르스티엘이 말에서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페란스가 그의 앞에 섰다.
마르스티엘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옷도 여기저기 흙이 묻어 더러웠다.
이제껏 맡아 본 적이 없던 낯선 냄새가 났다. 평소와는 달리 눈가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나타났다.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아예 틀어져 버리기 전에.
안도가 들끓어 올랐다. 그런 감정도 이렇게나 흉포해질 수 있었다.
페란스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마르스티엘을 와락 안았다.
근위대가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겠지만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마르스티엘이 움칫 어깨를 비트는 건 신경이 쓰였다.
페란스는 몸을 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혼자 말을 타고 온 건데. 짐과 일행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마르스티엘은 주먹으로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오는 길에 예기치 않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행과 짐을 잃었지만 사고를 수습한 후 합류할 것을 지시해 두었습니다.”
“사고? 어떤……,”
페란스는 말을 하다 말고 마르스티엘을 살폈다. 평소와 달리 실핏줄이 돋아난 눈을 이제야 보았다.
“……일단 마차에 타. 얘기는 천천히 듣겠다.”
기분이 이상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는데 더 이상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을 보면 사고가 있었다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그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기분 나쁜 감이 심장을 울렸다.
페란스를 평소처럼 움직이게 하는 건 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근위대였다. 표정을 지우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마차로 걸어갔다.
“예정대로 출발하는 겁니까, 전하?”
근위대장이 마차 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수행 인원을 늘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블루와렌 쪽 일행이 뒤늦게 합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으니 지금이라도 키슬크 공에게……,”
“출발하라 했다.”
“……예, 전하.”
근위대장은 어떻게든 출발을 지연시켜 보려는 것 같았다.
삐걱, 쿵!
그를 지나쳐 마차 발판을 밟고 올라서는 걸음이 유독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자리에 앉자 마르스티엘이 이어서 마차에 탔다.
“문 닫아.”
“예, 전하.”
탁!
마차 문이 닫혔다. 잠시 후 예정보다 사십오 분이 늦은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 * *
퍽!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페란스는 몸을 홱 틀어 마르스티엘의 어깨를 움켜쥐고 그를 마차 등받이에 내리쳤다.
마르스티엘이 한쪽 눈썹을 웅크리며 입을 뗐다.
“……전하,”
“시끄러워.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무슨,”
“네가 늦은 이유.”
뒤늦게야 감각이 구체화되었다.
더 이상 입이 열리지 않던 이유는 냄새 때문이었다. 희미한 땀 냄새, 흙먼지 냄새. 그리고 그 속에 섞여 있던 오메가의 페로몬 향.
맡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싶었던.
그러나 단절된 공간에 단둘이 있게 되자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낯선 페로몬의 잔향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가시처럼 뾰족해졌다.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왜 다른 인간의 냄새가 온몸에서 나는 건데!”
“전,”
퍽!
페란스의 주먹이 마르스티엘의 뺨을 스쳐 등받이를 내리쳤다.
힘이 너무 들어간 어깨가 부르르 떨려 왔다.
“대답을 잘 골라. 답이 시원찮으면 다음에는 그 잘난 얼굴을 칠 테니.”
“……사고가 있었습니다.”
마르스티엘은 손을 들어 페란스의 손목을 잡았다. 페란스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건드리지 마! 대답이나 해!”
“전하께서는 베르호예트라는 자를 아십니까?”
페란스가 이를 갈았다.
“말 돌리지 마. 지금 너는,”
“위스타드에 밀수 소금을 유통하는 큰손입니다.”
마르스티엘은 이를 가는 페란스의 턱에 손을 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히자 그가 다시 한번 페란스의 손목을 잡았다.
친밀한 접촉으로 화해를 청하려는 게 아니라, 페란스의 몸을 제게서 떼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블루와렌에는 밀수 소금보다 월등히 품질이 좋은 암염이 있습니다. 공급량은 향후 백 년간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소금 유통은 위스타드에서 가장 크고 빠른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그리고 그만 자리에 앉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각인 반응을 고려하십시오.”
“……그래서. 지금 네 몸에서 나는 게 페로몬 향이 아니라 소금 짠 내라는 말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닌 게 아니라 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노가 제 몸의 한계를 잠시 잊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페란스는 위에서 시작되는 메스꺼움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나 마르스티엘의 어깨를 움켜쥔 손을 떼진 않았다.
마르스티엘은 작게 한숨을 흘린 뒤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자를 상대할 일이 있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뒷골목 밀수꾼에게 해코지라도 당했다는 건가? 너는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페로몬을 뒤집어쓰고 왔을 뿐인데?”
“얘기가 조금 깁니다.”
마르스티엘이 밀수꾼을 직접 마주할 일은 없었다.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법적인 사업은 블루와렌이 전문이었지만 타국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마르스티엘은 왕실 공식 길드의 정식 유통망을 빌릴 생각이었고, 베르호예트 같은 깡패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점잖고 유약한 공식 길드의 귀족들은 마르스티엘의 등장을 환영했다.
그런 줄 알았다. 오늘까지는.
“길드 마스터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시그네 거리에서.”
시그네 거리는 대표적인 상업 지구였다. 수도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었고, 가장 활발한 상권을 지녔다. 대부분의 제조 길드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왕실 공식 길드 마스터와 회동을 갖기에 별반 이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길드의 안내원이 일행을 데려간 곳은 오메가 접대부가 있는 매음굴이었다.
매음굴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급 식당처럼 꾸며 놓은 탓이었다.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는 것도, 길드 마스터가 길드의 공금을 이런 식으로 흥청망청 쓰는 작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사방에서 풍겨 오는 페로몬에 불쾌감을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길드 마스터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을 보내 거취를 확인하겠다는 말을 세 번까지 듣고 난 뒤에야 계획된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류하는 안내인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오자 사건이 일어났다.
여행에 필요한 물자와 현금을 마차에 싣고 시그네 거리 인근으로 온 일행과 합류하는 순간 습격을 받았다. 마차를 사수하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졌고, 놈들은 살상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놈들을 베르호예트와 한패라 여겼던 건 위스타드의 소금 사업에서 손을 떼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협박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은 어느샌가 힘을 잃었다.
마르스티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저항 잃은 손을 제 몸에서 떼어 냈다.
그런 행동이 쓸데없이 다정하게 느껴져서 곤란했다.
“베르호예트는 아마도 잘 모르고 있었나 본데, 거래에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건 블루와렌에서 시작했을 겁니다.”
상대가 무기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마차를 빼앗길 정도는 아니었다. 몸싸움이 격렬해졌다. 이러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그 혼자만 빠져나와 궁으로 향했다.
중간에 따라붙는 놈들이 있어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놈들을 분산시켰으니 마차를 되찾을 확률도 더 커졌다.
“무슨 그런…… 그런 무모한 짓을……,”
“그 정도는 별것 아닙니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뿐이니 다음부터 경계를 하면 되고. 문제는,”
마르스티엘은 말을 꺼내기 전에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베르호예트가 오늘 제 일정을 어떻게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 그 점입니다.”
“감시라도…… 하고 있었다는 건가. 네가 레시토를 빌렸다는 건 많이들 알고 있을 테니.”
“저는 아직 베르호예트와 일면식이 없습니다. 제가 위스타드에서 하려는 게 소금 유통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왕실 공식 길드의 고위 인사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회동이 잡힌 게 고작 어제였습니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 자신이 벌이려는 사업을 시시콜콜 떠들고 다닐 일은 없었다. 소금 유통은 마르스티엘이 손을 대려는 사업 중 하나일 뿐, 유일한 것도 아니었다.
아는 이도 몇 안 되게 조용히 물밑 작업을 시작하려던 사업을 베르호예트 같은 밑바닥 작자가 벌써 알고 있었다. 정보를 입수한 것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 무얼 하려는지 알고 습격을 계획했다.
“왕실 길드에 인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왕실 길드가 밀수꾼을? 그자 때문에 길드에서 정식으로 소금 유통을 못 한다지 않았나?”
“네. 처음 왕실 길드에 접근했을 때는 유통망을 개선하는 일에 몹시 호의적이었습니다.”
왕실 길드야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블루와렌의 소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시중에는 질 좋은 소금이 정상적인 가격으로 유통되고, 시장을 더럽히던 깡패들도 처리가 되니 서로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왕실 길드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왜.
마르스티엘이 위스타드에서 소금 사업을 시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길드 마스터인 마이카오 백작이 아만다리스와 친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