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6)화 (16/122)

16.

닮은 페로몬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향이라 그 페로몬을 떠오르게 합니다.”

“……. ……그 페로몬은 제법 괜찮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네.”

뚝 자르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

짧은 답이었지만 그가 그 페로몬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아주 특별했을 것이다.

조금 닮았다는 이유로 역겨워야 할 제 페로몬마저 괜찮아질 정도로.

“연인이었나?”

“아닙니다.”

“그럼?”

알고 싶지 않았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역시나 알고 싶지 않은 이유로 심장이 지끈거렸다. 페란스는 물속에 잠겨 있던 손을 들어 가슴께를 눌렀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그게 대체 뭐라고. 이미 지나간 일일 텐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페로몬을 기억한다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처음 맡아 본 페로몬이라 그럴 겁니다.”

“아…….”

특별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다행인데…… 아니,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여전히 가슴은 미약하게 지끈거렸다.

인간은 대부분 처음 발견한 별자리를 밤하늘의 이정표로 삼았다. 마르스티엘에게는 그 페로몬이 기준이 됐을 것이다.

……그런 거라도 닮은 구석이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페란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심장에 들러붙은 달갑지 않은 감각들을 털어냈다.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워해야겠군. 그 덕에 네가 날 견디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을 테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도 딱 잘라 내는 대답이라 더 말을 붙이기도 애매해졌다.

페란스는 잠자코 눈을 감았다. 지난 일을 신경 쓰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진짜 연인처럼 시시콜콜 질시를 할 일도 아니었다.

“눈을 잘 감으십시오. 거품을 헹구겠습니다.”

“……진작 감고 있었어.”

“압니다.”

마르스티엘이 머리에 물을 부었다. 씻겨 내려가는 거품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눈가에서 미끄러졌다.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면 따가워졌을 것이다.

손을 들어 거품을 닦아 내려고 하자 마르스티엘이 제 손을 눌렀다.

“가만히 계십시오.”

곧 깨끗한 물에 젖은 손이 눈가를 닦아 냈다.

왠지 그 손을 붙들어 울컥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네가 왜 괜찮은 장사꾼인지 알겠어.

값이 비싸긴 했어도 물건은 확실했다. 거래의 일부인 친절과 다정함은 물건이 제값을 한다고 믿게 했다.

이런 물건이라면 평생 바가지를 써도 좋을 것 같잖아.

저도 모르게 위험한 생각이 들어 페란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행을 가야겠군.

더 손해를 보기 전에 거래를 마치고 손을 털어야 했다.

* * *

발정기가 온 아만다리스가 왕궁에 들어와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위대장은 사건을 목격한 근위대의 입을 빠르게 단속했고 왕자의 사실을 치운 궁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예 몰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문제가 되려면 페란스가 각인한 사실까지 드러나야 했다. 페란스가 다른 무엇보다 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사건은 아예 없는 일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일이 있었다.

시종장 키슬크가 묘하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단둘이 여행이라니요. 너무 빠르지 않사옵니까.”

키슬크가 조심스레 두 손을 모으고 말을 이었다.

“다른 귀족들을 동행하신다면 모를까, 그……, 단둘이라는 것은…….”

키슬크는 여전히 마르스티엘을 두고 왕실의 약혼자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그가 노예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 온 게 키슬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청혼이 빨랐으니 다른 것도 전부 빠른 게 당연하지.”

“그래도 전하,”

“떠들 것들은 멋대로들 떠들라고 해. 어차피 내가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건 다들 알 텐데 이제 와 점잔 떤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건…….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

키슬크는 제 예상보다 빨리 손을 들었다.

페란스는 슬쩍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이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빨리.”

“말씀하신 대로, 맞는 말이옵니다. 신년 연회에서 처음 얼굴을 본 뒤로 한 달도 되지 않아 하신 청혼이니까요.”

그리고 꽤나 많은 귀족들이 청혼을 목격했다. 그 자리에서 청혼 장면을 본 귀족들이라면 페란스가 연인에게 넋이 나가 있다는 걸 아무 의심 없이 믿을 터였다.

키슬크는 꼭 한숨을 쉴 것 같은 얼굴로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전하, 약혼식은 너무 서두르지 마시길 청합니다.”

“섭정의 체면을 생각하란 소리라면 집어치워. 그럴 마음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 그자를 두고 보시란 말이었습니다.”

“…….”

그 말이 조금 의외라 페란스가 턱을 까닥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출신이 비천하다는 말씀은 더 올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그런 자들은 끝내 왕실과 융화되지 못할 구석이 있사옵니다, 전하.”

“그런 말을 할 줄도 몰랐는데. 공이 내 면전에 대고 내가 택한 자를 흠잡다니.”

“결례임을 압니다. 하오나 입에 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전하.”

페란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화를 내는지 웃는지 통 모를 그런 표정이었다.

“그런 말을 섭정에게도 했나? 설마 섭정의 셋째 아들은 괜찮다는 말은 아닐 테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리고 섭정의 아들은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음? ……뭐라고?”

“제 자식 일은 섭정이 마땅히 알아서 했겠지요. 제가 염려하는 바는 전하의 안녕입니다.”

“…….”

이런 말을 할 줄도 몰랐다.

페란스가 아는 한 키슬크는 언제나 개새끼의 말을 아주 잘 듣는 개였다. 개새끼가 여기저기 심어 놓은 개들 중에서도 유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둘이 틀어지기라도 했나.

“……그렇다니 한 번은 귀담아듣지.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앞으로는 내 약혼자에 대한 얘기는 입에 올리지 마라.”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대화가 끊기는 시점에 기가 막히게 옷 입는 일도 끝이 났다.

재킷 여밈 부분에 정확히 펜던트가 걸리도록 목걸이의 길이를 조절한 키슬크가 손을 떼었다.

“다 됐습니다, 전하.”

아침에 키슬크가 옷을 입혀 주기 전, 페란스는 미리 셔츠를 입어 두는 편이었다. 대부분 아만다리스가 만들어 놓은 상처를 감추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옷시중은 늘 빨리 끝났다.

“내일 정오 출발이야.”

페란스는 키슬크도 아는 얘기를 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키사드 쪽은 준비가 된 게 맞나?”

“출발 시각을 일러두었으니 차질 없이 전하를 맞이할 준비를 해 놓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

마르스티엘을 못 본 지 사흘이 넘어갔다.

여행에 앞서 그 역시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약도 그렇거니와 위스타드에서 벌인 사업으로 인한 일들을 대충이라도 손을 대어 놓고 가야 했다. 사실에서는 당장 갈 수 있다고는 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자그마한 거짓말이 이상하게도 계속 가슴 언저리에 남았다.

실없는 소리는 절대 안 할 것처럼 생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했을 것이다. 궁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 곳에 자신을 계속 놔둘 수는 없다고 여겨서.

왜 그렇게 귀여운 짓을 하고 그러는 건데.

페란스는 속으로 투덜대며 손짓으로 키슬크를 물렸다.

“나가 봐.”

“예, 전하.”

거울이 금발의 오메가를 비추었다.

익숙한 얼굴이 오늘은 좀 낯설었다. 기운이 빠진 눈꼬리가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 * *

준비가 끝났다.

출궁 시 번거로운 절차를 줄이기 위해 페란스는 시간을 맞춰 마차에 올랐다.

청혼 뒤 공개적으로 성을 비우는 일은 처음이었다. 조금은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여행지로 키사드 성을 고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키사드 성은 대대로 카벨리카 왕실이 배우자에게 선물하는 별저였다. 모친이 죽기 전까지는 모친의 소유였고, 페란스가 왕실의 다른 재산과 함께 물려받았다. 그가 정식으로 혼인하는 날 키사드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을 키사드 성으로 데려간다는 건 꽤 노골적인 의미가 있었다. 소식을 접한 위스타드의 사교계 인사들은 이 약혼이 거래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페란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줄시계를 꺼내 들었다.

정오에서 벌써 십오 분이 지나 있었다.

“이런 인간이었나.”

남은 오 분이라도 늦으면 가차 없이 거래 파기를 통보할 것 같은 인간이 정작 자신은 늦는다는 데 좀 열이 받았다.

“십오 분. 십오 분이라…….”

개새끼를 제외하고 페란스는 자신을 기다리게 만드는 인간을 겪은 적이 없었다. 십오 분이면 페란스는 이미 자리를 뜨고, 시종장이 약속에 늦은 상대에게 알현이 거부되었음을 알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어찌할까요, 전하?”

마차 문을 지키고 선 근위대장이 물었다.

마르스티엘이 십오 분이나 늦었다는 얘기가 곧장 아만다리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 몹시 언짢아졌다.

“어쩌긴 뭘. 기다린다.”

“더 기다리신다고요?”

페란스는 신경질적으로 시계를 집어넣었다.

“약혼자와 떠나는 밀월여행에 약혼자가 빠지면 곤란하지.”

“……알겠나이다, 전하.”

근위대장이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페란스는 손톱을 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힘들게 고친 습관이라 도로 망치고 싶진 않았다. 손톱을 씹는 버릇은 발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생겼는데, 자면서도 물어뜯는 바람에 손톱 밑에 늘 피가 고여 있을 정도였다.

제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은 변명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궁정의가 손톱을 물어뜯는 게 불안 증세라고 말하는 순간 페란스는 자신이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를 각인이 아닌 다른 것으로 둘러대야 했다.

하여간 매번 거짓말을 쥐어짜 내는 것도 못할 짓이라 습관을 고쳤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마르스티엘 때문에 다시 손톱을 씹고 싶진 않았다.

그는 제게 불안이 아니라 안정이 되어야 했다. 늦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차 바퀴라도 빠진 모양이지. 호텔에서 빌려주는 마차가 시원찮을 수도 있잖아.

레시토에서 오는 길에 다리가 있나. 그 다리가 무너진 걸까.

아니면…….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며 시간을 세었다. 십오 분이었던 시간은 사십오 분이 되어 갔다.

“전하. 어쩌시겠습니까? 일단은 궁 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결정을 내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근위대장이 다시 말을 붙여 왔다. 그냥 좀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오 분.”

“……네, 전하?”

“오 분만 더 기다려. 그리고……,”

거기서 막혔다.

오 분을 더 기다리는 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이 막막했다.

여행을 취소해야 할지, 아니면 혼자라도 가야 할지.

둘 다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을 택하든 손톱을 씹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페란스가 말을 잇는 대신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이히힝!

거친 말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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